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책장을 재빨리 넘기다가, 십 년 전, 친구네 하숙방에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김영하의 첫 장편소설을 읽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그 때 내 심기에 그토록 거슬렸던 한 가지 사실도. 주인공의 이름이 미미가 뭐냐! 그러나 이 책은 생각보다 훨씬 잘 읽혔다. 잘 읽었다. 십 년 전의 실망은 없었다.

십 년 전이면 한창 오렌지족이라는 말이 유행할 때였다. 그 때만 해도 김영하 역시 젊디 젊은 작가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오렌지족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은 그의 정체성은 어쩌면 양아치 쪽에 가까웠던 걸까?

"죽어라고 학교 다녀봐야 대학 갈 팔자도 아니고, 국으로 있는 놈만 병신이다. 선생들은 패지, 애들은 쪼지, 주먹으로 못 잡을 바에야 뜨는 게 장땡이다. 대학 못 샀다고 어이고 불쌍한 내 새끼 하면서 카페 차려줄 재산이 있기를 하나, 그저 밖에서 구르는 게 집도 좋고 지도 좋은 거지. 부모들만 애들이 돌빡인 줄 안다. 우리도 눈치로 다 때려잡는다. 다 지 갈 곳을 알고 그쪽으로 흘러가면서 구겨지는 거다." ("비상구", 167-168)

이건 안목 있는 시대 통찰도 아니고, 삶과 사회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도 아닌, 동네 양아치, 삐끼, 날라리들의 평균적 상황인식에 불과하다.

"너무 늦었다. ...  앞만 보고 달렸다. 발 밑으로 기왓장 부서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두두두둑.  ... 왜 이렇게 죽어라고 쫓아와? ... 다행히 타넘을 지붕은 얼마든지 있었다. 니미 씨팔이다." ("비상구", 187)

이걸 멋지다거나 깊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이건 현실에 아주 유연하게 밀착된 사실이다.
너와 내가 다 아는 사실, 너와 내겐 책임이 없는 사실, 너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하!", 하고 오 분간 입을 벌리고 감탄한다.

나는 오늘 도서관 서가 앞에 서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이나 <무기의 그늘>을 들고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김영하의 이 소설집 한 권만을 빼들고 나왔다. 황석영을 읽으려면 왠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장을 넘기기 전에 심호흡을 해야 할 것만 같았던 것이다. 김영하의 소설엔 그런 부담이 없다. 그의 소설은 술 마시고 밤중에 들어와서 잠들기 전에 혼자 보는 심야의 티비 단막극 같고, 삐까뻔쩍해서 밤에 들어서면 눈이 시리는 LG24에서 사 피우는 처음 보는 상표의 외제담배 같다. 적당히 흥미진진하고 적당히 통속적인, 바로 그래서 중독적인 단막극, 한 번 피우고 나면 그걸로 끝인 담배 한 대의 찰나적 위안.

티비 단막극은 티비 단막극일 따름이고, 담배 한 대는 담배 한 대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밤 티비를 들여다보다 잠이 들고, 담배연기를 뿜어올리며 하루를 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는 우리 대중을 위안하는 소설가다. 그의 소설은 저 위 별표들의 이름처럼 "상품만족도"가 높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우리는 걱정한다. 하지만 버스와 트럭이 부닥치는 와중에, 전화카드가 없어서, 보고를 독촉하는 상관 때문에, 자칫 생명을 위협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타인에 대한 관심 같은 건 지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심지어 그 사람의 발이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대롱대롱 끼여서 시야를 가득 채울지라도! 정말이지 그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집에 온수가 끊어지기라도 한다면야 더더욱!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자, 이제 편한 잠옷으로 갈아 입고 리모컨으로 티비를 켤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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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 2006-06-09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안녕하세요?
몇몇 자주 들르는 서재를 통해 님을 알게 되어 인사를 드립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끼듯 조금씩 찬찬히 둘러봐야지요^^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깊은 심호흡, 마음의 준비(저도 꽤나 따지는 편인데)없이도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책이라 서두르는 마음이 되어 글을 남깁니다^^
오래전에 동아일보에 연재될 때 매일 매일 따라적고 싶을만큼 인상적이었고
요즘들어 그 책이 괜히 자꾸 생각나 그 책 달랑 두권들고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요. 기회 닿으면 읽으셔요.. 그럼 또 뵙지요..

검둥개 2006-06-10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iny님 안녕하세요? ^^
님의 말을 들으니 더욱 참을 수가 없어서 결국 <오래된 정원>을 빌려오고 말았네요. 심호흡을 하고, 주말에 찬찬히 읽어볼 참이어요. 기대가 됩니다. 사실은 함께 빌려온 황석영의 음식책만 또 먼저 읽어치우고 말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