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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이수명)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토요일 오후처럼 하릴없어지는 것이다. 꽃다발을 든 신부여, 가던 차에서 내려 욕설을 퍼붓고 그대는 억울하도록 상스러워지는 것이다. 골목마다 막히기만 하는 것이다. 쉬워지고 우스워지는 것이다. 보지 않을 수 있지만 듣지 않을 수 없는 것, 먼지로 뒤덮인 한 꺼풀의 귀지를 죽을 때까지 껴입는 것이다. 익어가는 열매처럼,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몸을 던지는 것이다. 하품 끝에 눈물이 어리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토요일 오후처럼 마지막에 오는 것, 마지막에 찾아오는 공황 같은 것이다. 꽃다발을 버린 신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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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은 94년에 등단한 시인이지만, 나는 최근까지 이 시인의 시를 알지 못했다. 이수명은 난해시를 쓰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경향은 최근 시집으로 갈 수록 강화되는 모양이다. (c.f. 이수명의 가장 최근시집인 <고양이 비디오를 보다>에 대한 브리즈님의 서평을 볼 것!)  하지만 그 즉물시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이수명은 인상적이고 특징적인 서정성을 지닌 시인이다. 나는 이 시인의 재기발랄하며 가볍고 동시에 서정적인 시들을 무척 좋아한다.

"토요일 오후"라는 이 짤막한 산문시 속에는 막 자신의 결혼식으로 향하는 신부의 그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져야 마땅할 순간이  순식간에 우습고 황당하고 심지어 약간 서글프기까지 한 것으로 전락하는 모습이 스냅사진처럼 잘 포착되어 있다. (이 신부는 급한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꽃다발도 던져버리고 결혼식장으로 달려가는 것일까? 아니면 막판에 상대와의 언쟁 끝에 결혼을 포기하는 것일까? ) 

어린 아이가 무심결에 손을 놓아버린 풍선처럼, 폼이라던가 형식이라거나 악랄스럽게 강력한 사회적 관습과 그에 동반되는 엄숙주의가 멀리멀리 날아가버리는 어느 나른한 토요일 오후.  산다는 것은 마지막에 오는 것, 산다는 것은  공황 같은 것이라고 시인이 말한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진짜로 공황 같던 삶에 배여 있던 치기어린 비극성도 사이다 거품처럼 쉬이 휘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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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기형도)

이튿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간유리 같은 밤을 지났다.

그날 우리들의 언덕에는 몇백 개 칼자국을 그으며 미친 바람이 불었다. 구부러진 핀처럼 웃으며 누이는 긴 팽이모자를 쓰고 언덕을 넘어갔다. 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걸까? 어머니 왜 나는 왼손잡이여요. 부엌은 거대한 한 개 스푼이다. 하루종일 나는 문지방 위에 앉아서 지붕 위에서 가파른 예각으로 울고 있는 유지 소리를 구깃구깃 삼켜넣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아버지가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이야. 조용히 골동품 속으로 낙하하는 폭풍의 하오.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러닝 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 눈 부릅뜨고 헤아려보았다. 공중에서 휙휙 솟구치는 수천 개 주삿바늘. 그러고 나서 저녁 무렵 땅거미 한 겹의 무게를 데리고 누이는 보쁠린 치마 가득 삘기의 푸른 즙약을 물들인 채 절룩거리며 돌아오는 것이다.

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암흑 속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집. 이 불끈거리는 예감은 무엇일까. 나는 헝겊 같은 배를 접으며 이 악물고 언덕에 섰다. 그리하여 풀더미의 칼집 속에 하체를 담그고 자정 가까이 걸어갔을 때 나는 성냥개비 같은 내 오른팔 끝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무서운 섬광을 보았다. 바람이여, 언덕 가득 이 수천 장 손수건을 찢어 날리는 광포한 바람이여. 이제야 나는 어디에서 네가 불어오는지 알 것 같으다. 오, 그리하여 수염투성이의 바람에 피투성이가 되어 내려오는 언덕에서 보았던 나의 어머니가 왜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는지를.

다음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폭풍의 밤마다 언덕에 오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무수한 변증의 비명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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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형도를 내가 속한 세대의 시인으로, 내가 젊음을 보냈던 시대의 시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사실은 지금은 이미 중년이 된 소설가 공지영보다도 나이가 많은 시인, 89년에 딱 서른의 나이로 심야영화관에서 사망한 시인이다. 89년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그를 내 세대의 시인으로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다. 나보다 젊은 세대의 사람들도 이 시인을 자신들의 세대의 시인으로 간주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그건 확실히, 단순히 기형도가 요절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를 젊은 시절의 우상으로 만드는 그보다 깊은 그 무언가가 그의 시들 안엔 존재한다.

기형도의 시는 탁월한 비주얼을 자랑한다. '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이라고 그가 말하면 정말로 어둠이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환영이 보인다. 그러면서 그 지긋지긋한 밀가루 냄새라던가 맛이라고는 도통 없는 그저 배불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밀가루 덩어리가 갖는 다른 의미들까지가 순식간에 시 전체에 확 퍼지는 느낌이랄까.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을 완벽하게 만드는 심상들이 이 시 전체를 지배한다. 미친 광포한 바람, 펄럭이며 떨어지는 러닝 셔츠, 솟구치는 주사바늘, 절룩이며 돌아오는 누이, 풀어지는 어둠.

그러면서도 또한 그의 시어들은 아름다운 청각적 리듬을 자랑한다. '가파른 예각으로 울고 있는 유지 소리' 같은 구절은 두운이 잘 잡혀 있다. 산문시이지만 입으로 소리를 내어 읽어보면 3-4조 혹은 4-4조의 전통적 우리말 리듬이 살아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 눈으로 시를 보는 것 같고, 그의 시를 읽으면 시인의 나직한 목소리로 계곡물 소리처럼 낱말들이 귀 속으로 쏟아드는 것 같다. 

시집을 몇 권씩 사던 시절이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에 시인들은 유일하게 세상을 볼 줄 알고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무뎌진 나에게는, 시인들이란 나이를 먹고 먹어도 피를 토하는 듯이 그렇게 시를 쓰며 사는 얼마나 비극적인 인물들인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물론 시인도 나이를 먹는다. 세계관도 바뀐다. 시에도 여유가 들어가고 소재도 넓어지고. 그래도 나는 젊은 작가들의 젊은 시가 좋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세상, 지금 아니면 뭐든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고, 그런데 아무리 기다리고 노력해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위기감과 무력감. 이런 감정들이 잔뜩 장전된 젊은 시인들의 잘 쓰여진 시는, 무슨 말인지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확히 모르겠는데도 (알 수 있으면 시가 아니지만) 순식간에 마음을 후려치며 우리 마음 속에서 수류탄처럼 폭발한다.

기형도의 시는 다 좋다. 다 좋은 시만 남길 수 있던 시인은 정말로 행복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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