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악어떼가 나왔다>를 읽었다.
책을 집어들고 읽기는 순식간에 읽어치웠는데 딱히 아무런 감흥도 생각도 일지 않아서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문학상의 기준은 가독성인가?
가독성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것이 학술논문도 아닌 바에야 다수독자를 목표하며 그러므로 당연히 잘 읽히고 재미도 있는 편이 안 읽히는 것보다는 훨씬 났다. 그러나 소설이 잘 읽힌다는 점은 그 소설의 질에 대해선 아무 정보도 주지 않는다. 게다가 잘 읽힌다는 점만 보고 따지자면야 화사한 화보를 가득 담은 잡지나 주인공의 얼굴이 단번에 눈길을 끄는 만화가 소설보다는 단연 한 수 위가 아닌가.
서영은의 심사평을 보자.
"형식, 주제, 구성에서 크나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게임식 조립, 만화적 발상, 개그적 수다, 과장 왜곡된 허풍 등, 표현을 위한 표현이 난무한다. 표현되어지는 것은 작가의 '인간과 삶과 우주와 신에 대한 이해나 통찰'이 아니라 상상력 그 자체이다. 등장인물은 있으나 그 인물에게는 사유도 없고, 심리도 없다. 상황은 너무 허무맹랑하여, 독자는 자기를 대입시킬 수 없다. ...... 이와 같은 신세대적 감수성이 빚어내는 소설적 재미는, 소설의 역할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어, 동의하는가, 안 하는가는 심사 밖의 장에서 얘기할 일이다."
알쏭달쏭한 심사평이다. 저 말줄임표 사이에는 수상작이 인간 본성의 모순,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작자의 의도를 날카롭게 대변한다는 상찬이 들어가기는 했다. [이 작품 어디에 인간 본성의 모순이 드러난단 말인가???]
소설의 역할 변화에 심사자는 동의하는 걸까? 아마 아닐 것이다.
동의한다면 굳이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천명관의 <고래> 역시 순식간에 읽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소설가를 타고난 민담꾼이라고 부르는 것은 칭찬인가?
소설은 인간이 자연에 수동적으로 적응하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자연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근대의 산물이며 생각하고 갈등하고 선택하는 주체의 행위와 그것이 세계에 일으키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민담의 주체는 사건이고 인물은 사건의 구성요소에 불과하다.
책 말미의 심사평에서 임철우는 <고래>를 관통하는 중심축은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지만 이야기의 추동력이 되는 그 욕망은 각 인물에 특유하다기보다는 되려 무개인적이다. 민담 속의 사건들처럼. 그래서 <고래>의 이야기구조도 소설보다는 민담에 가깝다. 은희경은 <고래>에서 장르영화의 대중성을 보는데, 이 또한 적절한 지적이다. (장르 영화의 주체 역시 인물이 아니라 플롯이므로.)
소설과 민담이 다른 것이라면 왜 점점 더 현대 소설은 민담과 비슷한 모양새를 띠어가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것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인가?
사회가 산업화, 기술화되고 자본주의가 전세계적 체제로 안정화되면 될수록 각 인간의 행위의 폭과 의미는 축소되고 삶은 점점더 몰개성화된다. 자유의 행사범위는 무엇을 살 것인가로 좁혀지고, 인간의 삶은 철창에 갇힌 채 쳇바퀴나 하염없이 돌리는 다람쥐의 그것과 다름없어진다. 현실이 그것을 요구하므로, 소설의 초점은 독립적 주체로서의 인간과 그 행위로부터 개인을 쉽사리 압도하는 사회적 현실과 상황으로 그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옮겨간다. 이렇게 해서 소설의 외양이 조금씩 민담을 닮아가는 것이다.
불행히도 그 보여준다는 것이야말로 바닥이 얕은 우물처럼 말라붙기 쉬운 프로젝트다. 보여주기가 철저해지면 그렇지 않아도 통속하고 피로한 현실을 사는 독자들은 그 쓴 맛에 고개를 돌리기 쉽고, 인간애니 따뜻한 시선이니 따위를 거기에 섞었다가는 자칫 어설프고 게으른 타협이라고 비판을 받기 십상이다.
여기에 시장 약장수 처방처럼 판타지가 끼어든다. 현실인 양 아닌 양. 상상인 양 아닌 양.
배에 악어 모양의 점이 있는 아이는 마트의 매장에 놓은 가방 속으로 들어가 숨고 그 가방을 산 부부의 딸이 자살을 목적으로 뛰어는 한강에서는 수십 구의 시체가 떠오른다. 여기서 악어가 정확히 뭘 의미하느냐고 물어야 별 답은 없다. [책 말미에 평을 쓴 류보선은 이 소설이 알레고리 소설이라 하면서도 뭐가 뭐의 알레고리인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악어떼가 나왔다>와는 달리 판타지가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인 <고래>에서는 역사적 사실인 6.25와 박정희가 잠깐씩 언급된다. 전쟁이건 장군님이건 줄거리의 전개와는 별 상관이 없는데 아예 상상의 것으로 대체해도 그만일 것을 굳이 역사적 사실을 도입한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그런다고 소설에 부재한 역사성이 돌연 깃들 것도 아닐 터인데.
엄청난 가독성을 자랑하며 뛰어난 상상력을 펼치는 요즈음의 소설들이 나는 어째 수상쩍다. 호락호락 읽힌다는 것이 소설의 질을 보장하지 않고 상상력이 무조건적으로 작품을 풍요롭게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소설의 미래가 '인간과 삶과 우주와 신에 대한 이해나 통찰'로부터 단순한 '재미'로 옮아가고 있다면, "풍부하고 기발한 상상력의 세계 속에 보다 구체적인 인간 현실과 삶의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까지 아울러 담"는 (임철우) 소설에 대한 기대는 그저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만 말하고 끝내자니 책 사보는 독자 입장에서 정말이지 성에 안 차는 결론이지만, 또 딱히 독자가 뭘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