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퍼의 구조 (김지녀)


뜨거운 계단들이 열리고 있다
나의 목까지 밀고 들어오는 진흙처럼
계단은 가장 깊은 곳까지 나를 잡아당겨 놓았다
나는 한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다
생각하는 자세로 오해받기 적당하다
그러나 지금 나에겐 어떠한 생각도 자세도 없다
움직일수록 계단들은 더 깊게 열린다
이것은 극단에 가깝지만
위에서 아래로
나를 힘껏 잡아당긴 것은 Y의 말대로, 나이다
그러고 보니 계단을 만들어놓은 것 또한 나이다
이쪽과 저쪽이 잘 맞물려 서 있는 자세에 대하여
틀어진 이를 가지런히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힘껏 당겨도 닫히지 않는 계단 앞에서
나는 기울어져 조용히 멈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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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심보선)


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털처럼 목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 있다

태양이 오전의 다감함을 잃고

노을의 적자색 위엄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달이 저녁의 지위를 머리에 눌러쓰면 어느

행인의 애절한 표정으로부터 밤이 곧 시작될 것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밖의 이런저런 것들

규칙과 감정 모두에 절박한 나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들에 젖었는지 잊었다

오늘 나는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다음 주의 욕망

다음 달의 무(無)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年度)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괜찮은 시인데, 마지막 여섯 줄은 신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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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1-16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이럴 때 재미있어요. 저도 얼마 전 이 시를 알라딘에 옮겨놓을까 싶다가, 마지막이 별로라서 그만두었거든요.

검둥개 2009-01-16 22:39   좋아요 0 | URL
히히 치니님도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찌찌뽕입니다.
잘 나간다고 생각하고 읽어가는데
역시 마지막 부분에서 딸린단 말이예요.:-)
 

 
시여 터져라 (황동규)

시여 터져라
생살 계속 돋는 이 삶의 맛을 이제
제대로 담고 가기가 너무 벅차다.
반쯤 따라가다 왜 여기 왔지, 잊어버린
뱃속까지 환하게 꽃핀 쥐똥나무 울타리.
서로 더듬다 한 식경 뒤 따로따로 허공을 더듬는
두 사람의 긴 긴 여름 저녁.
어두운 가을바람 속에 눈물 흔적처럼 오래 지워지지 않는
적막한 새소리.
별 생각 없이 집을 나설 때 기다렸다는 듯 날려와
귀싸대기 때리는 싸락눈을.
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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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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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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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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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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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9: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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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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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1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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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4: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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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0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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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유튜브에서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을 찾아본다.
이런 비디오를 올려준 네티즌에게 축복 있으라.

코러스의 우우하는 소리가 더 죽여준다. :-)


그대 나를 위해 웃음을 보여도 / 허탈한 표정 감출 순 없어 /
힘없이 뒤돌아선 그대의 모습을 / 흐린 눈으로 바라만 보네 /
나는 알고 있어요 우리의 사랑은 /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
서로가 원한다 해도 영원할순 없어요 / 저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한 /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은 /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

-- 세월이 가면 (최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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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2-12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명곡이지요? 이 곡의 작곡가 최귀섭씨는 사랑은 유리같은 것, 그옛날의 연극이 끝나면 까지 근사한 노래를 많이 만들었었는데..
이 노래가 나올때 저는 고 3이었어요. 독서실에서 세월가 가라~~하며 듣고 또듣고 ^^

검둥개 2008-02-12 11:58   좋아요 0 | URL
저는 중학생!
독서실에서는 정말이지 공부만 빼고 모든 일을 다 했던 것 같아요.
만화책 빌려다 읽고 부시닥거리면서 과자 먹고 ㅎㅎㅎ
 



언덕 위 교회당 (황인숙)


서울역 철로 위 염천교 건너면
구둣방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발목 시큰한
하이힐들이 맵시 뽐내는 가게도 있고요
구둣방들 저마다
뚜벅뚜벅 또각또각 소리 삼키고 구두들이
우직히 임자를 기다립니다
그 거리 끝 횡단보도 앞에서 보았습니다
나무들 울창한 언덕 위
뾰족지붕 교회당
오후의 햇빛 아래 나뭇잎들 일렁이고
내 마음 울렁였습니다
살랑 살랑 살랑
이대로 멈췄으면 하는 순간이 살랑입니다
신호등이 몇 번 바뀌도록 멈춰 서
언덕 위 교회당을 바라봤습니다
먼지처럼 자욱한 소음 속
우뚝 솟은 언덕 위 교회당
첨탑 끝 하늘 그 너머로
내 마음 내닫습니다
또각또각 뚜벅뚜벅
수 켤례 구두 닳도록 지난 길 되돌아가는
그립고 먼
언덕 위 교회당.


황인숙, <리스본 행 야간열차>, 문학과 지성사 pp. 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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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0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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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0 10: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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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3 1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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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4 03: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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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0 2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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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1 0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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