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 대하여 (이성복)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 싼다 숨 막혀 죽겠어 !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 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 생각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 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屍身을 밝히는 춧불들 愛人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3.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꽃 피는 날, 꽃 지는 날 (구광본)
꽃 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 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그 만남이 첫 만남이 아닙니다 그 이별이 첫 이별이 아니구요 마당 한 모퉁이에 꽃씨를 뿌립니다 꽃 피는 날에서 꽃 지는 날까지 마음은 머리 풀어 헤치고 떠다닐 테지요 그대만이 떠나간 것이 아닙니다 꽃 지는 날만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요 그대의 뒷모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나날이 새로 잎 피는 길을 갑니다
나이제 나는 나 자신의 찌꺼기인가?아직 나 자신인가?아니, 고쳐 물어보자나는 나 자신의 찌꺼기인가?나 자신인가?
쌀난리
김수영
넓적다리 뒷살에
알이 배라지
손에서는
불이 나라지
수챗가에 얼어빠진
수세미모양
그 대신 머리는
온통 비어
움직이지 않는다지
그래도 좋아
대구에서
쌀난리가
났지 않아
이만 하면 아직도
혁명은
살아 있는 셈이지
백성들이
머리가 있어 산다든가
그처럼 나도
머리가 다 비어도
언제는 산단다
오히려 더
착실하게
온몸으로 살지
발톱 끝부터로의
하극상이란다
온몸에
힘이 없듯이
머리는
내일 아침 새벽까지도
아주 내처
비어 있으라지.....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황인숙)
눈이 온다 먼 북국 하늘로부터 잠든 마당을 다독이면서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갸우뚱거리던 눈송이가 살풋이 내려앉는다 살풋살풋 둥그렇게 마당이 부푼다 둥그렇게, 둥그렇게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마당은 커다란 새가 됐다 그리고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작은 새가 내려앉는다 저 죽지에 뺨을 대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그의 잠을 깨우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