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승개밭--심호택


할머니 말씀은 노상
노다가 목 마르거든 옥순네 집으로 가거라--
물으 한 그릇 청해 주시오 하거라--
그 말씀이 마냥 가소로왔다
해해해
싫어 싫어 청해 주는 게 또 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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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다 리뷰를 썼으면 좋겠지만 시간도 없고 정신도 없어서 기록이나 남길 겸 여기다가 대충 적는데,
요즘은 어쩌자고 이렇게 생활이 까치둥우리처럼 정신사납고 어수선한 것인지!

 

 하나 같이 버릴 데 없이 알찬 글들이 가득 실린 비평집이다.
 생각의 깊이와 삶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 빼어나게 조화되어 있다. 
 저자의 사회적, 역사적인 안목으로 인해 이 책 속의 평론들은 
 일반적 문학비평에서 찾아보기 힘든 통찰을 보여준다.
 인용의 출처가 생략된 글이 많다는 점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이런 책 뒤엔 더 읽어볼만한 책 리스트라도 붙어 있었으면 싶었다.

 

 

 주말마다 밥을 한 솥 가득 짓고 먹을거리를 잔뜩 만들어놓고,
 이렇게 일하러 가지 않으면 엄마는 도로 공장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엄마 없이 집에 남을 아이들을 반 협박하고 반 을러서 다녔다는
 소설가 공선옥의 기행집. 말지에 연재된 기행문들로 엮여져 있다.
 눈만 호사스럽게 하는 외국 여행집이 아니라,  가난하고 텅 비고 나이 먹은
 한국 농촌의 삶의 모습이  감상 없이 그러나 들꽃처럼 정직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글과 함께 수록된 박여선, 노익상의 사진들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뒷표지에 박힌 소설가 심상대의 적확한 비유대로,
 그야말로 '가정식 백반'  같은 단편집.
 이 책 단편 속의 주인공들은 대개 장년 혹은 노년층이며
 농촌이나 지방 변두리 소도시에 거주한다.
 젊은 독자들에겐 나이 먹은 이들의 삶을 엿보게 해주는 역활까지 톡톡히 해내는
 한창훈이 풀어놓는 이야기들엔 담담하며 소박한 나름의 맛이 있다. 
 날씨가 각기 다른 변덕스런 여러 계절을 거치며 천천히 익어든 된장 맛 같다고나 할까. 


 

 

 <가족의 기원>을 읽고 무척 실망했던 나는 
  이 첫 창작집을 읽고  이 작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작품집 하나만 두고 본다면 나는 거의 팬이 된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문장도 그렇지만 각 단편이 한치의 틈도 없는 긴장된 짜임새를 자랑한다.
 지치고 피로하며 동시에 분노와 적의에 가득 차 있는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역사가 강만길이 그 때 그 때 불거지는 "역사적 건망증"이나 그릇된 역사 이해에 대한
 개입의 형식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쓴 단문들의 모음집이다. 
 구체적인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각 단문의 배경을 이루므로,
 진지한 역사책이 부담스러운 독자들에게 특히 매력적인 책이다.
 이 책에 반복되는 내용이 많다는 것은, 속시원히 해결되지 못하고
 발목을 잡는 역사적 문제들이 한국 사회에 그 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한국사, 통일, 바람직한 역사교육, 정부의 정통성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저자의 의견이
 설득력 있고, 읽기 쉬우며, 논리적으로 쓰여져 있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부터 김영삼 문민정권까지의 역사를 26강으로 구성한
  강만길 교수의 강의책.   각 강의가 질문이나 주장 형식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독특하다.
  이를테면 "일제의 병참기지화도 경제개발로 봐야할까요" (9강) 이나.
  "7.4 남북공동성명은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닙니다"(22강)처럼.

  책 뒷표지에 실린 강만길 교수의 저작 의도에 혹해서 집어든 책.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이 과거를 알아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있다고 하지만 역사책에서는 미래에 대한 전망이 극히 제한적이게 마련입니다. 앞으로의 전망 같은 것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역사강의를 책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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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6-06-0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경란의 불란서 안경원, 한번 봐야겠어요.
조경란의 소설은 안 읽은것 투성이라 ^^;;
짤막한 리뷰지만, 핵심만 들어있네요.

잉크냄새 2006-06-0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흔에 길을 나서다. 보관함에 쏙~~
재밌는 것은 이십대에는 서른이 결코 오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삼십대에는 마흔을 인정하게 되더군요. 이게 나이먹는다는 것일까요?ㅎㅎ

검둥개 2006-06-08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저도 <가족의 기원>만 읽어본 걸요.
그걸 읽고 실망을 많이 했는데 이 단편집은 무척 맘에 들었어요.
희한하죠? 같은 작가가 쓴 두 책에 대한 느낌이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

잉크냄새님. 호호호 저도 마흔을 인정합니다.
근데 오십대는 아직 안 되는군요.
한 번에 한 세대씩 ^^;
 

제 10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악어떼가 나왔다>를 읽었다.

책을 집어들고 읽기는 순식간에 읽어치웠는데 딱히 아무런 감흥도 생각도 일지 않아서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문학상의 기준은 가독성인가?

가독성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것이 학술논문도 아닌 바에야 다수독자를 목표하며 그러므로 당연히 잘 읽히고 재미도 있는 편이 안 읽히는 것보다는 훨씬 났다. 그러나 소설이 잘 읽힌다는 점은 그 소설의 질에 대해선 아무 정보도 주지 않는다. 게다가 잘 읽힌다는 점만 보고 따지자면야 화사한 화보를 가득 담은 잡지나 주인공의 얼굴이 단번에 눈길을 끄는 만화가 소설보다는 단연 한 수 위가 아닌가.  

서영은의 심사평을 보자.

"형식, 주제, 구성에서 크나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게임식 조립, 만화적 발상, 개그적 수다, 과장 왜곡된 허풍 등, 표현을 위한 표현이 난무한다. 표현되어지는 것은 작가의 '인간과 삶과 우주와 신에 대한 이해나 통찰'이 아니라 상상력 그 자체이다. 등장인물은 있으나 그 인물에게는 사유도 없고, 심리도 없다. 상황은 너무 허무맹랑하여, 독자는 자기를 대입시킬 수 없다.  ...... 이와 같은 신세대적 감수성이 빚어내는 소설적 재미는, 소설의 역할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어, 동의하는가, 안 하는가는 심사 밖의 장에서 얘기할 일이다."

알쏭달쏭한 심사평이다. 저 말줄임표 사이에는 수상작이 인간 본성의 모순,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작자의 의도를 날카롭게 대변한다는 상찬이 들어가기는 했다. [이 작품 어디에 인간 본성의 모순이 드러난단 말인가???]

소설의 역할 변화에 심사자는 동의하는 걸까? 아마 아닐 것이다.
동의한다면 굳이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천명관의 <고래> 역시 순식간에 읽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소설가를 타고난 민담꾼이라고 부르는 것은 칭찬인가?

소설은 인간이 자연에 수동적으로 적응하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자연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근대의 산물이며 생각하고 갈등하고 선택하는 주체의 행위와 그것이 세계에 일으키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민담의 주체는 사건이고 인물은 사건의 구성요소에 불과하다.

책 말미의 심사평에서 임철우는 <고래>를 관통하는 중심축은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지만 이야기의 추동력이 되는 그 욕망은 각 인물에 특유하다기보다는 되려 무개인적이다. 민담 속의 사건들처럼. 그래서 <고래>의 이야기구조도 소설보다는 민담에 가깝다. 은희경은 <고래>에서 장르영화의 대중성을 보는데, 이 또한 적절한 지적이다. (장르 영화의 주체 역시 인물이 아니라 플롯이므로.)

소설과 민담이 다른 것이라면 왜 점점 더 현대 소설은 민담과 비슷한 모양새를 띠어가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것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인가?

사회가 산업화, 기술화되고 자본주의가 전세계적 체제로 안정화되면 될수록 각 인간의 행위의 폭과 의미는 축소되고 삶은 점점더 몰개성화된다. 자유의 행사범위는 무엇을 살 것인가로 좁혀지고, 인간의 삶은 철창에 갇힌 채 쳇바퀴나 하염없이 돌리는 다람쥐의 그것과 다름없어진다. 현실이 그것을 요구하므로, 소설의 초점은 독립적 주체로서의 인간과 그 행위로부터 개인을 쉽사리 압도하는 사회적 현실과 상황으로 그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옮겨간다. 이렇게 해서 소설의 외양이 조금씩 민담을 닮아가는 것이다.

불행히도 그 보여준다는 것이야말로 바닥이 얕은 우물처럼 말라붙기 쉬운 프로젝트다. 보여주기가 철저해지면 그렇지 않아도 통속하고 피로한 현실을 사는 독자들은 그 쓴 맛에 고개를 돌리기 쉽고, 인간애니 따뜻한 시선이니 따위를 거기에 섞었다가는 자칫 어설프고 게으른 타협이라고 비판을 받기 십상이다.

여기에 시장 약장수 처방처럼 판타지가 끼어든다. 현실인 양 아닌 양. 상상인 양 아닌 양.

배에 악어 모양의 점이 있는 아이는 마트의 매장에 놓은 가방 속으로 들어가 숨고 그 가방을 산 부부의 딸이 자살을 목적으로 뛰어는 한강에서는 수십 구의 시체가 떠오른다. 여기서 악어가 정확히 뭘 의미하느냐고 물어야 별 답은 없다. [책 말미에 평을 쓴 류보선은 이 소설이 알레고리 소설이라 하면서도 뭐가 뭐의 알레고리인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악어떼가 나왔다>와는 달리 판타지가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인 <고래>에서는 역사적 사실인 6.25와 박정희가 잠깐씩 언급된다. 전쟁이건 장군님이건 줄거리의 전개와는 별 상관이 없는데 아예 상상의 것으로 대체해도 그만일 것을 굳이 역사적 사실을 도입한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그런다고 소설에 부재한 역사성이 돌연 깃들 것도 아닐 터인데.

엄청난 가독성을 자랑하며 뛰어난 상상력을 펼치는 요즈음의 소설들이 나는 어째 수상쩍다. 호락호락 읽힌다는 것이 소설의 질을 보장하지 않고 상상력이 무조건적으로 작품을 풍요롭게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소설의 미래가 '인간과 삶과 우주와 신에 대한 이해나 통찰'로부터 단순한 '재미'로 옮아가고 있다면,  "풍부하고 기발한 상상력의 세계 속에 보다 구체적인 인간 현실과 삶의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까지 아울러 담"는 (임철우) 소설에 대한 기대는 그저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만 말하고 끝내자니 책 사보는 독자 입장에서 정말이지 성에 안 차는 결론이지만, 또 딱히 독자가 뭘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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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06-08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래]에 대해 재미있게 읽고도 수상쩍은 느낌이 들었던 이유가 이런거였구나 싶어집니다.

검둥개 2006-06-09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치니님 저두 잘 모르면서 한 이야기에요.
그냥 괜히 볼멘 소리로 타겟도 분명하지 않은 채 불평을 늘어놓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ㅎㅎ
 

최윤은 이상하게도 나에겐 낯선 작가였다. 모처럼 마음 먹고 읽어보리라 소설집을 몇 권 가지고 오면서 산문집도 들고 왔는데 그만 산문집을 제일 먼저 게눈 감추듯 읽어버리고 말았다. 후회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책 속엔 거의 육십편 남짓한 짧은 글들이 빼곡하게 차 있는데, 각각의 글 하나하나가 특별한 빛을 발한다기보다는 책이 하나의 전체로 단정하고 차분한 인상을 준다. 그 인상을 색으로 나타내보라면 단연 회색이다. "얇은 잠과 되찾은 소리"라는 글은 단문이지만 이 작가 문체의 매력을 잘 보여준다. 물론 짐작으로 섣불리 말하는 것이지만, 이 작가의 산문체에는 요즘 찾아보기 힘든 어른스러움이 있는데, 그것은 연령과 무관한 그 무엇, 한 작가가 자신과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타인들과 교류하는 태도에서부터 연유하는 그 무엇이다. (그 어른스러움이 다른 문체들에 비해 우월하다든가 그렇지 않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단순히 다르다는 것이다.)  

글 중에 특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작가가 자신의 본적지인 가희동에 갔다가 우연히 근처 분 식점 주인이 된 옛 친구를 조우한 경험이다. 삼십몇세가 되어 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한 동네에 같이 살던 여자애를 다시 만난 친구는 쑥쓰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기분에 부엌에서 고기만두를 한 접시 담아 내오고 작가가 된 최윤은 그걸 먹는다. 달리 뭐라 할 말도 딱히 없고 친구는 갑자기 분식집 주인으로서 직업상의 중대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 비밀이란, 고기만두 속의 고기가 사실은 진짜 고기가 아니라 말린 무라는 것!

하나 더 인상적이었던 글은 "인간관계의 출구-"하나코는 없다"였다. 잘 알려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성인이 된 우리 모두가 겪게 되는 대부분의 관계의 양상이라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얼마나 괴상망측한가. 우리는 타자가 가진 존재적 장점이나 아름다움 때문에 타자를 찾거나, 그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 타자와의 관계는 자주 외적으로, 피상적으로, 계산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한 사람이 용납할 수 없는 결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어도 우리는 이미 외적으로 규정된 원칙들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쉽사리 용납하며 얼버무리고 비굴하게 웃고 만다. 수정되는 것은 하나도 없이. 우리의 역사가 자주 그랬듯이."

덕분에 오래 전에 읽었던 단편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굳이 그람시가 한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는 일상이란 실은 얼마나 복잡하고 심각하게 문제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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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5-28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색눈사람>인가로 동인 문학상을 받은 그 분이시죠.
그 당시는 읽다말다 하품했는데,
이분의 글은 세월의 간격을 두고 읽을만한 가치가 분명 있다고 봅니다.
덕분에, 다음번 주문때 이 책을 구입하려고 보관함에 넣어 두었습니다.
검둥개님, 고마워요!

검둥개 2006-05-28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맞어요. 제가 빌려온 책이 <회색눈사람>과 <속삭임 속삭임>이랍니다.
글이 섬세하면서도 절제되어 있어요. (둘 다 제가 거의 안 쓰는 표현!)
아니 그런데 여우님이 읽다가 하품을 하셨다니 은근히 걱정이 되는군요! ^^

로드무비 2006-05-29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감정 과잉이나 과장 없는 다소 건조한 문체가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책을 읽을 땐 재밌게 읽는데 이상하게 다음 책을 사게 되진 않아요.
항상 보관함에만.
이상하죠?^^

검둥개 2006-06-05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그런 책이 저도 있어요.
남한테 빌려 읽거나 대여해서만 읽게 되는 책!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사게 되지는 않는 책.
왜 그럴까요? ^^
 
나는 고독하다
황인숙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2월
평점 :
품절


대학시절에 자취를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자취방은 특이하게도 엄청나게 널찍했다. 어느 정도로 널찍했느냐 하면 보통의 손바닥만한 하숙방의 서너배는 너끈히 되고도 남을 크기였다. 그 자취방은 전철역 주변에 있었는데 이발소며 분식가게, 갈비집, 여관 등등을 지나 뒷골목으로 걸어들어가면 정말이지 멀쩡하게 생긴데다가 멋진 마당까지 딸린 이층집의 이층에 있었다. 조그만 부엌과 화장실에 딸린 그 자취방의 한 면은 바로 마당으로 트여 있어서, 유리문을 열면 베란다가 있고 그 밖으로는 보기좋은 주택가 경치가 한아름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했던 오피스텔하고는 물론 시설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재래식 셋방이긴 했지만 나는 혼자서 그 커다란 방을 차지하고 사는 친구가 부러워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친구가 반색을 하며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그 방에서 사는 값이나 손바닥만한 방에서 하숙하는 거나 같은 값이라는 거였다. 세상사에 밝은 친구는 엄마를 설득해 은행에서 그 널찍한 방의 전세금에 해당하는 액수를 대출받았는데 그 대출금의 이자가 손바닥만한 하숙방에서 기거하며 매달 내는 하숙비와 같은 금액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공용 화장실 때문에 끙끙거리고 손바닥 만한 방에서 죄수처럼 사는 대신, 친구는 속이 시원하게 뚫린 경치 좋은 널찍한 이층 방의 임자가 된 거였다.

황인숙의 이 산문집에는 "꿈의 오피스텔"이라는 짤막한 글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있으니 문득 그 옛 일이 생각났다. 철없던 나는 그 때 이런 방만 있다면 혼자서 평생 그 곳에서 살아도 억울하지 않겠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했었다. 실상은 방 하나 넓은 것 빼고는 별볼일 없는, 세면대도 없어서 수도꼭지에서 물을 대야에 받아 그걸로 세수도 하고 발도 씻어야 하는 좁아터진 화장실에다가, 수압이 낮아 변기 물 내리는 것도 고역인 그런 자취방이었는데도 말이다.

동네가 시끄러워 이사를 결심한 친구를 따라 시인은 남산 근처 문화원 (독일 문화원일까?) 아래 있다는 오피스텔을 찾아나선다. 애를 쓰다 한참만에 겨우 찾은 그 오피스텔은 "파르랗고 영롱하고 장엄한"  "거대한 진주 궁전"이어서 거기서 "살면 글이 저절로 써질 것 같"은 그런 건물이었다.  한밤에 매물가를 묻는 시인과 친구에게 수위는 둥그런 눈을 하고 열여덟 평 짜리가 있는데 보증금 오백만원에 월세가 사십만원이라고 가르쳐준다. 시인은 친구가 그 곳에 방만 얻으면 자주 놀러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생각보다 싸다며 안달을 낸다. "그럼 전세로 이천오백만원이네. 어휴 너무 싸다, 그치?"

울적한 마음으로 친구와 헤어져 누추한 방으로 돌아온 시인은 "시무룩히 시무룩한 방을" 치운다.

그리고는 이렇게 썼다: "시는 내가 좋아서 쓰는 것이고, 허구한 날 빈둥빈둥 노는 내게 과분한 방인데. 가난하다는 건 때로는 고독한 거다. 고독은 일에 대한 정열을 강화시켜줄 뿐. (이를 앙 다물고!)"

나는 이 글을 읽다가 이 시인이 괄호 안에 느낌표와 함께 넣은 이 "이를 앙 다물고" 부분에서 낄낄 웃고 말았다. "고독은 일에 대한 정열을 강화시켜줄 뿐", 이라는 건 어딘지 모르게 구체제 (그게 무슨 종류건)의 표어 같은 냄새가 나는 데다가, 그걸 이를 앙 다물고 외쳐야 하는 시인의 얼굴을 상상해보라.

매달 하숙비 낼 돈으로 은행대출을 받아서 널찍한 방을 얻은 그 친구가 그 때는 무한히도 존경스러웠건만, 이제 생각해보니 보증금이 오백에 월세가 사십인 거나 전세로만 이천오백인 거나 같은 것이듯, 월세를 꼬박이 바쳐야 하는 구두상자 같은 하숙방이나 남의 돈을 끌어와서 얻은 널찍한 자취방이나 그거이 그거다. 이 생각까지 하고 나니, 산다는 게 한겨울 밤 광에서 하나씩 둘씩 빼먹는 곶감 같아서 영 입맛만 씁쓰름해졌다. 이를 앙 다물고 시인처럼 외쳐보지는 못하고.

세련된 작가들은 저작에 자기들 얼굴 사진을 붙이는 건 도대체가 황당한 발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촌스런 독자는 좋아하는 작가의 개인사를 엿보느라 헐렁헐렁하게 썼을 잡문 모음이 반갑기만 하다. "안면도는 아직 섬이다"라는 짧은 글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3박 4일의 해변문학캠프에 참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새벽 여섯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추어 애국가를 부르고 체조를 해야 했단다. "내일도, 모레도! 나는 울고 싶었다." 시인의 코멘트다. 문학 캠프에 국민체조라니. 잡문집이 아니면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주워듣는단 말인가. 이러구러해서 책장을 넘기는 나의 손은 빨라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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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5-28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 집에서 대학생활을 보냈던 저도 반지하 자취방이나 이층집 자취방에 대한 묘한 동경심을 품었던 기억이 나네요.그 구질구질했던 시절이 마냥 그리워지는 시절이네요.

검둥개 2006-05-2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반지하는 딱 질색예요. 습기차고 눅눅하고 해 안 들고! ^^;;
옥탑방은 여름에 또 너무 덥고. 그 친구가 있던 이층집 자취방은 정말 멋졌어요.

로드무비 2006-05-2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고독하다>, 황인숙 씨의 책 제목 처음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평창동의 한 카페에 가니 황인숙 씨 책이 두어 권 꽂혀 있더라고요.
인숙만필도 그렇고 마음에 들어요.
아무튼 재밌으니......

검둥개 2006-06-0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말씀하시니 <인숙만필>도 읽어보고 싶은데요.
책 읽을 시간은 주는데 읽고 싶은 건 많아만 지니 어쩜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