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맛과 추억
황석영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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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베트의 만찬이나 투스카니의 태양 같은 영화를 보고나면 음식에 대한 시각이 확 달라진다.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먹어야 된다, 에서 삶을 즐기는 데 필수적인 향신료 같은 그 무엇이 바로 음식이다, 하는 식으로. 이 책을 읽고나서 성장기에 음식복이 없었던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밥을 굶는 일은 없었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음식도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아홉살 때 한 점 먹어본 돈까스, 여의도 시내에서 먹었던 짜장면 (완두콩이 뿌려져 있는 것이 동네 짜장면과 달라 엄청나게 고급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친구 생일날 처음 먹어본 탕수육 같은 것이 인상적인 음식 리스트의 전부라니! 갑자기 초라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서로 다른 지방 출신인데도 그 지역의 난다 하는 음식은 커녕 흔하다 하는 음식도 먹어본 게 없고, 집에서 먹어본 특이한 음식으로 손에 꼽을 수 있는 거라곤 양미리 졸인 것이 고작인데, 보잘 것 없는 양미리 같은 게 식도락 목록에 낄 날은 세상이 뒤집히기라도 하지 않는 한 오지 않을 것이다. 

문화도 경험을 해봐야 즐길 수 있는 것인데, 먹는 일을 문화로서보다는 주로 주린 배나 그때 그때 채우는 식으로 해치우며 살다보니 요리책에 눈길을 주게 된 건 어른이 되고도 아주 한참이 지나서였다. 요즘은 서점에서 칼라로 화려하게 인쇄된 멋진 요리책을 보면 이스트가 들어간 밀가루 반죽 마냥 마음도 부풀고 당장 장을 보러 나가서 낯설기만 한 이름을 가진 채소며 식재료를 잔뜩 사오고 싶다. 랄랄라 노래를 부르며 호박을 썰고 달걀을 풀고, 즐겁게 음식을 준비해 알록달록한 그릇에 멋지게 차려낸 다음, 행복하게 음미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간신히 퇴근해서 피곤해 죽겠는 마당에 배가 고프다는 것도, 먹을 것을 직접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도, 먹고 난 그릇을 치워야 한다는 것도 끔찍스럽기 그지 없는 일들에 불과하다. 음식을 만들며 노래를 부른다는 건 택도 없는 일이다. (언젠가 잡지에서 하루 중에 제일 스트레스가 심한 시간이 바로 퇴근하고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하기까지의 시간이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체험상 그건 정말 맞는 말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집어들고 뜨아한 생각에 한참 표지를 들여다봤다. "삼포 가는 길"이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같은 책을 쓴 작가는 먹는 일에도 아주 스파르탄 같은 사람일 거라고 혼자서 엄한 추측을 맘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초판 제목)>에는 정말 별별가지 음식이 다 나온다. 그 중에는 군대에서 서리해 철모에 삶아먹은 닭이나 감옥에서 요구르트 + 곰팡이 피운 빵 + 원기소를 섞어 담가 먹었다는 술이 있는가 하면 김일성이 루이제 린저에게 대접했다는 시꺼먼 언감자 국수 같은 이북 음식도 있고, '가즈파초 수프', '파에야', '되너 케밥', '리볼리타' 같은 생뚱스런 유럽 음식도 있다. 해서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 양반 자시기도 이것저것 정말 많이 자셨구만,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음식이 이어질 때마다 입맛을 다시며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치기 어린 배신감도 느꼈다. 그렇게 치열한 삶도 얼마든지 맛난 음식만 잘 먹으면서 살 수 있는 거였단 말인가, 하고! 하지만 그런 배신감은 음식에 얽힌 이야기 얻어듣는 재미로 금새 다 잊혀졌다.

"변소에 들어가니 판자를 얹은 변기 구멍 위로 막대기 하나가 비죽이 올라와 있다. 이건 뭣에 쓰는 막대기인고, 급한 대로 주저앉는데 갑자기 밑에서 꾸울,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돼지 대가리가 널판자 아래로 쑥 들어온다. ... 나는 혼비백산하여 얼른 바지를 추스르고 일어나 변소 밖으로 뛰어나와 버렸다. ... 밖으로 나와서 어쩔 줄 모르고 발을 구르며 서성대다가 하여튼 일이 급하여 다시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주저앉는데 또 꾸울, 한다. 그제서야 나는 구멍 위로 비죽이 솟아 있는 막대기의 쓰임새를 알아차렸다. ... 일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대충 하고서 얼른 나온다.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돼지가 다시 울타리 판자 사이로 그 영리한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본다. 나는 뒤늦게야 돼지의 눈빛이 어째서 그렇게 영리해 보이는지를 집작했다. 그가 나를 보는 눈빛은 이를테면 "야, 밥 온다!"하는 느낌의 표정 그대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괘씸한 놈 같으니."

"홍어를 잡으면 암놈과 수놈은 가격에서 큰 차이가 난다. 수놈 홍어는 암놈에 비하면 헐갑이고 쳐주지도 않는다. ... 살 맛도 부드럽고 쫄깃하지 못하고 어딘가 퍽퍽한 느낌이다. 사 가는 사람이야 ... 어느 게 암놈이고 수놈인지 불간하기가 어렵다. 이때에는 생선을 뒤집에 배 아래쪽을 보면 된다. 물론 암수의 성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니, 물고기에 성기라니! 홍어는 다른 물고기들처럼 난생이 아니라 태생이다. ... 중간 상인들은 홍어가 들어오면 배를 뒤집어 살피고 나서 수놈 홍어의 '거시기'부터 얼른 떼어낸다. 암놈과 같은 가격을 받아 내려는 속셈에서다. 그래서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가 되어 버렸다."

"올림픽 즈음이던가 ... 수감된 문인들 석방시켜 보려고 해외 문인들과 몇 차례 자리를 같이 했었는데, 누군가 짓궂게도 어치 하나 보려고 산낙지 회를 시켰다. 그들의 소스라치던 얼굴이 생각나서 지금도 웃음이 난다. 미국 펜 회장이던 수잔 손타그가 비명을 지르면서도 호기심 때문에 먹어보고는 연신 맛있다고 했다."

그 중엔 이런 애잔한 이야기도 있다.

"군에서는 가끔 발생하는 일이지만 ... 과식사고가 있었다. ... 당시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비상식으로 건방이 나왔는데, ... 어느 훈련병이 무려 다섯 봉지를 구해다가 낮에는 다른 녀석들 시선 때문에 먹지를 못하고 취침 시간에 개인 침낭 안에다 몽땅 털어 넣고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 그런 짓은 나도 가끔 해 보았고 ... 내 독자라는 헌병이 ... 건빵 한 봉지씩을 주었는데, ... 담요를 둘러쓰고 ... 천천히 씹어 먹었다.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게 먹으려 해도 와삭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그 병사도 남들이 모두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먹기 시작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하여튼 와사삭와사삭 씹어서 그 건빵 다섯 봉지를 새벽녘에 모두 해치웠건만, 취침시간에 화장실을 가도 신고를 해야 되는 터에 물을 마실 시간은 없었나 보다. 건빵이 비상 식량인 것은 백속에 들어가면 몇 배로 불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장은 물론 식도까지 꽉 막힐 수밖에. 그래서 한 젊은 병사는 행복하게 숨을 거두었다."

황석영이 음식과 함께 풀어놓는 이야기들 속엔 가출해서 돌아다니다 중이 되겠다고 절 음식 먹은 이야기, 감옥 가서 부침개 부쳐 먹은 이야기, 유럽에서 손으로 가자미 잡아 먹은 이야기, 해남 살 적에 매생이국 맛 본 이야기, 윤이상 선생이 개장국 소리에 혹해 나서다가 혹시라도 커리어가 끝장 날까봐 아쉽게도 포기한 이야기 등등이 고스란히 다 들어가 있다. 그는 천상 이야기꾼이라, 그 이야기들 듣는 것이 깨소금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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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2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6-12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속삭님 어트케 아셨습니까?
정말로 털어왔어요. 반납기한이 되어서 빨리 빨리 읽어내느라고 쩔쩔매고 있답니다.
산문집이 역시 술술 잘 읽히죠? 요 책은 먹는 이야기에 또 홀딲 ^^*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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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가 시인과 소설가들이 쓴 산문집 junkie라는 것을. 다른 책은 몇 권 읽지도 않았는데, 산문집은 정현종, 황인숙, 함민복, 유하, 최윤, 김훈의 것을 다 읽어치웠다. (시인과 소설가가 아닌 사람들이 쓴 잡문집까지 포함하면 이보다도 더 많다! 하이고, 자랑이다.)  관심있게 읽는 시인이나 작가들의 시시껍절한 사생활이나 뒷이야기를 얻어듣고 싶은 생각은 없고 그럴 가능성도 거의 제로지만, 그들이 직접 털어놓는 일상사를 듣는 재미는 짭짤하다. 게다가 시나 소설이 아닌 문장 속에서 시인과 소설가를 만난다는 것부터가 즐거운 경험임에 분명하다. 독자들의 입장에서 작가는 언제나 특별한 인간. 우리와 그들이 함께 거주하는 이 공통의 세계를 그들이 어떻게 경험하는 지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궁금해하지 않는가!

김연수는 이름만 많이 들은 작가인데 역시 도서관에서 가져온 몇 권의 책들 중에서 제일 먼저 산문집부터 꺼내 읽어버렸다. 청춘의 문장들이라고 이 젊은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의외로 아주 오래된 한시나 옛문장들이 대부분인데, 나는 그게 바로 그 제목이 말하는 저 청춘의 문장들인 줄은 모르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도대체 뭐가 그래서 청춘의 문장들이야, 라고 혼잣말을 했다. 각 단문들이 전혀 그 문장이나 시 하나를 소개하려고 쓰여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그건 다른 한편으론, 소개된 시나 문장들이 그 자체만으로는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개된 시나 문장들이 김연수의 글 전체 안에서만 비로소 그럴 듯 해보였다는 것은, 명문을 명문으로 알아보지 못한 독자인 내게는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글쓰는 이로서의 김연수가 글와 삶을 엮어서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은은 고령 사람인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어와 갈피를 덮는 일은 요 몇 년 새 얻은 버릇이다.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핀잔 꽤나 듣는 처지고 보니 <조선조 문인 졸기> 따위의 책을 펼치는 일이 많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시대 이름난 문인들의 죽음을 다룬 구절만 가려 뽑았다. 세상에 이런 책도 쓸모가 닿는 곳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 쓸모라는 게 결국 내 가슴을 울리는 일이었다. 성종 때 태어나 연산군 때 죽은 사람 중에 박은이란 분에 대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  이 사람의 졸기卒記는 간단하다. '연지시살지然之是殺之, 시년이십육時年二十六'. 실록은 왕이 (그 정직함을 미워해) 결국 그를 죽이니 그 나이는 26세 때였다고 간단하게 전한다. 실록이 전하지 않는, 그 열 글자 속에 숨은 스물여섯 살의 회한과 아쉬움과 슬픔을 헤아리는 것은 모두 다 내 몫이다. 카드결제일과 원고마감일 같은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이런 것까지 마음에 짊어지고 살아야 하니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다." (50-51)

이 글에 소개된 또 하나의 문장은 윤치호의 일기 1919년 9월 12일치에서 나온다.

오후에는 집에 있었다. 3시 20분즘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찾아왔다. 그녀는 조선인민협회 명의의 서한을 내밀면서 조선독립을 위해 자금을 대달라고 요구했다. 난 나 자신과 내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만큼 돈을 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한을 챙겨서 가버렸다.

위의 윤치호의 일기에 대해 김연수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내 마음은 다시 그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을 따라 윤치호의 집을 나선다. 사라진 나라 대한제국에서 태어났을 그 여학생은 얼마나 실망했을까? 윤치호의 집 앞에다 침이라도 뱉었을까? 아니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절망했을까? 윤치호의 변명을 듣는 순간, 그 여학생의 가슴속에서 꺼져버렸을 불빛. 나는 그 불빛을 상상하고 그 불빛에 매료되고 그 불빛에 빠져든다." (52)

김연수가 소개하는 문장들은 그것들 자체가 빛나는 문장이라서가 아니라 그 문장들을 보는 그의 마음이 빛나는 것이어서 비로소 청춘의 문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명문장을 소개해준다기보다는 문장을 명문장으로 볼 줄 아는 젊은 작가의 마음을 엿보는 기회를 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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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 이야기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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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란서 안경원>을 읽은 후, 나는 조경란의 열혈팬이 되기로 했다. 단편 "환절기"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가? 출렁이는 무거운 바께쓰를 이고지고 가 남의 집 대문 앞에 늘어선 푸른 화분에  김이 펄펄 끓는 물을 쏟아붓던 주인공. 터널처럼 어둡고 길고 음습하던 한 시절을 다시 보듯, 나는 오싹한 동질감에 사로잡혔다. 삶이 끔찍한 것은 누구에게나 대개 마찬가지다. 그러나 누구는 목을 매고, 누구는 케세라 케세라 하며 살아간다. 여기에 그 들여다보기 섬찟하고 또 지긋지긋한 끔찍함을 오랫동안 응시해온 작가가 있다.

조경란을 생각할 때면 이제는 중년이 된 작가 오정희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철저한 절망이라는 친연성이 그들의 소설 사이에 있다. 오정희도 조경란도 읽기에 쉬운 작가는 아니다. 그들의 문체가 아름답고, 그들 소설의 구성이 치밀하지만, 문장과 기교가 그들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조경란의 소설 대부분은 일인칭이며 그들의 경험은 쉽게 작가의 추체험으로 읽힌다. 소재의 새로움이란 루이제 린저에게처럼 조경란에게도 별 의미가 없는 개념이다. 그들 소설의 가치는 진정성과 치열함에 있다. 진정성과 치열함은 상상력이나 쿨함처럼 지어낼 수 있거나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 속의 권태를, 삶의 지리멸렬함을, 생존의 끔찍함을, 나와 타인이라는 지옥을 눈이 빠지도록 들여다보는 데서 얻어지는 단 한 줌의 성찰이다.

무엇에 대해 우리는 성찰하는가? 삶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가?
딱 두 가지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나와 타인의 관계, 사랑과 증오다.

진부하다고?
인간의 진실이 거주하는 장소는 원래 그렇게 진부한 법이다. 지방소도시의 먼지 뒤집어쓴 여인숙처럼.

<국자 이야기> 속 단편들은 <불란서 안경원> 속의 단편들보다 구성이 느슨하고 문장의 무게와 밀도가 덜하다. 분노와 적의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뜨거운 백열전구 같던 주인공들은 여전히 '나'를 탐구한다. 그러나 그 탐구는 <국자 이야기> 속에서 훨씬 더 유연하고 여유로운 방식으로 전개된다. 물론 비교의 대상이 남의 집 식물에 펄펄 끓는 물을 부어 죽이는 종류의 인물이던 것을 고려하면, 그 "훨씬 더 유연하고 여유로운 방식"이라는 것은 여전히 이를 악물어야 간신히 수행할 수 있는 정도의 고된 노동을 수반한다. 이를테면 조경란 소설의 원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과의 불화, 가족의 붕괴는 "잘 자요, 엄마"의 주인공에게서 제어할 수 없는 거미공포증에 비견된다. 그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주인공은 행동치료를 시도한다.

"나의 가족은 이제 거미가 되었다. 작게 나와 있는 가족사진을 들여다보았다. ... 나는 내 왼팔에 아버지를 올려두고 동생은 오른팔에 조카는 어깨 위에 죽은 막내동생은 내 가슴 위에 올려두고 그리고 엄마는 내 머리 위에 올려두었다. 그들이 내 몸 위를 걸어다니고 나를 만지고 핥고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공포는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으나 나는 후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반복하곤 했다." ("잘 자요, 엄마" 135)

절망에서 치유로 행동과 깨달음으로 <국자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아주 작은 발걸음을 내디딘다. 그 작은 발걸음은 물론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좁은 문"에서의 금박의 메타포가 사용되는 방식엔 조금 작위적이란 느낌이 있고, "입술"의 구성은 독자에게 상당한 혼란을 안겨주며, "돌의 꽃"의 박쥐남자라는 소재엔 확실히 어색한 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는 전진과정에서의 시행착오로 보인다. 나는 법을 배우려면 걷는 연습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조경란에겐 날고 싶은 욕망과 날아오르려는 의지가 있다.

"그러고 보니까 당신, 아무 말도 안 했구나, 내 얘기만 했네. 미 미안해. 하지만 이 이게 내 이야기의 끝 끝은 아 아니야. 난 한 번도 모 못 해본 마 말들이 너 너무나 많아. 이 이제 나는 인생이 너무나 노 놀랍고 신비로워서 입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 내 시 심장 소리는 내가 모 못 듣는 거잖아. 호 혹시 사람들이 말하고 싶은 건 하 한 가지가 아닐까. 한 한 가지 비 빛깔처럼 말이야. 가 가까이 다가오는 사 사람한텐 자 자리는 내주는 거야. 내가 마 말을 하는 건 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야. 말을 해. 말을 안 하면 귀 귀신도 모르는 거야. 말 말을 하지 못하면 살아도 주 죽은 거야. 말을 해, 사 사랑이 사라지거나 혹은 죽거나 아 아주 자 잠들지 않게끔. 나 나는 정말 마 말을 자 잘하는 사 사람이 되고 싶 싶었는데. 당신, 나 나를 좀 쳐 쳐다봐. 내게 마 말해줘, 다 당신에 과 관한 것. 자, 이 이젠 다 당신 차 차례야." ("입술" 223-224)
 
작가후기에서 이런 구절을 읽고 나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떤 장엄한 나무 한 그루를 만나게 될 때, 나는 나의 일부가 그 나무 속으로 서서히 미끄러져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분리할 줄 아는 힘, 아마도 나는 그런 것을 원했던 것 같다. 저항과 흥분과 체념과 냉담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이 불완전하며 변덕스럽고 위협적인 세계를 만질 수도 입을 수도 껴안을 수도 없는 이 연약한 언어가 과연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지. 나를 표시해줄 수 있는 어떤 점 하나 같은 게 저 길 끝에 정말 있을지." (292)

이런 작가에게라면 좀더 많은 열혈팬들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내게 말해줘, 당신에 관한 것,
<국자이야기>는 드디어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된 작가가 '나' 아닌 '너'에 대해 쓴 自敍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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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6-09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리뷰가 너무 좋아서 그에 걸맞는 댓글이 안나와 그냥 추천만하고 가나봅니다. 작가들이 검둥개님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여내는 렌즈가 되듯이, 검둥개님의 멋진 리뷰들도 제게 그렇답니다...

2006-06-09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6-10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nci님 우와 정말이요? ^_____^* 감사합니다. (_ _)
그런데 그 푸른꽃이 흐드러지게 핀 숲은 어디여요?
너무 멋있어서 한참 보고 오는 길이어요.

속삭이신 님, 그러시군요! ^^
환절기가 제게도 참 인상적인 단편이었어요.
불란서 안경원보다도요.
아가와 함께 늘 건강 조심하시고요. 멋진 여름 보내시기를.

nada 2006-06-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조경란이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생각나요. 품위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긴 것도 참 단아한데 그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식빵 굽는 시간과 불란서 안경원, 요렇게 초기작 좋아해요. 조경란도 폴 오스터처럼 쓰는 얘기만 주야장천 쓰는지라 좀 지루해지는 듯...

플레져 2006-06-12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경란 초기작은 읽지도 않고 이 책부터 덥석 읽어버렸네요, 저는...ㅎㅎ
참 꼼꼼한 소설, 한편으론 읽는 동안 작가의 숨결이 팍, 와닿는 조금 섬뜩하기도 한 느낌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동시에 쓰고 읽는 느낌이랄까요... 검둥개님의 리뷰는 너무나 훈늉하십니다.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검둥개 2006-06-12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양배추님 ㅎㅎ 쓰는 얘기만 주야장천 쓰는 거 맞죠. ^^;;
그래도 끈질기게 쓰면서 출구를 좀 찾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런 작가도 한둘 있어야겠죠. 폴 오스터는 좀 심하다 싶기는 해요.

플레져님. 넵, 섬뜩하다는 게 맞죠.
그렇게 손톱날이 확 돋은 문장을 쓸 수 있는 것도 재능이어요. 훈늉하긴 뭘요 ^^;;;
조경란이 다루는 소재가 제게 공감이 많이 되는 거여서 열혈팬이 되는 겁니다. 나의 비열한 고민을 작가가 이렇게 승화시켜서 멋드러지게 표현해주다니, 하구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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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재빨리 넘기다가, 십 년 전, 친구네 하숙방에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김영하의 첫 장편소설을 읽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그 때 내 심기에 그토록 거슬렸던 한 가지 사실도. 주인공의 이름이 미미가 뭐냐! 그러나 이 책은 생각보다 훨씬 잘 읽혔다. 잘 읽었다. 십 년 전의 실망은 없었다.

십 년 전이면 한창 오렌지족이라는 말이 유행할 때였다. 그 때만 해도 김영하 역시 젊디 젊은 작가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오렌지족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은 그의 정체성은 어쩌면 양아치 쪽에 가까웠던 걸까?

"죽어라고 학교 다녀봐야 대학 갈 팔자도 아니고, 국으로 있는 놈만 병신이다. 선생들은 패지, 애들은 쪼지, 주먹으로 못 잡을 바에야 뜨는 게 장땡이다. 대학 못 샀다고 어이고 불쌍한 내 새끼 하면서 카페 차려줄 재산이 있기를 하나, 그저 밖에서 구르는 게 집도 좋고 지도 좋은 거지. 부모들만 애들이 돌빡인 줄 안다. 우리도 눈치로 다 때려잡는다. 다 지 갈 곳을 알고 그쪽으로 흘러가면서 구겨지는 거다." ("비상구", 167-168)

이건 안목 있는 시대 통찰도 아니고, 삶과 사회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도 아닌, 동네 양아치, 삐끼, 날라리들의 평균적 상황인식에 불과하다.

"너무 늦었다. ...  앞만 보고 달렸다. 발 밑으로 기왓장 부서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두두두둑.  ... 왜 이렇게 죽어라고 쫓아와? ... 다행히 타넘을 지붕은 얼마든지 있었다. 니미 씨팔이다." ("비상구", 187)

이걸 멋지다거나 깊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이건 현실에 아주 유연하게 밀착된 사실이다.
너와 내가 다 아는 사실, 너와 내겐 책임이 없는 사실, 너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하!", 하고 오 분간 입을 벌리고 감탄한다.

나는 오늘 도서관 서가 앞에 서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이나 <무기의 그늘>을 들고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김영하의 이 소설집 한 권만을 빼들고 나왔다. 황석영을 읽으려면 왠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장을 넘기기 전에 심호흡을 해야 할 것만 같았던 것이다. 김영하의 소설엔 그런 부담이 없다. 그의 소설은 술 마시고 밤중에 들어와서 잠들기 전에 혼자 보는 심야의 티비 단막극 같고, 삐까뻔쩍해서 밤에 들어서면 눈이 시리는 LG24에서 사 피우는 처음 보는 상표의 외제담배 같다. 적당히 흥미진진하고 적당히 통속적인, 바로 그래서 중독적인 단막극, 한 번 피우고 나면 그걸로 끝인 담배 한 대의 찰나적 위안.

티비 단막극은 티비 단막극일 따름이고, 담배 한 대는 담배 한 대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밤 티비를 들여다보다 잠이 들고, 담배연기를 뿜어올리며 하루를 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는 우리 대중을 위안하는 소설가다. 그의 소설은 저 위 별표들의 이름처럼 "상품만족도"가 높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우리는 걱정한다. 하지만 버스와 트럭이 부닥치는 와중에, 전화카드가 없어서, 보고를 독촉하는 상관 때문에, 자칫 생명을 위협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타인에 대한 관심 같은 건 지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심지어 그 사람의 발이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대롱대롱 끼여서 시야를 가득 채울지라도! 정말이지 그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집에 온수가 끊어지기라도 한다면야 더더욱!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자, 이제 편한 잠옷으로 갈아 입고 리모컨으로 티비를 켤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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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 2006-06-09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안녕하세요?
몇몇 자주 들르는 서재를 통해 님을 알게 되어 인사를 드립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끼듯 조금씩 찬찬히 둘러봐야지요^^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깊은 심호흡, 마음의 준비(저도 꽤나 따지는 편인데)없이도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책이라 서두르는 마음이 되어 글을 남깁니다^^
오래전에 동아일보에 연재될 때 매일 매일 따라적고 싶을만큼 인상적이었고
요즘들어 그 책이 괜히 자꾸 생각나 그 책 달랑 두권들고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요. 기회 닿으면 읽으셔요.. 그럼 또 뵙지요..

검둥개 2006-06-10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iny님 안녕하세요? ^^
님의 말을 들으니 더욱 참을 수가 없어서 결국 <오래된 정원>을 빌려오고 말았네요. 심호흡을 하고, 주말에 찬찬히 읽어볼 참이어요. 기대가 됩니다. 사실은 함께 빌려온 황석영의 음식책만 또 먼저 읽어치우고 말았어요.
 

개는 김훈에게 그야말로 딱 맞는 소재다.

개는 사람에게 빌어먹고 사는 존재이고, 그렇게 빌어먹고 살면서도 나중에는 몽둥이로 두들겨맞아 잡혀먹히는 존재이며, 그리고 싸울 때는 철저하게 혼자인 존재이다. 사람에게 빌어붙어야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개들은 애처로우며, 어느 복날 주인님의 음식이 되어 밥상에 올라가는 개들의 운명은 속절없이 슬프고 비통하다.

즉,
김훈이 본 개들은 세상의 인간들 (=사내들) 이다,
김훈이 본 <개> 속의 인간들과 악돌이는 세상의 모든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이다.

개는 "그래도" 사람을 사랑한다.
비록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할지라도, 맞아죽을지라도. 

아니면,
이해 따위는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거니와, 싸워봤자 처음부터 승산 같은 건 아예 없고, 결국에는 맞아죽게 되어 있는, 그토록이나 강력한 상대이기 때문에? 어짜피 복종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면 차라리 사랑하는 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할 것이라서, 그래서?

그래서 <개>의 주인공, 숫놈 진돗개 보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나는 숫놈 진돗개라는 설정에서 남성우월주위와 민족주의의 그림자를 보며 내가 심각한 신경과민이 아닐까 고민한다. 부디 그러하기를!]

"못된 놈은 내가 아니라 악돌이였다. 나는 다만 졌을 뿐이다. 주인님은 저녁밥도 주지 않았다.... 나는 혀를 길게 빼서 물린 자리의 상처를 핥았다. ... 그렇게 못되고 경우없는 놈이 그토록 강하다는 것은 알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었지만, 그놈은 어쨌든 강한 놈이었다. 개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견딜 수 없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182)

못되지만,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면, 견뎌야 한다, 고 김훈은 말한다.
그러나,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경우에,
그 견딤은 기껏해야 복종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일 뿐이다.

<개>가 내게 가볍게 읽히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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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6-08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가볍지 않게 읽어봐야겠어요.^^

검둥개 2006-06-09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책은 아주 후딱 읽힌답니다.
개의 민감한 오감의 묘사에 역시 김훈의 문장이 빛을 발하기는 해요.
각기 다른 동네에 사는 아이들의 몸냄새라든가, 특히 축구하는 아이들의 몸 속에서 난다는 슉슉 피 도는 소리 같은 묘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