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김훈에게 그야말로 딱 맞는 소재다.
개는 사람에게 빌어먹고 사는 존재이고, 그렇게 빌어먹고 살면서도 나중에는 몽둥이로 두들겨맞아 잡혀먹히는 존재이며, 그리고 싸울 때는 철저하게 혼자인 존재이다. 사람에게 빌어붙어야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개들은 애처로우며, 어느 복날 주인님의 음식이 되어 밥상에 올라가는 개들의 운명은 속절없이 슬프고 비통하다.
즉,
김훈이 본 개들은 세상의 인간들 (=사내들) 이다,
김훈이 본 <개> 속의 인간들과 악돌이는 세상의 모든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이다.
개는 "그래도" 사람을 사랑한다.
비록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할지라도, 맞아죽을지라도.
아니면,
이해 따위는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거니와, 싸워봤자 처음부터 승산 같은 건 아예 없고, 결국에는 맞아죽게 되어 있는, 그토록이나 강력한 상대이기 때문에? 어짜피 복종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면 차라리 사랑하는 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할 것이라서, 그래서?
그래서 <개>의 주인공, 숫놈 진돗개 보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나는 숫놈 진돗개라는 설정에서 남성우월주위와 민족주의의 그림자를 보며 내가 심각한 신경과민이 아닐까 고민한다. 부디 그러하기를!]
"못된 놈은 내가 아니라 악돌이였다. 나는 다만 졌을 뿐이다. 주인님은 저녁밥도 주지 않았다.... 나는 혀를 길게 빼서 물린 자리의 상처를 핥았다. ... 그렇게 못되고 경우없는 놈이 그토록 강하다는 것은 알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었지만, 그놈은 어쨌든 강한 놈이었다. 개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견딜 수 없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182)
못되지만,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면, 견뎌야 한다, 고 김훈은 말한다.
그러나,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경우에,
그 견딤은 기껏해야 복종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일 뿐이다.
<개>가 내게 가볍게 읽히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