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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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아홉번째 지나감 (장석남)



마음 흐린 날
학림다방 창문가에 앉아
구름 지나가는 것을 센다
아홉번째 구름의 지나감
엄엄한 가장 행렬
우리가 그 동안 그렇게 했던,
불 끈 유랑 악단
발목이 시겠다
거기거기쯤에선 발목도 벗고 싶겠다
손톱이 꾹꾹 탁자의 나뭇결 따라 새기는
구름의 아홉번째 지나감
잠시 햇빛 나다 다시 흐리면
소리 막 그친 듯
눈시울 스치는
불 끈 유랑 악단



장석남,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문학과 지성사, 1995, p. 37.



사진출처: http://www.design.co.kr/section/news_detail.html?info_id=41964&category=00000001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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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에 사모은 시집들을 들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분이 심란할 때마다 구내 서점에서 사모은 것들이다.  친구들은 무슨 시집 따위를 그렇게 줄기차게 읽어대느냐고 물었지만, 사실 정말로 열심히 읽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 번에 여러권씩 무슨 과일 떨이 사듯 사댄 속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때도 사놓고 대충 보는양 마는양 하고 재미없다며 한쪽으로 치워놓았던 이승하의 1993년 시집.  '환자들'이란 시를 발견하고  모처럼 펼쳤더니 그 새 누렇게 바랜 책이 아예 쩍하고 갈라졌다. 제본에 쓰는 풀이 딱딱하게 굳어서 정가운데로 쪼개졌다. 첫연의 총무는 도서관 총무일까? 독서실에 다니던 시절 고시공부나 공무원시험 공부를 하며 독서실을 관리하던 총무를 별다른 이유 없이 똥쭐 빠지게 패주고 싶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다같이 한심한 처지인데 단지 총무는 나보다 많은 버젓한 어른이라는 사실이 불러일으킨 그 심란함이 아주 처치곤란이었다.




환자들 / 이승하

탈출한 적이 있었지
영 형편없는 총무 녀석을 패준 뒤
병원의 쇠창살을 끊고 달려나간 거리
낚시꾼의 손에서 운좋게 놓여난 물고기처럼
집단에서 풀려나 개인이 되었을 때
난 자유를 만끽했었다

집단은 무섭지
내가 집단의 일원이 되면
아무 죄의식 없이 누군가를 죽일 수 있고
아무 비판의식 없이 누군가를 숭배할 수 있지
환자들과 더불어
환자가 되는 슬픔 혹은 기쁨

저 정치인은 왜 저렇게 몰상식한가
저 공무원은 왜 저렇게 불친절한가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를 들을 때마다
신문을 읽을 때마다 몇 번씩
당신 미쳤냐고 당신들 미치지 않았냐고
외치고 싶지만 ...... 참는다

참는 동안 난 미쳐가지

내가 미쳤음을 왜들 모르지?
당신들도 제정신이 아님을 왜들 모르지?
격리 수용되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당신일 수 있어
형사가 한 순간에 범인이 되고
법정이 한 순간에 병동이 되니

혼자일 때 난 의사야
스스로 진찰하고 스스로 처방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팔에 히로뽕을 놓기도 하지
출근길에 승객의 일원이 되면
출근하여 조직의 일원이 되면
난 타인의 눈알을 갖지

타인의 눈알로 세상을 본다
퉅치를 보거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눈시울을 붉히는 나의 눈속임
피를 플리며
나 자신을 수술할 줄 모르는
철면피의 눈알, 환자의 눈알을



--<폭력과 광기의 나날>  (세계사)  pp.1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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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4 2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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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4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하의 "사랑의 지옥"과 항상 헛갈리는 시.

사랑이란 말과 지옥, 연옥, 감옥, 이런 말은 모두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 것 같을까?
랭보의 <지옥에서의 한 철> 생각도 갑자기 무럭무럭.

94년에 이 시집, 사랑의 감옥을 산 걸로 되어 있는데 읽은 기억은 전무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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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옥 / 오규원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엄마는 털옷을 하나씩 골라
손으로 뺨으로 문질러보면서 그것 하나로
추운 세상 안으로 따뜻하게
세상 하나 감추려 한단다 뱃속의 아이야
아직도 엄마는 옷을 골라잡지 못하고
얼굴에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단다 털옷으로
어찌 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있다고 엄마가
믿겠느냐 그러나 엄마는
털옷 안의 털옷 안의 집으로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맷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리라만



오규원,  <사랑의 감옥>, 문학과 지성사 1991.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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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4 1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4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4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4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슈마리 2008-01-18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뽀 블로그에 들렸삼 ㅋㅋㅋ 블랙독 귀엽군하.

검둥개 2008-01-19 11:31   좋아요 0 | URL
아니 꽈리 사진이 더 예쁘게 나왔잖아 흥흥.
역시 꽈리가 미녀긴 미녀가 맞네 :-)
 

오분간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 버릴 生,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난다.

 

 

-『그곳에 멀지 않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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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1-10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찜 별표를 눌렀어요. ^-^

비로그인 2008-01-11 0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습니다.

검둥개 2008-01-11 0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감사합니다, 치니님, Manci님. ^^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이 부분이 아주 맘에 들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