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행기가 난기류에 심하게 흔들린 적이 있다. 이 순간 추락해서 죽으면 어떻게 될까, 잠시 생각하다 우연히 보게 된 통로 건너편의 백인 아저씨는 유유히 킨들로 뭔가를 읽고 있다. 기체가 요동치는 순간에 그는 그의 그런 태평한 모습이 한 동양인 아줌마의 심리 안정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렇게 여유롭게 있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판단이 섰고 좀 안정이 됐다. 


이후로 나는 킨들을 스마트폰에 다운 받아 어쩌다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 아저씨 코스프레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안정을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도 괜찮다는 착시를 내 자신에게 주고 싶다는 것에 더 가깝다. 비록 그것이 '아노말리'(비정상)적 상황이라 해도 착각한 상태에서 계속 비행할 수 있다면 나는 견딜 수 있다고 주문을 왼다.


이 책에서 승객들을 태운 에어프랑스 여객기는 난기류를 뚫고 착륙한다.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는 이 여객기의 승객들의 에피소드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중산층 소시민을 연기하는 살인 청부업자, 사후 유명 작가가 되는 작가, 죽음을 앞둔 기장, 가족 내 성폭력에 노출되는 소녀, 연령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연인. 그들 개개의 이야기는 독립된 단편처럼 인상적이고 흥미롭다. 그러나 <아노말리> 이야기의 핵심은 그런 개개의 삶에 있지 않다. 이들의 분신이 다시 석 달 여의 시차를 두고 착륙하며 서로를 만나게 된다는 데에 있다. 나는 시차를 두고 분열된다. 한 명의 나는 다른 한 명이 그 시간 동안 겪은 일을 알지 못한다. 한 선택에 놀란다. 하지 않은 일에 당황한다. 이건 노년의 내가 이십 대의 내 모습을 만나는 것처럼 낯설지는 않지만 여전히 충격적인 일이다. 내 모습을 대면하는 나는 생각보다 내 모습을 사랑할 수 없고 거기에 익숙해질 수 없다. 시간의 벽을 두고 분리되어야 하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내가 공존하는 세계는 혼란스럽다. 


<아노말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거대한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적이라 착각하며 유지되는 것임을 간파한다. 지금이라도 환경의 재앙과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황에서 우리는 여전히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하고 좌절하고 집착한다. 끝에 인용한 니체의 "진리는 우리가 환상임을 망각한 환상이다."는 이 책의 핵심 메시지일 것이다. 이 모든 게 환상이라는 깨달음은 삶 전체를 농담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인간은 그럼에도 여전히 착각하며 살기를 택할 것이라는 작가의 예견은 과장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부터 행동들이 나를 만들었지만, 어떤 움직임도 나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내 몸은 내가 그리지도 않은 선들이 이끄는 대로 사는 데 만족했다. 우리는 가장 힘이 들지 않는 저항 곡선을 따라 살 뿐인데도 마치 공간을 지배하는 양 건방을 떤다. 한계 중의 한계, 어떤 비상도 우리의 하늘을 펼치지는 못하리."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소설가 미젤의 이야기다. 우리의 무능력함과 우리의 수동성을 그리면서도 희망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분명 이 한계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인정과 더불어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블랙코미디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그 착각 속에서 여전히 선택한다고 살아나간다고 믿는 우리의 모습의 성공적인 희화화 때문일까. 


에르베 르 텔리에는 수학자이자 언어학자라고 한다. 그의 이런 배경은 다양한 차원의 지적 실험으로 풍성한 읽을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현란한 지적 유희의 현장 안에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을 생생하게 형상화해낸 작가의 공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의 매력은 독자가 몸소 에어 프랑스 여객기에 탄 한 명의 탑승자처럼 스스로를 이야기 속에 넣어보게 되며 일종의 평행우주적 삶의 실험을 해보며 스스로의 삶 자체를 살펴보게 한다는 데에 있다. 과거의 나와 대면한 현재의 나를 가정해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오늘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노말리>의 미덕은 충분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08-04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설정이 굉장히 끌리네요. 이 책도 일단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꼭 읽자 주먹 꽉 쥐면서 말입니다. ^^

blanca 2022-08-04 21:11   좋아요 2 | URL
^^ 저도 설정, 줄거리가 마음에 들어 시작했는데 역시 기대를 충족시켜줬어요. 일단 재미있더라고요.

scott 2022-08-09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노말리 작가
어떤 문예지에 인터뷰가 실렸는데
블랑카님 리뷰 읽으니
읽고 싶어지능 ㅎㅎ


저는 제가 탔던 엘레베이터가 급 멈춰 버린적이 있는데(그 엘레베이터 사방이 유리였음)
당황 하기 보다 밖에서 우리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눈빛이 더 무서웠습니다 ㅎㅎㅎ

blanca 2022-08-09 08:45   좋아요 1 | URL
흑, 알죠. 안 그래도 꼭 읽어보려고요. 해외 인터뷰 기사 검색해 보니 모조리 초반 제공에 돈 내라 하네요. ^^‘‘ 내가 나와 잘 지낼 수 있는지 나도 궁금하다는 말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연세도 있는데 여러 분야에 대한 지적 열정, 인생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는 모습 저도 자극 받았어요. 저는 최근에 엘리베이터에 갇혔는데 갑자기 답답해서 마스크를 본능적으로 벗어서 안의 사람들이 저를 보고 놀라더라고요. ㅋㅋ

폭우가 쏟아져 난리네요. 스캇님도 비 피해 입지 않으시기를 바라고 더 이상 비가 안 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