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황인숙)
편지가 와 있다. 문을 나서며 나는
골방의 생쥐가 무심히 연 책을 갉듯
봉투를 찢고. 함께 귀퉁이를 잘린 편지는
부신 눈을 뜬다. 담벼락에 밀어붙인 눈더미에
굴을 파고 켜놓은 촛불을 바라보는
꼬마처럼 나는 편지를 읽으며
걸으며 미끌, 이게 무슨 말일까
염화칼슘을 조금 뿌려본다
부식된 도로의 체액이 질척하게 구두에 들러붙는다.
나는 얼른 눈을 딛고 구두를 문지른다.
미끄럼을 즐기기로 한다. 아, 미끄럼을 지쳐
버스가 온다. 나는 껑충 뛰어 버스에 오르고
쓰러질 뻔하다가 검은 코트의 등에
코를 박는다. 젖은 버들강아지
냄새로 버스는 중심을 잡고.
나는 천천히 편지를 읽는다.
나는 내가
몸을 띄워 버스에 오를 때
무엇이 떨어져나갔는지 구체적으로
허전해지기 시작한다.
왈칵 접히며 버스는 급정거하고,
나는 쓰러질 뻔하며 검은 코트에 코를 박고.
사람들이 허둥허둥
버스에 오른다.
그들은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고
허전한 얼굴을 한다. 어쩐지
정류장마다 누군가 떨군
한 페이지가 펄럭거린다.
그것은 영영 읽혀지지 않고.
정차표 밑에서
어린 수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