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행 때문에 시에서 마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눈 내리니 덕석을 생각함 (박흥식)


섣달그믐을 앞둔 불 꺼진 구멍가게 맥주상자 뒤에서 기침 소리가 들린다
소주병 힘없이 쓰러지는 소리 따라 들린다
눈은 유들유들 내리고
고양이 쓰레기종량제 비닐봉지를 찢어 헤치는
이 밤은 갈 곳 없는 중년의 저 사내에 눈 밑에 딴딴히 얼어붙은 땅뿐이로구나

[덕석: 추울 때 소의 등을 덮어주는 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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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20 0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viana 2006-01-20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식한 저는 덕석을 지명이라고 생각했다는.-_-

검둥개 2006-01-21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 ㅎㅎ 저두 덕석이 뭔지 이 시를 보기 전까지 몰랐답니다. ^^
 

묘비명 (박형준)

                      

유별나게 긴 다리를 타고난 사내는
돌아다니느라 인생을 허비했다
걷지 않고서는 사는 게 무의미했던
사내가 신었던 신발은 추상적이 되어
길 가장자리에 버려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 속에 흙이 채워지고 풀씨가 날아와
작은 무덤이 되어 가느다란 꽃잎을 피웠다
허공에 주인의 발바닥을 거꾸로 들어올려
이 곳의 행적을 기록했다,
신발들은 그렇게 잊혀지곤 했다

기억이란 끔찍한 물건이다
망각되기 위해 버려진 신발들이
사실은 나를 신고 다녔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맨발은 금방 망각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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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4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6-01-05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저의 근황은 막 제가 올린 뻬빠를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 허리가 쑤셔서 죽음이야요. 고생하셨네요. 그래도 걱정하신 건 다 괜찮았으니 천만다행이 아닙니까! 이제 좀 진정하셨죠? 따뜻한 이불 아래 들어가서 마음을 좀 가라앉히셔요. 서재에 가보았는데 아이고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원래 답글 안 다시는 스탈이니 확 지우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ㅎㅎㅎ? ;)
 

가구의 힘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구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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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2-2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왜 이리 뜸하시단 마립니까!
바쁘신가 봐요.^^

'가구의 힘' 저도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예요.^^

검둥개 2005-12-29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처음 읽었었어요. ^^*
그렇게 우연히 만나서 잊혀지지 않는 시들이 몇 있어요.

마태우스 2005-12-29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전 이 시 처음 읽었어요...
열 사람 중에서 아홉사람이 내얼굴을 보더니 손가락질해...이런 노래 옛날에 자주 불렀죠. 그 노래 중 한 대목 같네요...느낌이 그렇단 얘기에요

검둥개 2005-12-30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태우스님, 님의 독창적 해석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어요!!! ^^
그런데 시의 어느 부분이 특히 그 노래와 유사한 느낌인가요? 헤헤
 

맷돌 (문태준)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운 농투사니 아재의 복숭아뼈 같다
동구에 앉아 주름으로 칭칭 몸을 둘러세운 늙은 팽나무 같다
죽은 돌들끼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 같다
가을 털갈이를 하는 우리집 새끼 밴 염소 같다
사랑을 잃은 이에게 녹두꽃 같은 눈물을 고이게 할 것 같다
그런 맷돌을, 더는 이 세상에서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내
외할머니가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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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5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검둥개 2005-12-29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몸살 걸려 앓다가 이제야 좀 나아서 들어왔시유. ^^ 우짜 무료하심? 그 털많은 넘의 반응은, "어, 왔어?"였답니다. 집에 가면 <불멸>을 한 번 재독해볼께요. 여기 올 때 들고온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이니. 쿤데라 리뷰 쓴 건 알구 있었슴다. 그 책을 말씀하신 것인 줄을 몰랐을 뿐 ^^;;;
 

견딜 수 없네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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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5-12-25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견뎌내야 한다고 시인에게 말해줄래요!

로드무비 2005-12-2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도 제목에 끌려 처음 나왔을 때 바로 샀더니 이 시 외엔 없더군요.
그런 시집이 가끔 있어요.
아무튼 노시인의 심정이 느껴집니다.
저라고 별 다를 바 없고요.^^

검둥개 2005-12-29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런스님, 이렇게 용감하신!!! ^ .^

로드무비님, 전 그런 시집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시집 살 때 앞의 시들만 읽지 않고 맨 뒤에 실린 시들도 읽어보곤 했었죠. ^^ 그래도 나아지지 않더군요. ㅎㅎ 제가 시를 보는 눈이 없었던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