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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벌레 찰리
크리스토퍼 샌토로 그림, 돔 드루이즈 글, 강연숙 옮김 / 느림보 / 2003년 4월
평점 :
우리집 늦둥이 다섯 살 수영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바로 애벌레이다.
지난 5월, 효도방학이라고 며칠 쉬어주기에, 전라도에 계시는 양가 부모님을 나 몰라라 하고 경상도 토함산의 자연휴양림에 갔다.
가고 오는 게 좀 멀었지만 사람도 거의 없어서 푹 쉬다 오기엔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었는데, 휴양림 놀이터에서 수영이는 난생처음 애벌레를 눈여겨보았다.
작고 꼬물거리는 것이 처음에는 그저 징그럽기만 했는데, 갑자기 나무 위에서 툭~, 하필이면 그 넓은 땅을 두고 수영이의 머리 위로 애벌레가 떨어져버린 것이다.
속없는 엄마 아빠는 아이들만 놀이터에 두고 산책을 가버렸고, 언니 오빠는 그저 옆에서 소리만 지를 뿐 수영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우리 수영이는 거의 숨이 넘어가버렸다.
엄마 아빠가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는 어느 정도 사태가 수습이 된 후였고, 그냥 그럴 수 있는 일이겠거니 하고 넘겼던 속없는 엄마는 얼마 전, 사태를 좀더 심각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벌레들이 기승을 부리자 아파트 관리 아저씨들이 화단의 나무들에 소독약을 뿌린 모양이다. 퇴근길, 아파트 현관 입구에는 사실 엄마가 보기에도 썩 즐겁지는 않게 애벌레들이 꼬물꼬물거리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걷던 수영이는 다시 파랗게 질렸고, 그 후로는 아파트 밖만 나가면 아예 걷지를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애벌레가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 안아달란다.
결국, 아파트 앞 보행자길로 겨우 500미터 남짓 떨어진 어린이집까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자전거를 타고 수영이를 데려다 주고 데려와야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런데 지난 주, 학교도서실에 자주 오는 한 엄마가 우연히 그림책을 보여주었다. <애벌레 찰리>. 일단 책 표지와 내지에 있는 꼬물거리는 애벌레가 얼마나 예쁜지, 애벌레의 표정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그림 하나하나가 예술이다.
애벌레 찰리가 처음 세상에 나왔는데, 길에서 만난 원숭이도, 토끼도, 쥐도 모두 못생겨서 싫다며 찰리와 놀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못생긴 게 뭔지도 몰랐던 찰리는 너무너무 슬펐다.
집으로 돌아간 찰리는 외로워서 이불을 덮고 잠을 잔다(이 장면, 실을 풀어서 자신을 돌돌 싸서 침낭처럼 속으로 쏙 들어가는 게 얼마나 예쁜지...).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꽃피는 봄이 되자, 찰리가 그 이불 속에서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무지개빛 날개가 솟은 것이다.
아름다운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데, 지난 번 애벌레일 때 보았던 원숭이며 토끼며 쥐들은 아름다운 나비 찰리와 놀고싶어 한다. 그러나 겉모습만 보고 좋아하는 그들은 진짜 친구가 될 수 없다면서, 이번엔 찰리가 외면한다. 그리고 못생겨서 따돌림을 당한다며 울고 있는 애벌레를 만나게 된다.
찰리는 그 애벌레를 물가로 데려가서 안고 물 속에 비친 모습을 보여준다. 애벌레와 찰리가 겹치면서 마치 애벌레의 등에 찰리의 날개가 달린 것처럼 아름답게 보인다(이건 설명이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나온다. 아이가 발견하고 즐거워한다.). 그리고 애벌레에게, 너도 이렇게 아름답게 될 거라고, 그러니 슬퍼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퇴근하자마자 알라딘에 들어와 책을 주문했다. 그리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일찍 도착한 책을 들고 수영이에게 읽어주었다.
처음에 수영이는 제목이 애벌레 찰리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외면하고는 저리로 가버렸다. 난 개의치 않고 그냥 큰소리로 읽었다.
두세 페이지 넘어가니 어느새 수영이는 내 곁에서 책을 보고 있다. 다 읽었더니 벌써 엄마의 심리를 파악한 수영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래도 그때 내 머리에 있었던 애벌레는 나쁜 애벌레였어.'
라고 항변한다. 길게 설명해봐야 아이의 방어심리만 자극할 것 같아서, 그냥
'그랬어?'
하면서 무관심하게 굴었다.
재미는 있었든지 그 책을 이리 넘겨보고 저리 넘겨보고 하던 수영이, 오늘은 아침에 출근하는데(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갑자기
'엄마, 애벌레 다 어디 갔어?'
라고 묻는다.
'몰라. 사람들이 못생겼다고 싫어하니까 실망해서 숨어버렸나 봐. 잠 푹 자고 일어나면 아마 날개가 돋아서 나비가 되겠지.'
라고 대답해주었다.
수영이는 벌써 나비를 찾으려고 고개를 두리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