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은 이상하게도 나에겐 낯선 작가였다. 모처럼 마음 먹고 읽어보리라 소설집을 몇 권 가지고 오면서 산문집도 들고 왔는데 그만 산문집을 제일 먼저 게눈 감추듯 읽어버리고 말았다. 후회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책 속엔 거의 육십편 남짓한 짧은 글들이 빼곡하게 차 있는데, 각각의 글 하나하나가 특별한 빛을 발한다기보다는 책이 하나의 전체로 단정하고 차분한 인상을 준다. 그 인상을 색으로 나타내보라면 단연 회색이다. "얇은 잠과 되찾은 소리"라는 글은 단문이지만 이 작가 문체의 매력을 잘 보여준다. 물론 짐작으로 섣불리 말하는 것이지만, 이 작가의 산문체에는 요즘 찾아보기 힘든 어른스러움이 있는데, 그것은 연령과 무관한 그 무엇, 한 작가가 자신과 타인의 삶을 바라보고 타인들과 교류하는 태도에서부터 연유하는 그 무엇이다. (그 어른스러움이 다른 문체들에 비해 우월하다든가 그렇지 않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단순히 다르다는 것이다.)
글 중에 특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작가가 자신의 본적지인 가희동에 갔다가 우연히 근처 분 식점 주인이 된 옛 친구를 조우한 경험이다. 삼십몇세가 되어 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한 동네에 같이 살던 여자애를 다시 만난 친구는 쑥쓰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기분에 부엌에서 고기만두를 한 접시 담아 내오고 작가가 된 최윤은 그걸 먹는다. 달리 뭐라 할 말도 딱히 없고 친구는 갑자기 분식집 주인으로서 직업상의 중대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 비밀이란, 고기만두 속의 고기가 사실은 진짜 고기가 아니라 말린 무라는 것!
하나 더 인상적이었던 글은 "인간관계의 출구-"하나코는 없다"였다. 잘 알려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성인이 된 우리 모두가 겪게 되는 대부분의 관계의 양상이라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얼마나 괴상망측한가. 우리는 타자가 가진 존재적 장점이나 아름다움 때문에 타자를 찾거나, 그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 타자와의 관계는 자주 외적으로, 피상적으로, 계산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한 사람이 용납할 수 없는 결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어도 우리는 이미 외적으로 규정된 원칙들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쉽사리 용납하며 얼버무리고 비굴하게 웃고 만다. 수정되는 것은 하나도 없이. 우리의 역사가 자주 그랬듯이."
덕분에 오래 전에 읽었던 단편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굳이 그람시가 한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는 일상이란 실은 얼마나 복잡하고 심각하게 문제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