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채사(野菜史) /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 출처: 『현대시』, 2005년 3월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1-09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9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9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9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와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가리 징 치며
불, 불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이문재, 화전, <마음의 오지>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무래기의 약(藥)> 백석



가무락조개 난 뒷간 거리에

빚을 얻으러 나는 왔다

빚이 안 되어 가는 탓에

가무래기도 나도 모두 춥다

추운 거리의 그도 추운 능당 쪽을 걸어가며

내 마음은 우쭐댄다 그 무슨 기쁨에 우쭐댄다

이 추운 세상의 한 구석에

맑고 가난한 친구가 하나 있어서

내가 이렇게 추운 거리를 지나온 걸

얼마나 기뻐하여 낙단하고

그즈런히 손깍지 베개하고 누워서

이 못된 놈의 세상을 크게 크게 욕할 것이다

 

출전:여성(1938. 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신바람 (정현종)

내가 잘 댕기는 골목길에
분식집이 생겼다
저녁 어스름
그집 아줌마가 형광등 불빛 아래
재게 움직이는 게 창으로 보인다
환하게 환하게 보인다
오, 새로 시작한 일의 저 신바람이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송아지 (정현종)

내가 미친놈처럼 헤매는
원성 들판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세상에 나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송아지

너 때문에
이 세상도
생긴 지 한 달밖에 안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