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일단 첫 장을 넘기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한씨네 집 아들 동구는 삼대독자임에도 불구하고 손자를 어여삐 여겼다가는 자칫 며느리와의 기세 싸움에서 열세에 몰릴 것을 두려워한 할머니에게 매일 구박을 받는다. 게다가 동구는 난독증이 있어서 잘 쓰고 읽지를 못하는데, 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버지는 동구를 철퍼덕 철퍼덕 때린다. 할머니는 숨은 고기점을 꺼내려고 밥상의 김치찌게를 젓가락으로 엉망으로 헤집어놓는 충청도 과부 할마씨,  아버지는 자기 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한 불만을 말할 때마다 아내의 말을 들어주기는 고작하고 못배운 당신이 뭘 알아, 로 시작했다가 수가 틀리면 집안의 물건을 집어던지고 심지어 아내를 때리기까지 하는 외국계회사 직원이다. 어머니는 요리솜씨 하나로 시집오자마자 시어머니를 부엌에서 당당히 몰아냈고 집에서도 제과점 것보다 더 맛있는 카스테라를 만들 줄 아는 요리의 대가다.  이런 혼란의 도가니에 영주가 태어난다. 동구의 여섯살 아래 동생인 영주는 식구들 모두에게 특별한 존재다.

동구 왈, "나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먹통이고, 엄마나 아버지도 가끔 벽창호 같아 보일 만큼 고지식한 사람들이고, 할머니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도 너무 바쁜 사람이어서 영주가 존재하기 이전에 우리 식구들은 아무도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그런 우리 식구들 틈에서 영주같이 표현력이 풍부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누군가 허튼소리 잘하는 사람의 얼토당토않은 농담 같은 일이었다. 영주의 갑작스런 행동을 처음 접했을 때 우리 식구는 모두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곧 그 신기한 행동에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되었다." (23-24) 한 살 짜리 영주의 재주란 누군가가 자신을 안아줄 때마다 손으로 업어준 사람의 어깨나 팔을 토닥토닥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심지어 남아선호사상에 깊숙이 물든 악다구니 욕쟁이 할머니마저도 영주를 사랑한다.

하지만 영주 덕택에 가정에 뭔가 화목 비슷한 것이라도 깃들이는가 싶던 시간은 거짓말처럼 급작스럽게 끝이 나고 만다. 오히려 대사건 이후 엄마와 할머니 간의 골은 더이상 깊어질 수 없이 패여서 급기야 엄마는 병원으로 그 후엔 외가로 가버리고 만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며느리에게 한 치도 양보할 태세가 아니라, 아버지는 패잔병처럼 추레한 몰골이 된다. 동구는 자기 한 몸 던져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불로소득처럼 주어진 해결책을 무기력해진 아버지는 선뜻 받아들인다.

동구는 성장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저 너무 일찍 세상물정을 다 깨달은 그래서 아이답지 않게 시니컬한 태도를 지닌 조숙한 아이가 아니다. 동구는 어리숙하지만, 식구들에 대해서 알 건 다 알고, 문제의 핵심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지만 별다른 해결책이 없으므로 그냥 입을 다물고 마는, 순진한 소년이다. 세상에 이렇게 착하기만 한 아이가 어디 있어? 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세상의 모든 아이들 속에는 동구가 살고 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가지 의문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동구가 존경하고 흠모해마지 않은 박선생님은 왜 대학 선배와 그 선배의 선배인 주리 삼촌을 만나는 토요일 저녁, 그 대포집에 동구를 데려갔을까? 대포집에서 일어난 동구의 주정은 가히 이 책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데, 이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나는 내심 마음이 찜찜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박선생님은 이미 학교를 떠날 결심을 하고 서울에 머무르는 마지막 날 자신의 애재자 동구를 보고 가기로 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아, 이걸로 다 설명이 된다. 얼마나 마음이 후련한지!

"선생님 울지 마세요! 선생님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바지를 다려 입은 것이 무슨 잘못이에요? 자기가 뭐라고 선생님 이름을 함부로 부른대요? 저 사람이 나쁜 거에요. 울지 마세요. 내가 크면 가만 두지 않을 거에요. 선생님, 울지 마세요!"

시국에 분노하면서 저항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심각한 선생님 앞에서, 빨대로 빨아 마신 술과 고등어 안주 냄새에 속이 울렁울렁하던 동구는, 대학시절 선배에게나 선전 문건이나 빨리 빨리 배달하지는 않고 집에 가서 그 시간에 면바지 따위를 다려입고 왔다고 힐난을 받았다는 선생님을 옹호하며, 이렇게 계획에 없이 그만 사랑고백을 하고 만다. 사대문 안으로는 탱크가 들고 장기집권한 독재자가 암살된 후 또다른 군부독재의 서막이 올라가기 직전 그 짤막하고도 긴장되던 시절, 동구에게 중요한 건 잘 이해되지 않는 정치가 아니라 글도 잘 읽고 쓰지 못하는 자신을 아껴준 사랑하는 자신의 선생님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다. 삶이 정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왜 박선생님은 동구를 술자리에 데려가셨나?
동구 같은 아이가 사는 사회엔 군부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겠지!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06-06-14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고 , 오랜만에 뜨거운 눈물 흘렸던 기억이 새삼.
달의제단도 재미있었지만, 아무래도 이 소설에서 뭉클해지던 그 감각은 다시 나오지 않더군요.

검둥개 2006-06-14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그러셨군요. ^^
전 동구 할머니가 정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인물이었어요.
어린 동구가 가정을 지켜야 한다니, 아이들이 너무 고생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검둥개 2006-06-15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새벽별님 오랜만이어요. 잘 지내셨어요?
동구가 정말 참 귀여웠어요. ^^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0
고미숙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명쾌하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어떻게 한반도에서 오백년 봉건 왕조 신분제 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이 정신없는 구한말/일제강점 시기를 거치면서 민족국가의 민주주의 사회 국민이 되었는지, 또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들이 어떻게 지금의 한국인들의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하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변에서 미만하므로 별로 놀랍거나 의심스럽게 생각되지 않는 말과 태도와 행동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중 꽤 많은 부분은 근대로의 변화에서 기원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야 연구에서 더 많은 진전이 있었으면 싶다. 

대학 시절에 고시공부나 취직공부를 죽자사자 하는 선배들이 있었는데, 그 중 성공한 한 사람은 천장에다가 칼을 매달아두고 공부를 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밤새서 공부하다가 졸기라도 하면 칼에 베어서 그야말로 피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으라고! 듣기만 해도 정신이 번쩍 나지 않는가. 고시건 취직이건 그렇게까지 해서 통과를 해야 한다는 건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엽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늘 사람들의 고개를 감탄으로 주억거리게 만든다. (황영조나 임춘애를 생각해보라.) 뭐든지 죽기살기로, 특히 물질적으로 거의 목적의 달성이 불가능한 악조건 하에서 오직 정신력에 의지해 뭔가를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엄청난 찬탄의 대상이 된다. 중학교 때 반장이었던 친구는 공부를 위해서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은 자지 않는다고 했다. 왜 한국 사람들은 뭐든지 죽어라고 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할까? 

이 책 1부 2장에서 저자는 구한말 개화기에 형성된 민족 담론의 특성을 고찰하는데,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민족의 거처인 국가가 사라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우위를 적극 강조해야 하는 까닭이다."(44) 이 문장이 나온 맥락은 개화기에 강조된 이념 중의 하나가 민족의 발전을 위한 개인주의의 척결이다. 즉. 한국의 경우에는 민족담론이 막 형성되는 당시가 민족의 물질적 기반인 국가(=조선왕조)가 사라지는 순간과 일치하면서 정신으로서의 민족이 극도로 강조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1909년 4월 29일자 대한매일신보 논설 중 일부가 일례로 인용된다.  "오호라 국가의 정신이 망하면 국가의 형식은 망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그 나라는 이미 망한 나라이며 국가의 정신만 망하지 아니하면 나라의 형식은 망하였을지라도 그나라는 망하지 아니한 나라이니라..." (45)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논평한다. "한마디로 오직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가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국가의 형식을 갖출 능력이 없는 상황에 대한 반어적 언표이다. 국가의 형식을 갖출 능력이 없는 존재로서는 정신이라는 초월성을 상정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거기서 더 나아가 그것이 국가라는 형식과는 무관하게 존재해야만 하는 어떤 가치로 떠오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정신주의를 견고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 기독교이다. ... 기독교는 계몽 담론의 정점이자 태풍의 눈이기도 한 민족 담론 안에 깊은 흔적을 새긴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끄떡하면 강조되는 정신력의 배경이란 그러니까 구한말의 민족담론과 거기 공헌한 기독교의 영혼 사상인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정신력의 강조 뒤에 생략되는 진실은, 예나 지금이나, 사실 주어진 물질적 조건은 목표를 달성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가지 더, 모성 민족주의 (여성의 임무는 가족에 헌신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와 관련해 이 책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관찰. "나라 사랑하는 사람은 미인을 사랑하지 못하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강감찬에게 신채호는 이렇게 말하게 한다. "... 한 사람이 한평생 두 사랑을 가지면 두 사랑이 하나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고로... 애국자가 나라 밖에 다른 사랑이 있어도 애국자가 아니다." 저자의 논평: "사랑과 애국, 둘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마치 칼이 놓인 자리에 다른 것을 놓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구도 하에서는 사랑이나 성, 그것을 둘러싼 계열들은 모두 민족, 국가, 도덕 등의 가치들과는 적대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121)

어떤가? 이념과 사랑이 양립불가능으로 여겨졌던 지나간 시대가 생각나지 않는가?
근대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6-06-12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겉모습만 현대적으로 변하고, 뭐 앞으로도 계속 그 모양일 것 같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마태우스 2006-06-1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님의 책이군요. 우리나라는 축구도 헝그리정신으로 했었지요 아마^^

검둥개 2006-06-13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역시 로드무비님다운 코멘트십니다. ^.^
어쩌면 좋아요!

마태우스님, 아, 그 헝그리 정신, 너무 싫어요.
뭘 해도 사람이 밥은 두둑이 먹고 해야 된다는 게 이제 제 입장입니다. ^^
 
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삼십여 페이지 가량 읽어가던 중 예전에 이미 읽었던 책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는 좀 충격을 받았지만 소설 속에서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으므로 계속해서 읽어내려갔다. 일단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는 기억이 회복되자, 책을 읽는 내내 왜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그렇게 까맣게 잊혀졌는지, 왜 이 책을 처음 읽고 이렇다할 인상을 받지 못했었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책이 나올 당시에 후일담 소설이 붐을 이루었던 만큼 다른 동종 소설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을 테고, 게다가 도피중인 정치범과 그를 숨겨주다 사랑에 빠지는 여자, 라는 식의 이야기가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다시 읽어보니, 이번엔 의외로 과거에 눈을 두지 않았던 부분에 관심이 쏠렸다. 자연경관의 변화를 묘사한 무척이나 서정적인 문장들이라든가, 감옥에서의 생활처럼 소소하고도 구체적인 일들의 언급 (독방 창문으로 철사줄을 내어 비둘기를 잡아 뺑기통 위에서 삶아 먹는 일, 드나드는 쥐라도 애완동물로 만들려고 애를 쓰는 죄수들, 단식과정에서 변화하는 감각경험 등), 그리고 먹는 음식 이야기들. 디테일.

황석영이 이 시대의 다른 작가들과 구분된다면,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의 작품 속에 담긴 시대와 역사에 대한 의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완성도와 감동은 소재의 역사성만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파리하고 몰개성적인 성격은 적이 실망스러웠다. 오현우, 한윤희, 송영태, 최미경. 그들은 모두 80년대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인간들이 아니고, 그냥 유신에 반대한 젊은 청년, 학생운동에 동조적이었던 빨치산의 딸, 부르조아 출신의 학생운동권,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젊은 여대생이었다.

역사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것이 우리와 같은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생운동 전략을 유창하게 토론하는 소설 속의 인물의 말빨에 반하지 않고, 광주사태 비디오를 보고 수배자를 도피시켜주다가 사랑하게 된 사연, 그 남자가 무기수로 징역을 가버리게 된 사연에 자동적으로 감동하지 못한다.

우리가 감동하는 건 소설 속의 인물이 우리에게 사소하게 말 걸 때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에서. 해방정국 좌익 지식인이었던 한윤희의 아버지가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났던 민청 소속의 젊은 여학생을 다음해 데모에서 다시 만나 스치며 이렇게 사과할 때: "지난번에 땡감 먹인 걸 사과하오. 난 정말 몰랐어요" (155) 새벽 세 시에 서울역에 도착하자 서울이 온통 비상경계 상태여서 동이 틀 때까지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었고,  학생과 아버지는 어쩌다가 여인숙 방에 함께 가게 되었는데, 불을 켜놓고 우두커니 마주 앉아 있다가 아버지는 학생에게 시장기나 떼우라고 인절미며 감을 내주었단다. 그런데 여학생이 감을 아주 조금씩만 떼어먹더라는 거였다. 아껴먹느라 저러나 해서 아버지는 감 하나를 더 내어주고는, 화롯가에서 그만 졸았는데 깨어보니 여학생은 이미 가고 없더란다. 나중에 집에 와서 감을 꺼내 먹어보니 떫기가 얼마나 떫은지 뱉아버리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새댁이던 아내가 웃으면서 그건 땡감이라 햇빛에 익혀 먹거나 소금물에 담가두었다 먹어야 하는 거라고 설명을 해주었다고.

현대건축가 미에즈 반 데어 로에는 신은 세부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디테일,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역사의 디테일이건, 사랑의 디테일이건, 배신의 디테일이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6-06-12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소한 것이 중요하다는 말도 맞지만 그 사소함에 또 너무
깊은 의미를 두면 안된다는 생각이.
의미를 두는 순간 추해지고 변질되는 게 많아서.^^


nada 2006-06-12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도 그러시는군요! 전 "좀 충격을 받"는 것을 넘어서, 심하게 자학합니다. 이 돌대가리!! 하면서요. ㅎㅎ 오래 전에 읽어서 가물가물.. 이젠 그저 염정아, 지진희의 영화나 기다리려구요.

rainy 2006-06-13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번 다시 볼려구 벼르고 있는데 혹시 그러는 건 아닐지
이젠 확신 할수가 없어요 ^^;;
저에겐 이 책이 어쩌면 제목의 주술에 걸린 것처럼
먼 옛날 고요한 정원, 어떤 기원, 그렇게 마음에 남아 있어서
빨리 거기에 닿고 싶은 마음과 또 한편 내내 미뤄두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네요.
둘이 만났던 부분보다, 또 남자의 부분보다,
그녀가 홀로 떠난 곳에서 겪는 일들이 더 마음에 닿았던 듯..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다가 , 읽게 되겠죠. 검둥개님은 빨리 읽으셨네요^^

검둥개 2006-06-13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사소한 거만 나오면 또 피곤하죠 ^. ^ (갑자기 아무개 소설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옵니다.) 전 황석영의 팬이라서 이 소설 주인공들의 전형성이 못내 아쉬웠어요. 왜 분단문제에 대한 고민은 또 다들 베를린에 가서야만 할 수 있는 건지! 그런 통속적인 사고도 좀 극복이 됐으면 좋겠고 등등 ^^;;;

꽃양배추님. 전 이제 그것도 지쳐서 자학 같은 거 안 합니다. 몇 안 되는 리뷰도 돌아보면 벌써 아무 기억이 안 나는 게 많이 있다니깐요. 그래도 책 다 읽기 전에 옛날에 읽었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만 해도 보람차게 생각하렵니다. 그런데 염정아는 좀 미스캐스팅인데요. 좀더 후덕하고 청순한 이미지여야 소설과 맞지 않을까요? ^^

rainy님 다시 읽어본 것도 괜찮은 경험이었어요.
읽을 때마다 같은 책의 다른 부분에 눈길이 가요.
신기하죠? ^^

 

THE OTHER SISTER

심심하던 주말 오후, 다이앤 키튼과 줄리엣 루이스가 주연이라는 설명을 보고 버튼을 눌렀다. 줄리엣 루이스는 특수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부촌 소살리토로 돌아온 22살의 처녀로 지능이 정상인보다 약간 떨어진다. 영화는 이 줄리엣 루이스가 수의사보조원이 되겠다는 야심찬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돈만 내면 입학이 되는 동네 전문대학에서 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같은 장애를 지닌 남자친구도 만나고 독립도 하고 심지어는 결혼도 하게 되는 이야기다. 장애인으로 태어날지라도 여피로 태어나야겠다,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도 하지만, 줄리엣 루이스의 (톰 행크스를 연상시키는!) 뛰어난 정박아 연기 때문에 끝까지 보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다이앤 키튼의 여피 아줌마 연기도 꽤 귀엽다.

 

귀주 이야기

공리가 얼마나 멋진 배우인지 이 영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동네 이장과의 말싸움 끝에 그가 남편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찼다는 이유로 분개해서, 군으로 도로 시로 민원을 내러 다니고 계속 같은 판결이 반복되자 나중에는 변호사를 얻어서 형사소송까지 하게 되는 시골 아낙네 역을 얼마나 리얼하게 해내는지! 귀주의 목표는 보상금이나 형사처벌이 아니라 동네 이장에게서 단 한 마디,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인데, 보상금은 얼마를 내든 그 놈의 미안하다, 는 소리는 또 절대로 못하겠다는 게 이장의 입장. 귀주는 시동생을 데리고 추수한 고추를 한 리어카씩 내다팔아가면서 경비를 마련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의 엔딩은 자못 가슴아리다.
그런데 영화 속의 당간부들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인간적인지!
영화가 정부 예산으로 만들어져서 그런 것일까?



 THE LITTLE BLACK BOOK

브리트니 머피의 연기는 그냥 범상한 수준이지만 조연으로 나온 홀리 헌터 때문에 놓칠 수 없는 영화다. 리얼리티 쇼란 대중에게 무엇인가, 하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흥미롭게 다룬 영화. 브리트니 머피는 케이블 쇼 제작회사의 신입, 정말로 유치찬란한 리얼리티 쇼 제작팀에서 활동한다. 쇼의 소재는 창녀였던 할머니의 과거, 남편이나 아내의 외도, 한쪽만 난장이인 부부, 등등. 브리트니 머피에겐 멋진 남자친구가 있는데, 그가 출장을 가면서 놓고간 팜 파일럿에는 그의 전 여자친구들에 대한 정보가 가득 차 있다. 직장동료이자 가까운 친구가 된 홀리 헌터는 그녀들을 만나보라고 자꾸만 충동질하는데. 영화는 주인공이 마침내 다이앤 소여와 함께 일하는 소원을 이루는 해피앤딩으로 끝나지만, 영화의 진짜 알맹이는 홀리헌터의 총지휘 하에 연출되는 리얼리티 쇼. 우리에게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알고 싶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우리를 지배하지만 우리에 의해 조종되지 않는 것. 리얼리티 쇼의 승자는 민첩하고 영민한 기회주의자.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6-06-12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주 이야기에서의 공리가 정말 좋아요.
남편의 중요한 부분을 찼다는 이유로 분기탱천.ㅎㅎ
그 꼬질꼬질한 분장 속에서도 얼마나 당당하고 예쁘던지.^^

잉크냄새 2006-06-1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리, 참 좋아하는 배우였는데, 90년 초반까지는 반짝 나오고 그 이후로는 활동이 별로네요. 귀주 이야기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붉은 수수밭이 참 괜찮았던것 같네요.

검둥개 2006-06-13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공리가 만삭의 몸에 뒤뚱뒤뚱 시동생을 데리고 도로 시로, 멋졌어요. ^^임청하라면 절대 그런 역할을 못했겠지요?
남편이야 뭐라고 하든 말든. 영화도 퍽이나 마음에 들었답니다.

잉크냄새님, 공리를 2046에서 잠깐 보고 반가웠어요.
붉은 수수밭도 봤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
 

여백 (황인숙)

편지가 와 있다. 문을 나서며 나는
골방의 생쥐가 무심히 연 책을 갉듯
봉투를 찢고. 함께 귀퉁이를 잘린 편지는
부신 눈을 뜬다. 담벼락에 밀어붙인 눈더미에
굴을 파고 켜놓은 촛불을 바라보는
꼬마처럼 나는 편지를 읽으며
걸으며 미끌, 이게 무슨 말일까
염화칼슘을 조금 뿌려본다
부식된 도로의 체액이 질척하게 구두에 들러붙는다.
나는 얼른 눈을 딛고 구두를 문지른다.
미끄럼을 즐기기로 한다. 아, 미끄럼을 지쳐
버스가 온다. 나는 껑충 뛰어 버스에 오르고
쓰러질 뻔하다가 검은 코트의 등에
코를 박는다. 젖은 버들강아지
냄새로 버스는 중심을 잡고.
나는 천천히 편지를 읽는다.
나는 내가
몸을 띄워 버스에 오를 때
무엇이 떨어져나갔는지 구체적으로
허전해지기 시작한다.
왈칵 접히며 버스는 급정거하고,
나는 쓰러질 뻔하며 검은 코트에 코를 박고.
사람들이 허둥허둥
버스에 오른다.
그들은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고
허전한 얼굴을 한다. 어쩐지
정류장마다 누군가 떨군
한 페이지가 펄럭거린다.

그것은 영영 읽혀지지 않고.
정차표 밑에서
어린 수녀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