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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일단 첫 장을 넘기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한씨네 집 아들 동구는 삼대독자임에도 불구하고 손자를 어여삐 여겼다가는 자칫 며느리와의 기세 싸움에서 열세에 몰릴 것을 두려워한 할머니에게 매일 구박을 받는다. 게다가 동구는 난독증이 있어서 잘 쓰고 읽지를 못하는데, 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버지는 동구를 철퍼덕 철퍼덕 때린다. 할머니는 숨은 고기점을 꺼내려고 밥상의 김치찌게를 젓가락으로 엉망으로 헤집어놓는 충청도 과부 할마씨, 아버지는 자기 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한 불만을 말할 때마다 아내의 말을 들어주기는 고작하고 못배운 당신이 뭘 알아, 로 시작했다가 수가 틀리면 집안의 물건을 집어던지고 심지어 아내를 때리기까지 하는 외국계회사 직원이다. 어머니는 요리솜씨 하나로 시집오자마자 시어머니를 부엌에서 당당히 몰아냈고 집에서도 제과점 것보다 더 맛있는 카스테라를 만들 줄 아는 요리의 대가다. 이런 혼란의 도가니에 영주가 태어난다. 동구의 여섯살 아래 동생인 영주는 식구들 모두에게 특별한 존재다.
동구 왈, "나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먹통이고, 엄마나 아버지도 가끔 벽창호 같아 보일 만큼 고지식한 사람들이고, 할머니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도 너무 바쁜 사람이어서 영주가 존재하기 이전에 우리 식구들은 아무도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그런 우리 식구들 틈에서 영주같이 표현력이 풍부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누군가 허튼소리 잘하는 사람의 얼토당토않은 농담 같은 일이었다. 영주의 갑작스런 행동을 처음 접했을 때 우리 식구는 모두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곧 그 신기한 행동에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되었다." (23-24) 한 살 짜리 영주의 재주란 누군가가 자신을 안아줄 때마다 손으로 업어준 사람의 어깨나 팔을 토닥토닥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심지어 남아선호사상에 깊숙이 물든 악다구니 욕쟁이 할머니마저도 영주를 사랑한다.
하지만 영주 덕택에 가정에 뭔가 화목 비슷한 것이라도 깃들이는가 싶던 시간은 거짓말처럼 급작스럽게 끝이 나고 만다. 오히려 대사건 이후 엄마와 할머니 간의 골은 더이상 깊어질 수 없이 패여서 급기야 엄마는 병원으로 그 후엔 외가로 가버리고 만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며느리에게 한 치도 양보할 태세가 아니라, 아버지는 패잔병처럼 추레한 몰골이 된다. 동구는 자기 한 몸 던져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불로소득처럼 주어진 해결책을 무기력해진 아버지는 선뜻 받아들인다.
동구는 성장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저 너무 일찍 세상물정을 다 깨달은 그래서 아이답지 않게 시니컬한 태도를 지닌 조숙한 아이가 아니다. 동구는 어리숙하지만, 식구들에 대해서 알 건 다 알고, 문제의 핵심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지만 별다른 해결책이 없으므로 그냥 입을 다물고 마는, 순진한 소년이다. 세상에 이렇게 착하기만 한 아이가 어디 있어? 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세상의 모든 아이들 속에는 동구가 살고 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가지 의문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동구가 존경하고 흠모해마지 않은 박선생님은 왜 대학 선배와 그 선배의 선배인 주리 삼촌을 만나는 토요일 저녁, 그 대포집에 동구를 데려갔을까? 대포집에서 일어난 동구의 주정은 가히 이 책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데, 이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나는 내심 마음이 찜찜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박선생님은 이미 학교를 떠날 결심을 하고 서울에 머무르는 마지막 날 자신의 애재자 동구를 보고 가기로 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아, 이걸로 다 설명이 된다. 얼마나 마음이 후련한지!
"선생님 울지 마세요! 선생님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바지를 다려 입은 것이 무슨 잘못이에요? 자기가 뭐라고 선생님 이름을 함부로 부른대요? 저 사람이 나쁜 거에요. 울지 마세요. 내가 크면 가만 두지 않을 거에요. 선생님, 울지 마세요!"
시국에 분노하면서 저항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심각한 선생님 앞에서, 빨대로 빨아 마신 술과 고등어 안주 냄새에 속이 울렁울렁하던 동구는, 대학시절 선배에게나 선전 문건이나 빨리 빨리 배달하지는 않고 집에 가서 그 시간에 면바지 따위를 다려입고 왔다고 힐난을 받았다는 선생님을 옹호하며, 이렇게 계획에 없이 그만 사랑고백을 하고 만다. 사대문 안으로는 탱크가 들고 장기집권한 독재자가 암살된 후 또다른 군부독재의 서막이 올라가기 직전 그 짤막하고도 긴장되던 시절, 동구에게 중요한 건 잘 이해되지 않는 정치가 아니라 글도 잘 읽고 쓰지 못하는 자신을 아껴준 사랑하는 자신의 선생님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다. 삶이 정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왜 박선생님은 동구를 술자리에 데려가셨나?
동구 같은 아이가 사는 사회엔 군부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