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제임스 설터 지음, 최민우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2월
평점 :
품절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열차 안에서 그는 <마드모아젤> 잡지를 펴들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특집 기사에는 웨일스 시인 딜런 토머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는 딜런 토머스의 시를 읽으며 '이런 걸 하고 싶다'는 갈망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1954년 겨울,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제임스 설터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전역했다.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행동이었다. 생각건대 내 안에는 글쓰기가 다른 일보다 훌륭한 일이라는 믿음이 늘 잠복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결국에는 글쓰기가 더 훌륭하다는 게 입증되리라는 믿음이. 미망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나의 내면에는 리가 했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 맞이한 새벽들, 지냈던 도시들, 살았던 삶들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 만사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오면, 오직 글쓰기로 보존된 것들만이 현실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p.27


이 말은 결국 이 책으로 체현되었다. 아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제임스 설터의 아내는 그가 "쌓아두면 안 돼."라고 했던 충고의 반증을 찾아내고야 만다. "상자가 자꾸 나왔다." 제임스 설터가 쟁여두었던 글들은 글쓰기로 보존된 그의 삶의 잔재들이었다. 전투기 조종사였던 그가 어떻게 작가의 길로 들어섰는지, 스위스 제네바의 박물관 같은 호텔에서 14년을 지낸 나보코프의 공간은 어떻게 넘쳐나는 꿈으로 채워졌는지, 호색한 단눈치오가 어떻게 여배우 엘레오노라 두세를 유혹하고 조국을 전쟁으로 끌여들였는지가 그의 피뢰침 같은 언어로 묘사된다. 문학, 그의 친구들, 1920년대 프랑스에 대한 동경, 암벽 등반, 스키 도시, 아이의 탄생 등 언뜻 보면 삶의 파편 같은 삽화들이 그의 시선과 목소리를 빌리면 생생한 완결성을 지닌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읽는 이를 한없이 말려들게 한다. 


사람들에 대해 쓴다는 건 그들을 철두철미하게 파괴하고 이용해먹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경험에 대해서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한 세계를 묘사하는 동안 그 세계는 절멸되고 수많은 기억이 폐허로 돌아간다. 사물들과 사건들은 포획된 뒤 생명이 모두 빠져나가 다시는 반짝이거나 빛을 되돌려 받지 못한다. 

-p.322


그래서 그럴까? 그가 이야기하는 유명 산악인들의 삶과 작가, 영화인, 휴양 도시 아스펜, 파리의 '진짜' 레스토랑 '라 쿠폴'은 마치 눈 앞에서 빛나는 듯 찬란하다. 그의 기억에서 빠져나온 모든 것들의 묘사의 촘촘함은 경이로울 정도다. 모든 화석화된 기억들이 제임스 설터를 뚫고 지나가면 잃어버린 숨결을 부여받는다. "글쓰기란 감옥"에 그가 유폐된 것은 남은 자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를 읽는 일은 내가 떠나온 잃어버린 미처 살지 못한 그 세계에 잠시 불시착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별"이라던 보몽과 플레처가 쓴 시구를 마음으로 암송하는 체험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eehyun 2020-02-20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셜터의 ‘사냥꾼들‘도 좋았답니다.

blanca 2020-02-20 16:06   좋아요 0 | URL
오, 안 그래도 소설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어요. 추천 감사합니다.

Jeanne_Hebuterne 2020-02-23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의 단어들, 아스펜, 파리, 라 쿠폴, 이런 대목을 읽으니 이 작가가 정말 궁금해져요. 작년 즈음 제임스 설터가 마치 유행가처럼 판매고가 오르는 것을 보고 약간 경계하고 있었거든요!

blanca 2020-02-23 20:25   좋아요 0 | URL
저는 설터의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 에세이집의 문장들을 읽으니 너무 궁금해지는 거예요. 아주 짧은 글 하나도 마치 영상 이미지처럼 직조하는 데에 진짜 일가견이 있는 작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