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네에서 초등, 중등, 고등, 대학을 다 다녔다. 아직도 그곳에 친정이 있다. 그곳에 가면 내 안의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이 낡고 늙고 변했다. 사람도 장소도 사물도. 그 안을 걷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툭툭 내려앉는다. 왜 그럴까. 그 세월의 무게가 누적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월은 쌓고 모으고 쟁이는 것이 아니라 소진하고 나누고 결국 사라지는 일이다. 그 허무를 견뎌내기 힘들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나에게 익숙한 풍경들도 결국은 모두 사라지고 끝난다. 시간과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없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것을 문학적으로 구현했다. 1880년 봄부터 1930년 여름날까지 파지터 일가를 중심으로 한 연대기식 세월의 이야기는 장려하고 아름답지만 역시 허무하다. 그 허무를 껴안는 일이 버지니아 울프는 힘들었던 듯하다. 그녀의 최후가 세월에 대한 그녀 나름의 반응이었을까. 결국 모든 것을 파기하고 말 시간의 힘 앞에서 그녀는 갈 곳을 잃었다. 


인생이란 우리가 다루거나 만들 수 있는 것이라야 하지 않나?-칠십여 년의 인생이지. 하지만 여기 내게는 오직 현재의 순간만 있을 뿐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버지니아 울프 <세월>


빅토리아 시대 후기, 퇴역 군인 아벨 파지터는 투병중이었던 아내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그의 자녀들인 엘리너, 에드워드, 마틴, 로즈, 밀리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삶을 살아나가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사실 특별할 것이 없다. 계절의 경과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전쟁터에 나가고 누군가는 독신으로 늙어간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들의 이러한 행보를 그저 한 발짝 떨어져 담담히 묘사한다. 그 사이로 그녀의 눈부신 문장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주와 시대의 파고로 인한 역사적 격랑이다. 시간이 들고 나며 변전하는 모습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역동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쩐지 현재의 모습과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다. 여전히 돈,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 사회와 외부에서 주어지는 휘장 속에 숨어 진짜 자기와 자기 인생을 잃어버리는 우리들. 지금, 현재, 여기에서 나를 중심으로 엮어 나가야 하는 인생에 대한 가치를 울프는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는 비가 부드럽게 뿌리듯 내려 보도가 미끄러웠다. 우산을 펴는 것이 좋을까, 마차를 불러야 할까. 극장에서 나서던 이들은 별빛이 흐릿해진 포근하고 희뿌연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고민했다. 땅에, 들판이나 정원에 비가 내린 곳에서는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빗방울이 풀잎에 매달려 있기도 했고 야생화 봉오리 안에 가득 담겨 있다가 산들바람이 일어 흩어지기도 했다. 

-1880년 버지니아 울프 <세월>


어쩐지 1880년의 비가 내리던 풍경이 낯설지 않다. 거대한 패턴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나 보다. 우리가 처음으로 알고 사는 삶은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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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2-06-23 17: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우리가 처음으로 알고 사는 삶은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 막연하게 느끼기만 하던 생각을 잘 짚어 표현해주셨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도 오늘 저녁 비예보가 있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blanca 2022-06-24 09:04   좋아요 1 | URL
아, 어제 비 정말 무섭게 오더라고요. 반면 오늘 활짝 개어 너무 상쾌하게 시작하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그레이스 2022-06-23 1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날씨에 너무 어울리는 글입니다.
허무, 그렇지만 생에의 의지도 강했다는 생각!
그러기에 오히려 반복되는 나락이 두려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blanca 2022-06-24 09:05   좋아요 1 | URL
벌써 어제가 되어버렸네요! 그레이스님 좋은 하루 되세요.

2022-07-01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01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