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표지의 파일 - 임현정


그에 대한 기억들은 스테이플러로 모서리가 찍혀

얌전히 스크랩된다

그녀를 향한 사소한 인사말도 파일에 담겨 있다

검은 표지의 파일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묵묵히 일한다

어두운 표정의 것들이 그렇듯

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때론 모나미 볼펜 같다고 생각한다

볼펜 자국 같은 일상이 지나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스르르 넘어가는 비닐의 장정들

오늘은 그가 나를 보고 웃 - 었 - 다

웃는 모습을 가위로 오린다

기억은 꼼짝없이 갇힌다

그녀는 두터운 파일을 말끔히 정리했다

언젠가 검은 파일은 정리된 내용들을 펼칠 것이다

그는 잘 말려들어가 종이 몇 장으로 추억된다

갑자기 두터운 파일 안에 놓인 그는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과장된 기억들과 마주친다

나날이 그녀는 두터워진다

하지만 파일은 지나간 것만 실을 뿐

그는 소리 내어 말할 것이다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과장된 당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새는 좋아하는 작가가 쿤데라라고 하면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표를 내는 거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왠지 가슴이 아팠다. 대학 때 눈이 유난히 빛나는 한 학번 선배 언니가 생일선물로 사줬던 책이 세 번도 더 읽은 쿤데라의 불멸인데...


삼십이 넘어갈 때는 황당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어영부영 보내니까 정말 삽십이 되는 날이 오는구나, 싶어서 표는 안 냈지만 그 때 충격도 많이 받았는데, 이제 삼십은 한 세기 전이고(!), 조금 있으면 사십이 될 테세. 


왜 이렇게 나이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강박을 부리는 것일까? 누가 나이값 하라고 윽박지르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유령을 불러대 놓고 스트레스를 받는 격이다.


얼굴 뒤에 - 최승자


얼굴 뒤에

나는 감춘다.

너의 고통과

너의 고통의 피맺힘에 관한

나의 지식을.


얼굴 뒤에

나는 감춘다.

내 자포자기의

내 패배주의의

그러나 무모한 힘을

그러나 무한한 근원을


정작 나이든 어르신네들은 아주 여유만만하건만은.

오십년 후에도 이를 갈고, 육십이 가까워져도 팔랑팔랑하며, 배부른 마음으로 이를 쑤시는 어르신네들 흉내 좀 내봐야겠다.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 천상병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에게 편지를 쓴다네.

참 우습다 - 최승자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늘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 권정생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2학년인 도모꼬가
1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가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 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서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12-04-18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아직도, 영원히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하자구요.^^

검둥개 2012-04-18 10:19   좋아요 0 | URL
소녀 때는 분명 애늙은이였는데 이제 나이를 먹으니까 포르르포르르 - 세상사가 희한하지요 ^^

치니 2012-04-18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 님이다! 저번에도 한 줄 쓰셨을 때 반가웠는데. 헤 -
정생이가 이가 갈릴 만하네요. 풉.
사십은 애당초 지난 지 오래, 나이에 대해 무감각해진 지도 오래, 이런 저에 대해 주책이라고 하겠지만 아무 생각 없어요. 나잇값은 별개의 문제지만요. ㅎ

검둥개 2012-04-18 12:44   좋아요 0 | URL
주책이 다 여유와 자신이거든요. 멋지신 치니님!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나이값을 반성하는 것은 사실 평소 백퍼센트 무반성 생활을 한다는 반증이죠. 갑자기 업적 좀 쌓아둘 걸 하는 엉뚱한 회한이 들지를 않나 ^^

잉크냄새 2012-04-18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서 유령을 불러대 놓고 스트레스를 받는 격이다> - 뜨끔한 구절이군요.

검둥개 2012-04-19 12:17   좋아요 0 | URL
제 발이 찔려서 그러는 거겠지요?
 

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최승자 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내일 아침이 살기 싫으니/ 이대로 쓰려져 잠들리라,/ 쥐도새도모르게 잠들어버리리가./ 그러나 자고 싶어도 죽고 싶어도/ 누울 곳 없는 정신은 툭하면 집을 나서서/ 이 거리 저 골목을 기웃거리고,/ 살코기처럼 흥건하게 쏟아지는 불빛들./ 오오 그대들 오늘도 살아 계신가,/ 정처없이 살아 계신가./ 밤나무 이파리 실뱀처럼 뒤엉켜/ 밤꽃들 불을 켜는 네온의 집 창가에서/ 나는 고아처럼 바라본다./ 일촉즉발의 사랑 속에서 따스하게 숨쉬는 염통들,/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애인들의 배를 베고 / 여자들 남자들 하염없이 평화롭게 붕붕거리지만/ 흐흥 뭐해서 뭐해, 별들은 매연에 취해 찔끔거리고/ 구슬픈 밤공기가 이별의 닐리리를 불러대는 밤거리/ 올 늦가을엔 새빨간 루즈를 칠하고/ 내년엔 실한 아들 하나 낳을까/ 아니면 내일부터 단식을 시작할까/ 그러나 돌아와 방문을 열면/ 응답처럼 보복처럼, 나의 기둥서방/ 죽음이 나보다 먼저 누워/ 두 눈을 멀뜽거리고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11-07-19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오랫만이네요.
저도 요즘은 잘 접속하지 못하는데, 간만에 접속했더니 님의 글이 올라와있네요.
 


내 마음의 심판 (성미정)



내 마음엔 심판이 살고 있다 그는 꽤 까다로운 편이다
한 번의 반칙도 눈감아주지 않는다 사소한 실수도 용납
하지 않는다 내 마음에 얹혀사는 주제에 왜 내 편을 들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판정을 무시한 채 경
기를 계속하면 야구가 잘되지 않는다 마음 한구석이 왠지
찜찜하다 그렇다고 그가 엄격한 건만은 아니다 때론 경기
장의 심판들에게 승복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런 날 그
는 날 위로해준다 그는 칭찬엔 인색하지만 위로는 아끼지
않는다 나는 순식간에 판정을 뒤엎고 속보이게 편파 판정
을 하는 경기장의 심판들보단 그를 믿는다 그의 말에 귀
기울여서 손해본 적은 없다 이젠 그가 내 마음에 사는 게
든든하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내 편임을 믿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르마
(안상학)


단골집 이발사는 머리를 깎다 말고
가르마 쪽 머리가 잘 빠지는 법이라고 했다
나는 성긴 가르마를 비춰 보며 문득
가장 가까운 머리카락끼리 헤어진 상처라고 생각했다

하필 빛바랜 금강산 사진이 걸려 있는 이발소에서
또 나는, 지금 이 나라도
그런 가르마를 곱게 빗어 넘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누군가 빗겨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를 깎으며 자꾸만
허전한 가르마가 거슬려
차라리 빡빡 밀어버릴까
아니면 올백을 해버릴까 궁리 중인데
내 생각을 눈치 챈 듯, 잡생각 말라는 듯 어느새
나를 누이고 목에 칼을 들이대는 이발사의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있었다. 거울
에 거꾸로 박힌 낡은 텔레비전에서는 평택 대추리에 미군 기지를 마련해 주겠
다고 이 나라  군인들이 철조망으로  가르마를 타고 있었다. 순하디 순한 논바
닥에서는 가장 가까운 흙들끼리 헤어지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