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버스야
정현종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 시절, 텅빈 여름의 강의실에서 다른 학생들 대여섯명과 교포 선생 앞에 둘러앉아 매주 영어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나는 내 손으로 수강증을 끊어놓고도 회화 따위를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에 볼이 메었고, 강의에 가서는 신나고 활기차게 수업을 진행하는 젊은 교포 영어강사의 그 생기 넘치는 목소리에 괜시리 심술이 솟아 쩔쩔매곤 했다. 원래 명랑한 성품인 그녀는 게다가 신혼이기까지 해서 남편과의 열애담이며 깨소금맛 나는 일상도 종종 이야기해주곤 했는데, 애인은 고사하고 만만한 남자친구도 없던 내게는, 행복으로 발그랗게 달아오른 그녀의 그 얼굴이 이뻐보일 리 만무했다. 그녀가 시인이고 나무를 좋아했다면 아마 이렇게 노래했을까?

사람들이 나무 아래로 걸어온다
움직임은 이쁘구나
모든 움직임은 이쁘구나
특히 나무의 은혜여
  --정현종, "움직임은 이쁘구나 나무의 은혜여"

그렇게 읊었다면 당시의 나는 필시 이렇게 답했으리라: 이쁘기는 지랄.

기쁨의 표현, 생명의 도약, 자연의 신비, 감각의 예찬, 정현종의 시는 이 모든 것들이다. 대학 서점에 서서 읽던 정현종의 시들은 언제나 내게 낯설었는데, 그건 그 시들의 하나같은 그 좋아라, 예뻐라, 하는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어서였다. 나는 젊었고, 젊음의 몫인 불행을 내딴에는 최대한 극적으로 살고 있었다. 세상사는 다 시시하고 내 인생은 비천하다는, 저 불안한 자들의 최고로 용감한 얼굴 표정을 하고서. 그런데 오늘 책장을 넘기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런데 현재에 대한 기대를 파괴하는 자들이 있다. 마치 기대된 현재--비교적 아름답고 비교적 행복한--의 도래를 저지하는 걸 사명으로 삼고 태어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있을 수 있는 비교적 살 만한 현재를 끊임 없이 파괴한다."

어떤가, 찔리지 않는가?

"그들은 기대된 현재를 어떻게 파괴하는가. 그들은 적재용량이 많은 쓰레기차처럼 많은 오해와 편견 그리고 타성적인 잡념들을 짊어지고 다닌다. ... 그런 종류의 짐은 누구나 다소간 짊어지고 있고 그래서 그 중압 아래 있는 게 불가피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들은 그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자멸감으로부터 나온 시니시즘 따위는 우리들의 기대된 현재를 파괴할 따름이다. ... 그들은 기대된 현재를 어떻게 파괴하는가. 그들은 자신이 거세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 힘으로 남의 급소를 친다. 실은 다같이 거세되어 발길질할 불알도 없는데 신경질적으로, 매우 약삭빠른 척하고 먼저 찬다. ..." (44)

이쯤 되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삼십이 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배울 자세를 갖추게 마련이다.

시인은 젊은 시절 그를 지배했던 정서는 감동과 신비감이었다고 고백한다. (21) 눈을 씻고 기억을 돌아다봐도 대학시절 내 과거에 감동과 신비감은 흔적조차 없건만, 궁핍하기 그지없었을 전후 60년대에 청춘을 보내고서도 시인은 당시를 감동과 신비감에 싸여 지내던 시기라고 회상하는 것이다.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너무 이뻐서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거니와)
落木들의 저 큰가지들과 잔가지들 좀 보세요!
그 가지들은 하늘의 혈관이에요!
(물론 하늘의 뿌리이기도 하고
하늘의 天井畵이기도 하지만)
하여간 그 가지들은 하늘의 혈관이에요!
  --정현종, "하늘의 혈관"

아, 얼마나 불공평한가,
어떻게 해야 몸이 오그라붙게 추운 겨울날 말라비틀어진 겨울 나무를 보고도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나?

시인답게 그의 대답은, 시를 읽어라, 다.
시는 지적, 논리적 이해를 뛰어넘는 이미지의 비약과 도약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범용함이라는 그 두꺼운 천막을 찢고 유년기에 경험했던 세상과 자연에 대한 신비감과 감동을 회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을 억지로 아름답게 보는 것도 아니고, 기쁘지 않은 것을 억지로 기쁜 척 하는 것도 아니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과거에 대한 회한 없이 현재를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여진 현재는 그 자체로 기쁨이며, 튀어오르는 생명, 미래와 과거에서 해방된 환희. 그래서 시인은 매연을 뿜으며 달리는 작업복처럼 구질구질한 시내버스 안의 풍경도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여자
하나는 국화-남자
버스야 아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 든 사람이 둘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날아라 버스야.
이륙을 하여 고도를 높여 가는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정현종, "날아라 버스야"

아, 날고 싶지 않은가, 꽃다발이 아니라 밥주걱을 들고서라도?
발뒤꿈치가 새의 그것처럼 근질근질해지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는 법이 궁금한 이들은 이 책을 열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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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0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의 이 리뷰가 너무너무너무 마음에 듭니다.
두서넛 제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잠시 빌려갈게요.

'꽃다발이 아니라 밥주걱을 들고서라도!'ㅎㅎㅎ

nada 2006-06-0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로드무비님 퍼오신 거 따라 구경 왔어요. (로드무비님은 정말 알라딘의 대모 같으셔요.) 저래서 정현종을 싫어하는 데다, 별로 구원받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검둥개님의 리뷰는 정말 일품이군요. 저도 너무 마음에 듭니다.^^

검둥개 2006-06-09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맘에 드신다니 기쁜데요! ^^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은 산문집이었어요.
밥주걱도 꽃다발 만큼 아름답지 않나요 ㅎㅎ 들고 날아갈 수만 있다면야.

꽃양배추님 처음 뵈어요 ^ .^
"별로 구원받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이라고 하시는 말투가 멋지신데요 ㅎㅎ

잉크냄새 2006-06-0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젊었고, 젊음의 몫인 불행을 내딴에는 최대한 극적으로 살고 있었다."
그때 그 시절의 가슴속에 머물던 공통된 정서였나 봅니다. 리뷰가 멋지네요.

검둥개 2006-06-09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서는 비장했고, 생활은 시시껄렁했었죠.
그렇지 않았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