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0
고미숙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명쾌하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어떻게 한반도에서 오백년 봉건 왕조 신분제 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이 정신없는 구한말/일제강점 시기를 거치면서 민족국가의 민주주의 사회 국민이 되었는지, 또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들이 어떻게 지금의 한국인들의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하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변에서 미만하므로 별로 놀랍거나 의심스럽게 생각되지 않는 말과 태도와 행동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중 꽤 많은 부분은 근대로의 변화에서 기원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야 연구에서 더 많은 진전이 있었으면 싶다. 

대학 시절에 고시공부나 취직공부를 죽자사자 하는 선배들이 있었는데, 그 중 성공한 한 사람은 천장에다가 칼을 매달아두고 공부를 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밤새서 공부하다가 졸기라도 하면 칼에 베어서 그야말로 피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으라고! 듣기만 해도 정신이 번쩍 나지 않는가. 고시건 취직이건 그렇게까지 해서 통과를 해야 한다는 건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엽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늘 사람들의 고개를 감탄으로 주억거리게 만든다. (황영조나 임춘애를 생각해보라.) 뭐든지 죽기살기로, 특히 물질적으로 거의 목적의 달성이 불가능한 악조건 하에서 오직 정신력에 의지해 뭔가를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엄청난 찬탄의 대상이 된다. 중학교 때 반장이었던 친구는 공부를 위해서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은 자지 않는다고 했다. 왜 한국 사람들은 뭐든지 죽어라고 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할까? 

이 책 1부 2장에서 저자는 구한말 개화기에 형성된 민족 담론의 특성을 고찰하는데,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민족의 거처인 국가가 사라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우위를 적극 강조해야 하는 까닭이다."(44) 이 문장이 나온 맥락은 개화기에 강조된 이념 중의 하나가 민족의 발전을 위한 개인주의의 척결이다. 즉. 한국의 경우에는 민족담론이 막 형성되는 당시가 민족의 물질적 기반인 국가(=조선왕조)가 사라지는 순간과 일치하면서 정신으로서의 민족이 극도로 강조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1909년 4월 29일자 대한매일신보 논설 중 일부가 일례로 인용된다.  "오호라 국가의 정신이 망하면 국가의 형식은 망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그 나라는 이미 망한 나라이며 국가의 정신만 망하지 아니하면 나라의 형식은 망하였을지라도 그나라는 망하지 아니한 나라이니라..." (45)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논평한다. "한마디로 오직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가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국가의 형식을 갖출 능력이 없는 상황에 대한 반어적 언표이다. 국가의 형식을 갖출 능력이 없는 존재로서는 정신이라는 초월성을 상정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거기서 더 나아가 그것이 국가라는 형식과는 무관하게 존재해야만 하는 어떤 가치로 떠오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정신주의를 견고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 기독교이다. ... 기독교는 계몽 담론의 정점이자 태풍의 눈이기도 한 민족 담론 안에 깊은 흔적을 새긴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끄떡하면 강조되는 정신력의 배경이란 그러니까 구한말의 민족담론과 거기 공헌한 기독교의 영혼 사상인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정신력의 강조 뒤에 생략되는 진실은, 예나 지금이나, 사실 주어진 물질적 조건은 목표를 달성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가지 더, 모성 민족주의 (여성의 임무는 가족에 헌신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와 관련해 이 책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관찰. "나라 사랑하는 사람은 미인을 사랑하지 못하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강감찬에게 신채호는 이렇게 말하게 한다. "... 한 사람이 한평생 두 사랑을 가지면 두 사랑이 하나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고로... 애국자가 나라 밖에 다른 사랑이 있어도 애국자가 아니다." 저자의 논평: "사랑과 애국, 둘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마치 칼이 놓인 자리에 다른 것을 놓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구도 하에서는 사랑이나 성, 그것을 둘러싼 계열들은 모두 민족, 국가, 도덕 등의 가치들과는 적대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121)

어떤가? 이념과 사랑이 양립불가능으로 여겨졌던 지나간 시대가 생각나지 않는가?
근대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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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12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겉모습만 현대적으로 변하고, 뭐 앞으로도 계속 그 모양일 것 같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마태우스 2006-06-1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님의 책이군요. 우리나라는 축구도 헝그리정신으로 했었지요 아마^^

검둥개 2006-06-13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역시 로드무비님다운 코멘트십니다. ^.^
어쩌면 좋아요!

마태우스님, 아, 그 헝그리 정신, 너무 싫어요.
뭘 해도 사람이 밥은 두둑이 먹고 해야 된다는 게 이제 제 입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