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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비
윤정란 지음 / 차림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아이들과 함께 사극을 보면서 걱정되는 것은, 과연 이 아이들에게 사극이 교육적일까 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내용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야말로 스폰지처럼 쉽게 흡수하는 내 아이들에게 이런 내용이 교육적일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악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처음 했던 것은 몇 년 전,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를 볼 때였다. 아직 우리 애들은 어리고, 대학생이던 도련님과 남편,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용의 눈물을 보고 있었는데, 도련님이 "여자가 저렇게 설치니 친정이 다 망하지..."라고 얘기를 했다. 최명길이 분했던 원경왕후 민씨를 보고 한 얘기였다.
유동근이 분했던 태종 이방원이 첩들을 거느리고자 하지만, 정치적 동반자였던 민씨는 그것을 보고 투기하는 장면이었다. 최명길의 연기가 너무 리얼했던 탓인지 아니면 유동근의 뻔뻔한 연기가 너무 인간적이라 느꼈던지, 사람들은 대체로 민씨의 투기가 잘못된 것이라고, 그래서 태종이 처가 식구들을 모두 친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태종이 그렇게 했던 것은 왕권을 강화시킬 목적에서였다. 태종이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두 번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가며 왕이 되기까지 민씨 가문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그의 아내는 물론이고 처남들까지 목숨을 걸고 그를 도왔다. 그 결과 태종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이 되고 나서 태종은 왕권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하고 나설 때 마음이 서로 다르다지 않는가.
외척을 물리칠 요량으로 끊임없이 민씨를 자극했던 태종은 계획대로 처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유교적인 명문가 출신이었던 민씨가 꿈꾸었던 정치적인 동반자로서의 관계,더 나아가서 연합 정권의 꿈은 과거의 동지이자 남편이었던 이방원에게 철저히 배신당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리고 오히려 질투심 많은 아녀자로 몰리게 되었다. 정권욕과 결단력이 강했던 여걸 민씨는 결국 태종의 권력욕까지 뒤집어 쓴 채 6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가리운 채, <용의 눈물>만 본 아이들은 그저 여자가 덕도 없이 권력욕만 있어서 결국 친정이 멸문의 화를 당한 것으로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사실 도련님이 그렇게 얘길 할 때 나도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아무리 시대가 그랬다지만(사실은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여성의 지위가 지금보다 나았다) 남편이 다른 여자하고 저렇게 당당하게 놀아나는데, 눈 뒤집어지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느냐'고 얘기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읽게 된 <조선의 왕비>. 이 책을 읽고 나는 땅을 쳤다. 내가 그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도련님과 남편을 논리적으로 설득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단지 드라마 작가의 관점에 의해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그 후로 때를 노리고 있지만, 어찌된 게 요즘 사극은 고려시대이고, 게다가 차분히 앉아서 사극을 볼 만한 여유가 사라져버렸다. 결정적으로 지금은 도련님과 함께 살지도 않는다. ㅠㅠ
<조선의 왕비>는 철저히 왕비의 관점에서 조선시대를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태조의 왕비였던 강씨부터 마지막 왕비였던 순정효황후 윤씨까지, 기록이 남아 있는 왕비와 후궁들의 이야기이다. 숙종의 비였던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 왜 희빈 장씨는 왕비가 되기 위해 극악을 떠는 요부요 악녀여야 했으며, 인현왕후는 어떻게 그렇게 부덕을 갖춘 완벽한 여인이었는지, 과연 희빈 장씨는 단순히 악녀였기 때문에 사약을 받고 죽었는지, 정말 그렇게 악녀였는지, 어쩌면 철저히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서 봤을 때 악녀의 모습이 아니었는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주는 책이다.
사극을 보면서 빠질 수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작가의 시각이 아닌 나의 시각으로 역사를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