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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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분위기와 개인의 삶은 불가분의 관계다. 암울한 시대에 홀로 빛나는 삶은 없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어느 정도의 기만을 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IMF가 오기 전 청춘을 경험한 90년대 학번이 90년새들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얘기에는 설득력이 있다. 경제적 부흥과 청춘이 만나 만들어지는 서사는 빛난다. 


미국의 대공황기가 끝난 1930년대 후반의 부유한 청춘들에 대한 얘기는 그래서 유독 눈길을 끈다. 이미 피츠제럴드가 기민하고 화려하게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전직 투자전문가인 에이모 토울스가 데뷔작으로 비슷한 주인공들을 불어내어 그럼에도 전혀 식상하지 않은 <우아한 연인>을 썼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시대의 흥청대는 분위기와 통통 튀는 젊고 아름다운 인물들의 욕망,좌절, 사랑, 배신에 대한 묘사가 놀랍도록 섬세하고 생생해서 마치 그 시대 안으로 저도 모르게 초대된 듯한 느낌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케이티 콘텐트는 그 자신이 물론 서사의 한가운데에 있긴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 같은 명민한 시대의 관찰자이자 증언자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그녀의 시선을 통과한 그 시대는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기도 하고 그 자본주의와 온갖 겉치레의 사다리에 기어올라가려는 적나라한 욕망의 오점들로 오염되어 있기도 하다. 특히나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은 마치 개츠비의 형제처럼 보이는 팅커 그레이라는 인물을 통해 극적으로 형상화된다. 케이티와 룸메이트 이브는 팅커 그레이와 우연히 만나 친구이자 묘한 삼각 관계에 얽혀들며 이 수수께끼 같은 청년이 속한 맨하튼 상류 사회의 화려한 사교계와 그 안의 내밀한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는 시종일관 결국 이 팅커 그레이라는 인물이 구현해 낸 그 복합적인 삶의 기만을 통해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종종 혼동하는 과정에서 놓치는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던 느낌이다.  계층의 사다리의 상부에 비교적 쉽게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타인의 필요와 맞아 떨어질 때 어떤 비극을 연출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낯선 것이 아니다. 에이모 토울스의 미덕은 그 골조를 통해 완성해 낸 건물 자체의 수려한 경관일 것이다. 진부할 수 있는 테마가 전혀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 또한 그의 이러한 능력에서 나왔을 것이다. 


놀라운 점은 사십 대 후반의 남성 작가가 20대 중반의 여성의 마음을 완벽하게 대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우연히 부잣집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파티에 참가했을 때의 케이티의 그 시린 마음을 여러 다양한 경로로 경험한 기억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어리석은 치기에 완벽하게 몰입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남은 중년의 삶에 유일한 위로가 될까? 에이모 토울스는 그 어리석지만 찬란한 아둔함의 정서가 반드시 청춘과 만나야 함을 정확하게 알아차린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남용했던 시간들은 반드시 그때였기에 가능한 지점이 있다. 망각했던 시간은 진저리나는 그리움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중년의 끝자락'에 무사히 안착한 케이티가 회고하는 이십 대의 느낌은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다. 이십 대에서 사십 대로 선형적으로 진행하는 이야기가 가지지 못하는 어떤 회고적 시선은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을 것이다.


눈물겹도록 무의미하지만 아름다운 장면이 많다. 특히 케이티의 남자친구가 이웃이 치는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신청곡을 적어 끊임없이 종이 비행기를 그쪽으로 날려 보내려는 무용한 시도에 대한 장면, 셋이 본격적인 삼각 관계에 돌입하기 전 연말을 마무리하고 나란히 새해를 맞이하며 함께 노래 부르고 눈싸움을 하는 정경이 참 예뻐서 기억해 두고 싶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읽고 나면 왠지 마음이 저릿해지는 청춘의 이야기다. 뒤돌아보고나서야 깨달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찰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이처럼 공명한다.  


금박의 제목이 빛나는 우아한 분홍색의 표지와 핑크빛 가름끈은 책의 형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본질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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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6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블랑카님, 이 좋은 소설을 이제야! 드디어! 읽으셨군요.
저는 케이티를 우연히 만난 팅커가 케이티에게 ‘그래, 여기에요?‘ 라고 묻는 장면을 너무 좋아해요. 케이티가 찾아가는 비밀 장소가 있다는 말을 일전에 했던 걸 기억하고 말이지요.

에이모 토울스는 이 작품 후의 작품 [모스크바의 신사]도 매우 좋아요, 블랑카님. 이 책을 이렇게나 좋게 읽으셨다면, 모스크바의 신사도 매우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blanca 2020-03-16 17:02   좋아요 0 | URL
아, 안 그래도 냉큼 샀어요. 이 작가 대체 뭐죠? 사십 대 후반에 이런 작품을 데뷔작으로 쓸 수 있다니... 안 그래도 <모스크바의 신사>도 냉큼 샀어요. 이 작가 대체 뭐죠? 사십 대 후반에 이런 작품을 데뷔작으로 쓸 수 있다니... 그리고 왜 이렇게 전형적으로 멋있는 남자들이 많이 나오고 또 다 여주인공 좋아하고. 이렇게 쓰면 되게 유치한 것 같은데 전혀 그런 분위기도 안 풍기고. 좋은 작가는 정말 차고 넘치는군요.

비연 2020-03-16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 이 책을 냉큼 주문했었는데 아직 못 읽고 있네요. 다들 호평이신데.. 얼른 읽어야겠다는.
에이모 토울스의 글은, 우아하면서도 두리뭉실하지 않아 좋은 것 같아요. 아름답지만 슬픔이 담겨 있는 장면들을 우아하게 묘사한다는 느낌이랄까. 아 읽을 책이 너무 많습니다.. 흐미.

blanca 2020-03-16 17:03   좋아요 0 | URL
아. 비연님은 <모스크바의 신사>를 먼저 읽으셨군요! 저는 지금 받아서 며칠 후에 시작하려 해요. 이 책과 어떻게 다를지, 기대됩니다. 진짜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아하면서도 섬세하죠. 이 작가의 팬이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