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魯迅 (김광균)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메갯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빰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 호마로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요즘 이 책에 실린 시를 하나씩 읽는다. 

 와사등의 시인이 이런 작품도 썼다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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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로르까)

새벽 꽃이 벌써
자기를
열었다
(기억하는가
오후의 깊이를?)

달의 감송(甘松)이 내뿜는다
그 찬 냄새를
(기억하는가
8월의 긴 눈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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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난은 (천상병)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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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도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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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5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6-25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이건 유종호 선생 책에서 베껴온 건데 거기는 그렇게 되어 있어유.
왠지 이런 발음표기가 저는 정겹게 느껴져요. 프랑시쓰 쨈이라니, 베끼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백석의 시들은 정말 다 멋지구만유.

잉크냄새 2006-06-26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이 구절이 참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시지요.

검둥개 2006-06-26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넵! 그렇습니다. ^^
 

여백 (황인숙)

편지가 와 있다. 문을 나서며 나는
골방의 생쥐가 무심히 연 책을 갉듯
봉투를 찢고. 함께 귀퉁이를 잘린 편지는
부신 눈을 뜬다. 담벼락에 밀어붙인 눈더미에
굴을 파고 켜놓은 촛불을 바라보는
꼬마처럼 나는 편지를 읽으며
걸으며 미끌, 이게 무슨 말일까
염화칼슘을 조금 뿌려본다
부식된 도로의 체액이 질척하게 구두에 들러붙는다.
나는 얼른 눈을 딛고 구두를 문지른다.
미끄럼을 즐기기로 한다. 아, 미끄럼을 지쳐
버스가 온다. 나는 껑충 뛰어 버스에 오르고
쓰러질 뻔하다가 검은 코트의 등에
코를 박는다. 젖은 버들강아지
냄새로 버스는 중심을 잡고.
나는 천천히 편지를 읽는다.
나는 내가
몸을 띄워 버스에 오를 때
무엇이 떨어져나갔는지 구체적으로
허전해지기 시작한다.
왈칵 접히며 버스는 급정거하고,
나는 쓰러질 뻔하며 검은 코트에 코를 박고.
사람들이 허둥허둥
버스에 오른다.
그들은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고
허전한 얼굴을 한다. 어쩐지
정류장마다 누군가 떨군
한 페이지가 펄럭거린다.

그것은 영영 읽혀지지 않고.
정차표 밑에서
어린 수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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