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가 시인과 소설가들이 쓴 산문집 junkie라는 것을. 다른 책은 몇 권 읽지도 않았는데, 산문집은 정현종, 황인숙, 함민복, 유하, 최윤, 김훈의 것을 다 읽어치웠다. (시인과 소설가가 아닌 사람들이 쓴 잡문집까지 포함하면 이보다도 더 많다! 하이고, 자랑이다.)  관심있게 읽는 시인이나 작가들의 시시껍절한 사생활이나 뒷이야기를 얻어듣고 싶은 생각은 없고 그럴 가능성도 거의 제로지만, 그들이 직접 털어놓는 일상사를 듣는 재미는 짭짤하다. 게다가 시나 소설이 아닌 문장 속에서 시인과 소설가를 만난다는 것부터가 즐거운 경험임에 분명하다. 독자들의 입장에서 작가는 언제나 특별한 인간. 우리와 그들이 함께 거주하는 이 공통의 세계를 그들이 어떻게 경험하는 지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궁금해하지 않는가!

김연수는 이름만 많이 들은 작가인데 역시 도서관에서 가져온 몇 권의 책들 중에서 제일 먼저 산문집부터 꺼내 읽어버렸다. 청춘의 문장들이라고 이 젊은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의외로 아주 오래된 한시나 옛문장들이 대부분인데, 나는 그게 바로 그 제목이 말하는 저 청춘의 문장들인 줄은 모르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도대체 뭐가 그래서 청춘의 문장들이야, 라고 혼잣말을 했다. 각 단문들이 전혀 그 문장이나 시 하나를 소개하려고 쓰여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그건 다른 한편으론, 소개된 시나 문장들이 그 자체만으로는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개된 시나 문장들이 김연수의 글 전체 안에서만 비로소 그럴 듯 해보였다는 것은, 명문을 명문으로 알아보지 못한 독자인 내게는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글쓰는 이로서의 김연수가 글와 삶을 엮어서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은은 고령 사람인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목이 메어와 갈피를 덮는 일은 요 몇 년 새 얻은 버릇이다.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핀잔 꽤나 듣는 처지고 보니 <조선조 문인 졸기> 따위의 책을 펼치는 일이 많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시대 이름난 문인들의 죽음을 다룬 구절만 가려 뽑았다. 세상에 이런 책도 쓸모가 닿는 곳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 쓸모라는 게 결국 내 가슴을 울리는 일이었다. 성종 때 태어나 연산군 때 죽은 사람 중에 박은이란 분에 대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  이 사람의 졸기卒記는 간단하다. '연지시살지然之是殺之, 시년이십육時年二十六'. 실록은 왕이 (그 정직함을 미워해) 결국 그를 죽이니 그 나이는 26세 때였다고 간단하게 전한다. 실록이 전하지 않는, 그 열 글자 속에 숨은 스물여섯 살의 회한과 아쉬움과 슬픔을 헤아리는 것은 모두 다 내 몫이다. 카드결제일과 원고마감일 같은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이런 것까지 마음에 짊어지고 살아야 하니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다." (50-51)

이 글에 소개된 또 하나의 문장은 윤치호의 일기 1919년 9월 12일치에서 나온다.

오후에는 집에 있었다. 3시 20분즘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찾아왔다. 그녀는 조선인민협회 명의의 서한을 내밀면서 조선독립을 위해 자금을 대달라고 요구했다. 난 나 자신과 내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만큼 돈을 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한을 챙겨서 가버렸다.

위의 윤치호의 일기에 대해 김연수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내 마음은 다시 그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을 따라 윤치호의 집을 나선다. 사라진 나라 대한제국에서 태어났을 그 여학생은 얼마나 실망했을까? 윤치호의 집 앞에다 침이라도 뱉었을까? 아니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절망했을까? 윤치호의 변명을 듣는 순간, 그 여학생의 가슴속에서 꺼져버렸을 불빛. 나는 그 불빛을 상상하고 그 불빛에 매료되고 그 불빛에 빠져든다." (52)

김연수가 소개하는 문장들은 그것들 자체가 빛나는 문장이라서가 아니라 그 문장들을 보는 그의 마음이 빛나는 것이어서 비로소 청춘의 문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명문장을 소개해준다기보다는 문장을 명문장으로 볼 줄 아는 젊은 작가의 마음을 엿보는 기회를 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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