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과 소설을 둘 다 잘 쓰는 경우는 잘 없다고 생각했는데 츠바이크는 이러한 개인적인 믿음을 완전히 박살 낸 작가다. 그가 역사적 인물을 테마로 구축한 이야기들의 생생함은 물론 탄복할 정도였다. 심지어 마리 앙투네와트가 단두대에서 사라져 갈 때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 정도니까. 대책없는 발자크의 이야기는 또 어떻고. 이런 무모한 인물들도 그의 문장으로는 설득력을 친밀감을 매력을 얻는다. 그런데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은 훨씬 후에야 읽게 되었다. 별 기대 없이. 솔직히 조금 지루할 거라는 예상과 함께.
심리 소설이라는 평가와 함께 다소 나름의 장광설을 늘어놓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이 한 청년의 선의에서 출발한 나약한 연민의 파국의 이야기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작품성은 차치하고 재미만으로 도저히 책을 내려놓을 수 없을 지경이다. 문장이 휘몰아치는데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소설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접경지역의 군사 주둔지다. 가난한 청년 호프밀러 소위가 지역의 유지의 딸 에디트를 만나서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며 이야기는 펼쳐진다. 장애를 가진 에디트에 대한 연민과 청년의 공명심과 무모함이 섞여 빚어내는 갈등 상황과 그 상황에서의 내면의 심리 묘사의 날카로움이 대단하다. 우리가 흔히 가치 판단의 영역에서 열외시키는 타인에 대한 사소한 연민, 나약함, 허영심에 대한 분석의 설득력에 저마다 자신의 어리석고 못난 허식을 들킨 기분이 들 정도다.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이 가진 것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허점과 나약함을 드라마틱하고 우연적인 사건으로 드러내는 솜씨가 경이롭다. 나중에는 호프밀러 소위를 끊임없이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에디트가 너무 미워 견디기 힘들 지경이다. 자신의 약점을 상대의 연민과 죄책감의 멍에로 이용하는 일종의 역학이 독자에게는 그대로 노출되며 거미줄의 사슬에 얽혀 옴쭉달싹 못하는 호프밀러의 모습에 스스로를 투사하게 되는 것이다.
호프밀러가 결국 도망친 곳에 타협한 지점에 우리 모두는 낯익은 풍경을 발견하다. 하지만 끝내 속일 수 없는 그 눈은 우리 내면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도.
나는 이 세상에서 나쁜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사악함이나 잔인함이 아닌 나약함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p.246
츠바이크의 미덕은 인간의 복합적인 심리의 다층구조를 탐사한다는 점이다. 전적으로 사악하거나 전적으로 선한 사람은 없다는 통찰은 결국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모든 사악하거나 나약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 또한 츠바이크 특유의 도덕적 염결성의 표현이다.
결국 그가 전쟁 앞에서 택한 죽음은 그러한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의 절망의 마침표 같아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