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유년기, 사춘기, 청년기에 겪은 일들로 지금 돌이켜 보면 별 일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그것 때문에 그 당시에는 지축이 흔들리는 괴로움, 번뇌, 상처를 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평생에 걸쳐 그 사람의 내면에 가라앉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으로 행동하고 타인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데에 영향을 끼친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나에게 신입사원 시절 선배 직원은 중학교 때 경험한 학교 폭력의 경험을 얘기하며 그게 얼마나 사람을 파괴하는지 마치 지금 여기에서 다시 그 악몽을 경험하는 것처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고 나는 그런 그에게 백이십 프로 공감할 수 있었다. 6학년 때 나는 학교 가는 길이 지옥으로 가는 것처럼 두려웠다.
그래서 하루키의 <침묵>을 읽으며 나는 치유의 경험을 했다. 주인공 오자와가 자신의 중고등학교 시절의 그 고통스러운 경험을 고백하며 자신이 어떻게 그 시간들을 견뎠는지, 그 시간들을 견디며 자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하필 절친도 아니고 형제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어떤 거리감이 있는 직장 동료에게 전부 얘기하는 광경에도 일종의 데자뷔가 있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나는 비겁하게 나의 얘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얘기를 들으며 마음 한곳이 급속하게 아려왔다. 뜬금없이 우리는 일을 하다 갑자기 그가 생각난 듯이 중학교 시절의 학교 폭력을 얘기했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고 그 직원은 다시 한 문장, 한 문장 눌러 밟듯이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억울했는지를 나에게 얘기했다. 나는 그 얘기들을 예사로 들을 수 없었다. 나도 그의 그러한 억울함과 두려움과 자기 비하를 통과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던 것 같다. 사실은 나의 얘기를 듣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그런 일을 통과하면 그 사람은 절대로 그 이전과 같아질 수 없다. 소위 감정적인 맷집은 기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목격한 사람은 그렇다. 사람을 온전히 믿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하루키는 그것을 정확하게 안다.
설사 지금은 이렇게 무사하고 평온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거나 뭔가 지독한 악의로 똘똘 뭉친 것이 찾아와 그런 평안한 생활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린다면, 비록 내가 내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고 좋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거라고요.
-무라카미 하루키 <침묵>
오자와는 자신을 교묘하게 괴롭인 동급생 아오키보다 그를 침묵으로 추종한 다수의 무리에 대한 두려움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비단 어린 아이들의 학급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이 사회가 유지되는 한 언제든 어디에서든 재현될 수 없음을 간파하며 두려워한다. 자신은 학창시절의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결국 이겨냈지만 그것이 일회성으로 그칠 상황이 아닐 것임도 깨닫는다.
하루키의 인물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작가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인물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가진 경험을 통과한 인물들이 결국 어떻게 현재에 안착하는지에 대한 지독한 천착이 작가의 문장을 통해 드러나는 데에 있다. 결국 읽는 이들은 누구나 한 명쯤은 자신과 동일한 경험, 비슷한 깨달음을 얻게 된 하루키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침묵>의 오자와는 그런 의미에서 읽고나서도 한참 그 여운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이였다. 듣는 자는 '나'이지만 말하는 자의 삶을 통하여 '나'역시 감화를 받는 그 구도도 인상적이었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