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독하다
황인숙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2월
평점 :
품절


대학시절에 자취를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자취방은 특이하게도 엄청나게 널찍했다. 어느 정도로 널찍했느냐 하면 보통의 손바닥만한 하숙방의 서너배는 너끈히 되고도 남을 크기였다. 그 자취방은 전철역 주변에 있었는데 이발소며 분식가게, 갈비집, 여관 등등을 지나 뒷골목으로 걸어들어가면 정말이지 멀쩡하게 생긴데다가 멋진 마당까지 딸린 이층집의 이층에 있었다. 조그만 부엌과 화장실에 딸린 그 자취방의 한 면은 바로 마당으로 트여 있어서, 유리문을 열면 베란다가 있고 그 밖으로는 보기좋은 주택가 경치가 한아름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했던 오피스텔하고는 물론 시설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재래식 셋방이긴 했지만 나는 혼자서 그 커다란 방을 차지하고 사는 친구가 부러워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친구가 반색을 하며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그 방에서 사는 값이나 손바닥만한 방에서 하숙하는 거나 같은 값이라는 거였다. 세상사에 밝은 친구는 엄마를 설득해 은행에서 그 널찍한 방의 전세금에 해당하는 액수를 대출받았는데 그 대출금의 이자가 손바닥만한 하숙방에서 기거하며 매달 내는 하숙비와 같은 금액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공용 화장실 때문에 끙끙거리고 손바닥 만한 방에서 죄수처럼 사는 대신, 친구는 속이 시원하게 뚫린 경치 좋은 널찍한 이층 방의 임자가 된 거였다.

황인숙의 이 산문집에는 "꿈의 오피스텔"이라는 짤막한 글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있으니 문득 그 옛 일이 생각났다. 철없던 나는 그 때 이런 방만 있다면 혼자서 평생 그 곳에서 살아도 억울하지 않겠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했었다. 실상은 방 하나 넓은 것 빼고는 별볼일 없는, 세면대도 없어서 수도꼭지에서 물을 대야에 받아 그걸로 세수도 하고 발도 씻어야 하는 좁아터진 화장실에다가, 수압이 낮아 변기 물 내리는 것도 고역인 그런 자취방이었는데도 말이다.

동네가 시끄러워 이사를 결심한 친구를 따라 시인은 남산 근처 문화원 (독일 문화원일까?) 아래 있다는 오피스텔을 찾아나선다. 애를 쓰다 한참만에 겨우 찾은 그 오피스텔은 "파르랗고 영롱하고 장엄한"  "거대한 진주 궁전"이어서 거기서 "살면 글이 저절로 써질 것 같"은 그런 건물이었다.  한밤에 매물가를 묻는 시인과 친구에게 수위는 둥그런 눈을 하고 열여덟 평 짜리가 있는데 보증금 오백만원에 월세가 사십만원이라고 가르쳐준다. 시인은 친구가 그 곳에 방만 얻으면 자주 놀러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생각보다 싸다며 안달을 낸다. "그럼 전세로 이천오백만원이네. 어휴 너무 싸다, 그치?"

울적한 마음으로 친구와 헤어져 누추한 방으로 돌아온 시인은 "시무룩히 시무룩한 방을" 치운다.

그리고는 이렇게 썼다: "시는 내가 좋아서 쓰는 것이고, 허구한 날 빈둥빈둥 노는 내게 과분한 방인데. 가난하다는 건 때로는 고독한 거다. 고독은 일에 대한 정열을 강화시켜줄 뿐. (이를 앙 다물고!)"

나는 이 글을 읽다가 이 시인이 괄호 안에 느낌표와 함께 넣은 이 "이를 앙 다물고" 부분에서 낄낄 웃고 말았다. "고독은 일에 대한 정열을 강화시켜줄 뿐", 이라는 건 어딘지 모르게 구체제 (그게 무슨 종류건)의 표어 같은 냄새가 나는 데다가, 그걸 이를 앙 다물고 외쳐야 하는 시인의 얼굴을 상상해보라.

매달 하숙비 낼 돈으로 은행대출을 받아서 널찍한 방을 얻은 그 친구가 그 때는 무한히도 존경스러웠건만, 이제 생각해보니 보증금이 오백에 월세가 사십인 거나 전세로만 이천오백인 거나 같은 것이듯, 월세를 꼬박이 바쳐야 하는 구두상자 같은 하숙방이나 남의 돈을 끌어와서 얻은 널찍한 자취방이나 그거이 그거다. 이 생각까지 하고 나니, 산다는 게 한겨울 밤 광에서 하나씩 둘씩 빼먹는 곶감 같아서 영 입맛만 씁쓰름해졌다. 이를 앙 다물고 시인처럼 외쳐보지는 못하고.

세련된 작가들은 저작에 자기들 얼굴 사진을 붙이는 건 도대체가 황당한 발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촌스런 독자는 좋아하는 작가의 개인사를 엿보느라 헐렁헐렁하게 썼을 잡문 모음이 반갑기만 하다. "안면도는 아직 섬이다"라는 짧은 글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3박 4일의 해변문학캠프에 참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새벽 여섯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추어 애국가를 부르고 체조를 해야 했단다. "내일도, 모레도! 나는 울고 싶었다." 시인의 코멘트다. 문학 캠프에 국민체조라니. 잡문집이 아니면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주워듣는단 말인가. 이러구러해서 책장을 넘기는 나의 손은 빨라지기만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06-05-28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 집에서 대학생활을 보냈던 저도 반지하 자취방이나 이층집 자취방에 대한 묘한 동경심을 품었던 기억이 나네요.그 구질구질했던 시절이 마냥 그리워지는 시절이네요.

검둥개 2006-05-2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반지하는 딱 질색예요. 습기차고 눅눅하고 해 안 들고! ^^;;
옥탑방은 여름에 또 너무 덥고. 그 친구가 있던 이층집 자취방은 정말 멋졌어요.

로드무비 2006-05-2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고독하다>, 황인숙 씨의 책 제목 처음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평창동의 한 카페에 가니 황인숙 씨 책이 두어 권 꽂혀 있더라고요.
인숙만필도 그렇고 마음에 들어요.
아무튼 재밌으니......

검둥개 2006-06-0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말씀하시니 <인숙만필>도 읽어보고 싶은데요.
책 읽을 시간은 주는데 읽고 싶은 건 많아만 지니 어쩜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