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 대하여 (이성복)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 싼다 숨 막혀 죽겠어 !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 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 생각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 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屍身을 밝히는 춧불들
  愛人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3.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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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피는 날, 꽃 지는 날 (구광본)


  꽃 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 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그 만남이 첫 만남이 아닙니다
  그 이별이 첫 이별이 아니구요
  마당 한 모퉁이에 꽃씨를 뿌립니다
  꽃 피는 날에서
  꽃 지는 날까지
  마음은 머리 풀어 헤치고 떠다닐 테지요
  그대만이 떠나간 것이 아닙니다
  꽃 지는 날만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요
  그대의 뒷모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나날이 새로 잎 피는 길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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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2005-12-24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만 보면 정은임님이 생각납니다. 갑자기 울컥하네요.
좋은 시 고맙습니다.

하루(春) 2005-12-24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목에 끌려 들어왔어요. 정은임 아나운서, 등등 요절한 사람들 생각납니다. 아 오늘은 기쁘면서도 슬픈 날이에요.

검둥개 2005-12-25 0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하루님 좋으셨다니 기뻐요. 그런데 정은임 아나운서와 이 시가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나봐요? 저는 몰랐어요...

하루(春) 2005-12-25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 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그 만남이 첫 만남이 아닙니다. 그 이별이 첫 이별이 아니고요. 제가 좋아하는 시인 구광본 시인의 시 중에서 한 구절로 오늘 시작했는데요. 시구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반대네요. 제가 92년 가을에 방송을 시작했으니까 꽃 지는 날 그대와 만났고요. 이제 봄이니까 꽃피는 날 헤어지는 셈이 되었네요. 오늘 여러분과 만나는 마지막 날인데요. 덜덜 떨면서 첫 방송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침 햇살이 남다르게 느껴지거나 책을 읽다 멋진 글을 발견할 때면 맨 먼저 떠올렸던 게 바로 이 시간이었습니다. 저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1995년 4월 1일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마지막 방송 클로징 멘트

검둥개 2005-12-29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아 그랬군요. 새삼 마음이 아프네요. 그 프로그램을 저두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사연이 있었던 것은 몰랐어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전출처 : 행복나침반 > 나 - 황인숙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찌꺼기인가?
아직 나 자신인가?
아니, 고쳐 물어보자
나는 나 자신의 찌꺼기인가?
나 자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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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난리

                                         김수영

넓적다리 뒷살에

넓적다리 뒷살에

알이 배라지

손에서는

손에서는

불이 나라지

수챗가에 얼어빠진

수세미모양

그 대신 머리는

온통 비어

움직이지 않는다지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대구에서

대구에서

쌀난리가

났지 않아

이만 하면 아직도

혁명은

살아 있는 셈이지

 

백성들이

머리가 있어 산다든가

그처럼 나도

머리가 다 비어도

언제는 산단다

오히려 더

착실하게

온몸으로 살지

발톱 끝부터로의

하극상이란다

 

넓적다리 뒷살에

넓적다리 뒷살에

알이 배라지

손에서는

손에서는

불이 나라지

온몸에

온몸에

힘이 없듯이

머리는

내일 아침 새벽까지도

아주 내처

비어 있으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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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황인숙)


눈이 온다
먼 북국 하늘로부터
잠든 마당을 다독이면서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갸우뚱거리던 눈송이가
살풋이 내려앉는다
살풋살풋 둥그렇게
마당이 부푼다
둥그렇게, 둥그렇게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마당은 커다란 새가 됐다
그리고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작은 새가 내려앉는다
저 죽지에
뺨을 대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그의 잠을 깨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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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12-02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만났다. 검둥개님~~~

저는 단풍나무 꼭대기에 앉았던,
앉았다 날아간 새의 자리,
그 구멍난 허공이 보고 싶은데
어떻게 보지요. 새는 없는데...

검둥개 2005-12-02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 .^ 와락, 부비부비.
근데 왤케 어려운 거만 물어보시는 거야요. 히잉 *^_________^;;;

플레져 2005-12-03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인숙의 시, 마지막 행은 늘... 가슴을 찌리리 하게 만들어요.

검둥개 2005-12-04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솔직히 마지막 행에서 약간 고민했어요.
뭔 뜻인지 잘 모르겠어서 ^^;;; 어쨌든 시가 좋기만은 무척 좋아요
시는 넘 어려워요.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