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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 사라진 알베르틴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베르틴 양이 떠났어요!"로 출발하는 이야기. <사라진 알베르틴>은 사람이 한 사람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망각의 작업을 완성하는 이야기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의 본질적 특색이 가장 잘 구현된 부분이기도 하다. 프루스트의 상실의 이야기는 그것이 체념이나 애도에서 그치지 않고 한 인간의 삶에 서사로서 통합되는 과정으로 승화된다.
마르셀은 알베르틴을 사랑하면서도 그녀가 가진 동성애 성향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투했다. 심지어 그녀의 죽음 이후로도 친구 생루를 알베르틴이 묵던 봉탕가에 보내 그녀의 뒷조사를 시킬 정도다. 소녀의 죽음 이후에도 생전에 구성하지 못한 그녀의 삶의 여백을 채우기 위해 염탐도 서슴지 않는 화자의 모습은 편집증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은 알베르틴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알베르틴을 사랑했던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복원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닐까.
모든 계절과 연결된 알베르틴의 추억을 지우려면, 마치 편측마비에 걸린 노인이 다시 읽고 쓰기를 배우듯, 비록 그 계절을 다시 알게 된다 해도 온 계절을 망각해야 했다. 온우주를 단념해야 했다. 오로지 나 자신의 진정한 죽음만이(그러나 불가능한 일인)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내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pp.120
알베르틴이 화자를 사랑했느냐, 아니면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교환할 수 있는 상대로 이용했느냐는 어쩌면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닌지도 모른다. 알베르틴과 함께 보냈던 그 시간들이 부재하는 여인의 부활과 더불어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그 과정을 복기하는 여로에 독자들을 초대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진실이 드러나느냐, 아니면 영원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을 것이냐는 이 이야기의 핵심적 가치가 아닌 셈이다. 설사 그것이 기만일지라도 그렇다.
마르셀은 알베르틴 때문에 유예했던 이탈리아 여행을 마침내 어머니와 함께 가게 된다. 그가 어머니를 홀로 보내고 석양이 지는 테라스에 앉아 한 가수가 부르는 '오 솔레 미오'를 들으며 어머니와의 이별을 예감하는 장면은 처연할 정도로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 이별은 비단 이번 행로에서 그칠 일이 아니라 결국 영구적인 것이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마침내 죽음으로 이별할 수밖에 없다. 그 숙명적인 단절의 예감이 자아내는 애조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이것은 프루스트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시간이 결국 파괴하는 것들에 대하여 인간은 알지만 여전히 거기에 온몸을 담그고 분투하며 살아야 한다. 그 낙차 앞에서 아연해지는 모습.
왜냐하면 모든 것이 마멸되고 사라지는 이 세상에서 폐혀로 변하는 것, 아름다움보다 잔해를 덜 남기면서 보다 완전하게 파괴되는 것은 슬픔이다.
-pp.471
시간 앞에서 파괴되는 슬픔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