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 기법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조이스의 <율리시즈>이지만 흔히 난삽하고 어떤 체계나 구조가 없는 표현기법에 자주 차용된다. 무엇보다 청자나 독자가 화자와 작가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을 때 방패막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 작가가 의식의 흐름대로 썼다고 하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불친절하고 난해한 글쓰기를 연상하게 된다. 

















솔직히 버지니아 울프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파도>는 이러한 의식의 흐름에 따른 불친절한 작품이다.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은 해체되어 있다. 뚜렷한 서사 대신 여섯 명의 화자가 독백처럼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그마저도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그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형태가 아니라 불투병한 휘장이 드리워진 듯 각각의 구역 안에서 독립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는 모습이다. 중심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가 버나드의 관찰이 가장 두드러지지만 결국 이 어린 시절의 친구들처럼 보이는 여섯 명은 독립 분리된 개별자들이 아니라 버나드의 내면이 다 포괄하는 하나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가능할 정도로 그 경계는 모호하다.


아홉 개로 나뉘어진 섹션은 자연, 특히 파도를 중심으로 한 간주 형식의 묘사와 삶의 유년, 청춘, 중년, 노년, 죽음의 모습과 맞물려 이루어져 있다. 우리 인간들이 시간과 사회,외면에서 부여한 삶의 경로에서 기대되는 역할의 페르소나를 입은 채 소멸로 걸어가는 여정의 묘사는 태양이 떠오르고 지고 마침내 "파도는 해변에 부서졌다"로 종결될 때까지 각종 부조리와 무의미와 충돌하지만 무의미와 절망의 종결부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데에 울프의 진가가 있다. 울프는 어떤 섭리와 초극을 향해 죽음이 가지는 한계와 동시에 확장에 가닿은 시선을 언어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우리는 창조자이다. 과거의 수많은 집단들에 합류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도 무언가를 창조했다. 혼돈 속으로가 아니라 세계 속으로 성큼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이 정복하고, 빛을 발하고, 영원한 길의 일부를 만드는 세계 속으로."

-버지니아 울프 <파도> pp.153


그것은 역사 의식이자 타인과의 합일이다. 나와 너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물고 심원하고 영원한 회귀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 더 큰 의미의 일부가 되는 삶과 생명으로서의 자각이 이 생의 한계를 허물 때 우리는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고 울프는 믿었던 것 같다. 그녀가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고 몇 달 후 죽음으로 걸어들어간 행로를 그래서 미화할 수는 없지만 그녀 나름의 마침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 생에 부과 받은 언어화의 작업을 완수했다고 여겼을 때 그녀는 "너를 향해 내 몸을 던지노라, 오오 죽음이여!"라는 <파도>의 마지막 문장과 만났다.


<파도>는 읽어 이해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살며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궁극의 이야기다. 아직도 제대로 다 읽은 것인지 제대로 작가의 의도를 읽었는지 확신이 안 선다. 시간의 방울, 하루 하루의 경계를 넘어가며 사는 우리들이 각자의 외피를 입고 견디는 나날들의 심연에 가닿은 울프의 언어로 조금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착각이 유효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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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4-01 19: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쉽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읽다가 점점 오리무중의 늪에 빠지는 거 같아서 일단 멈추고, 해설을 읽고 다시 읽으니 그제야 진도를 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책은 한 달에 한 권 이상 읽으면 머리통 지퍼 열릴 거 같아요.

blanca 2021-04-01 20:50   좋아요 2 | URL
이게 참 묘했던 게 사실 초반부 읽으니 뭔 말인지 도통 헷갈려서 집어치우려 했거든요. 그런데 손에서 놓을 수가... 진짜 이게 버지니아 울프의 힘인가 싶더라고요. 정말 재미 자체는 없었는데 이건 진짜 대단하다, 이런 생각이 들고...여하튼 무언가 보통 작가가 아니라 이 사람은 뭔가 평범한 사람은 보지 못한 삶의 비의를 엿본 사람이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이드 2021-04-01 2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에 등대로 읽으면서, 아, 쉬운 글 쓰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지금 읽는 책에 버지니아 울프처럼 길게 글 쓰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깐 한다면서 예시 나와서 공감했습니다. ㅎㅎ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으로‘ 읽으면서 울프가 가족 이야기들 본인과 주변 이야기들 소설에 녹여낸거 생각하면, 그나마 좀 읽혔는데, 파도는 또 벽이 크지 싶습니다. 울프 책 쭉쭉 읽고 있는데, 저는 지금 ‘울프 일기‘ 읽고 있어요.

blanca 2021-04-02 12:13   좋아요 0 | URL
아, 이게 진짜 버지니아 울프는 마성의 매력이 ㅋㅋ 분명 재미가 확 있는 건 아닌데 중독성이 있어요. 저도 아예 전작 시도를 할까 지금 고민중입니다. <세월> 고민 중이에요. 여기에서도 남자 형제들, 여자 형제들의 모습이 녹아 들어간 느낌이랍니다. 자전적인데 자기 복제적이지 않은 게 또 대단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