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수 애장판 1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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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책, 우리 주위를 맴도는 거의 대부분의 책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어제 읽은 느낌과 오늘 읽은 느낌과의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걸리버 여행기가 어린시절에는 흥미진진한 모험이야기로, 차차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는 인간 사회에 대한 반성과 의문으로 이어지듯. 그러기에 독서의 의미가 1회용에 그치지 않고 계속 무한히 늘려 나갈 수 있는 가치있는 행위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런 의미를 모두 알기에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저 책에서 이 책으로 끊임없이 순례의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런 독서의 '헌법 제 1조'에 종종 예외가 되는 이가 있으니 보통 만화라는 장르의 왕국이 바로 그 불명예의 주인공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독서는 그 의미가 배가 된다고 하지만 만화를 오래 잡고 있으면 보통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만화니?' 라는 질책을 듣기 쉽상이다. 덕택에 나의 책장에 있던 만화책들도 부모님의 폐기처분이라는 협박편지에 그만 비명횡사를 해 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적어도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며 눈에 들어오는거지만 만화가 꼭 그렇게 평가절하 될 대상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어릴 때는 그저 흥미용이요, 눈요기거리가 조금의 성숙기를 거친 눈에서는 보이지 않던 의미와 그 속의 깊은 뜻을 깨닫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의 예로써 난 이 <기생수>를 들고 싶다.

<기생수>, 외계에서 기생생물이 내려와 인간의 몸을 파고들어 뇌를 독식해 그 몸을 자기가 조종한다는 기본설정으로 시작된다. - 점령당한 인간은 영화 '맨 인 블랙' 속의 외계인을 떠올려도 될듯하다. - 하지만 주인공에게는 약간의 예외가 생겨 인간과 기생수가 공존을 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이런 완전히 기생되지 않은 - 인간과 기생수와의 공존이라는 중간적 존재와 인간을 제대로 독식 해버린 완전한 기생수와의 대립으로 이야기는 졸졸 흘러 나간다.

이 기생수가 그저 흥미용으로만 귀결되지 않고 그 의미에 점수를 줄 수 있는 출발점은 일단 인간의 본성이라는 동정, 희생, 사랑의 정신이 전혀 없는 기생수와 모든 인간적 감정을 지닌 주인공이 한 몸에서 공존하는 배경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주인공이 가지는 따뜻한 - 즉 인간적이라는 감정과, 모든 감정이 결여된 기생수의 자기중심적 냉혈사고의 공존이 지니는 실 의미는 사실 인간 내면에 속혀있는 서로 다른 감정들의 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을 죽이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 요즘의 세태, IMF이후 인간중심의 사회인지 돈의 중심사회인지가 구분이 가질 않는, 친환경적 개발이란 명패만 멀금히 걸어놓고 뒤로는 이익부터 챙기는 실태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하는 행동과 기생수들이 지니는 자기이익중심적 생각, 행동들과 - 즉, 인간이라는 의미가 퇴색해가고, 다시금 되살려야 할 수준으로 치달은 현재와 너무 맞닥들여짐에 독자는 부끄러워 질지 모른다. 나중에 기생수들이 보이는 희생이라는 감정에 독자들은 더욱 혼란스런 부끄러움을 느낄지 모른다.

기생수들이 인간의 뇌를 맨처음 점령했을 때, 떨어졌다는 뇌의 마지막 명령. '인간들을 모두 잡아 먹어라!' 나는 그 대목에서 - 물론 여교사의 말, 시장의 말도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지만 -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생각이 너무 단순히 드러나 파헤치는 묘미는 없을지 모르나 오히려 그 솔직히 드러남에 더욱 인상을 깊게 받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기생수>는 약간은 잔혹한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심히 징그럽기까지는 않다. 사실 주인공과 공존하고 있는 기생수는 <원피스>처럼 쭉 늘어나기도 변형도 되지만 '오른쪽이'라는 이름만큼 되게 귀여워 보였다. 아무런 생각없이 한여름밤의 흥밋거리로 즐기더라도 너무도 진솔히 드러나는 휴머니즘과 반휴머니즘의 대립, 그리고 화해는 이런 만화도 있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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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 바깥의 소설 25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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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과 과거사이에 사람이라는 존재와의 괴리. 흔히 옛날과는 다르다고 한다. 물론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 무엇도 없기에. 하지만, 사람의 곱다고들 하는, 맑다고 하는 심성만큼은 과연 모든 것이 변한다는 공식의 틀을 따라야 하는지 의문이다.

이런 과거와 현재의 괴리는 과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순수란 존재와의 결별로 인해 생기지 않는게 아닌가 한다. 그림자란 무엇인가? 밝은 날이면 언제나 우리 주위를 맴돌며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나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 존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보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처럼 그림자를 잃어 버렸다고 생각해보자. 뭔가 허전하다. 도무지 뭔가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이 없을 때 나타나는 공허함. 그 공허한 장면 -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공간에서 항상 나를 그늘삼아 숨쉬던 그림자 없이 홀로 서 있는 외로워 보이는 한 인간.

이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사라져 버리더라도 생에 지장은 없지만 뭔가의 공허함을 주는 것들이 항시 있다. 그런 그림자 같은 존재의 무리들 중 우리가 저 멀리 잃어버리고 온 것. 바로 순수 - 언제나 세상을 밝게 바라만 볼 수 있는. 우리의 삶은 그동안 순수라는 그림자를 잃고서 살아왔기에 바쁜 일상 속에서도 뭔가가 항상 텅비고 모자라다는 느낌을 받아 왔고, 또 그 느낌 때문에 과거와의 괴리감을 느낀다고 여겨진다.

<내 생애의 아이들>은 이렇게 우리가 잃어버리고 왔던 그 순수가 무엇이였는지를 초보 초등학교 교사와 그 교사의 품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다듬어지지 않은 천사, 아이들을 통해 보여주었다. 왜, 아이들만이 볼 수 있다는 세계가 있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 아이들만의 눈에 비친 세상. 사실은 우리가 순수란 그림자를 가지고 있던 시절의, 그 때 그 시절에 볼 수 있었던 그 자체의 꾸밈없는 세상 이야기. <내 생애의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너무나 따뜻하게, 소박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었다.

읽기에도 부담이 없게 짧은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특히 마지막 부분의 단편이야말로 정말 이 책의 으뜸이라고 꼽고 싶다. 깨끗하기만 하던, 세상이라는 담배라고는 한번도 들이켜 본 적이 없던 순수한 소년을 사랑, 방황, 때묻음, 정화라는 과정으로 우리에게 따뜻함을 전해 주는 그 마지막 단편 - 메데릭이란 소년이 주인공인. 그 단편이 정말 이 책의 마지막의 아쉬움을 적절히 달래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또 단편들만 이어지다 보면 밋밋한 느낌으로 책을 마감할 수도 있는 상황을 그 단편이 말끔히 마무리지어준다.

'성인 속에 아이가 되살아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인데 비하여, 어찌하여 어린아이의 얼굴 속에 성인의 모습이 배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 그리도 가슴을 아프게 한단 말인가?'란 문구가 작가의 저 밑에 깔려있던 어린시절에 인간이 간직하던 순수에 대한 생각을 대변해 주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가끔은 우리가 지녔던 그 순수의 자취를 찾아보는건 어떨까? 물론 커버렸다는, 이제 삶을 조금씩 알아간다는 우리들의 태반은 그 흔적도 찾기에 힘이 벅차겠지만, 그래도 한 때는 또 다른 나 자신을 지녔던, 그 때를 한 번 떠올리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그 만큼의 삶을 더욱 값지게 만들어 주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게 하지 않을까 한다.

과거란 두툼한 벽 저 너머 두고 온 나의 어린시절은 어디에 고이 잠들어 있을까..? 그 때 가지고 있던 나의 순수는 과연 저 휑휑한 벽 너머에 펼쳐져 있는 광활한 대지 속에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을까? 혹시 어딘가에 있을 나의 어린시절 속에서 또 다른 나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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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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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보아왔던 큰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 두터운 줄기와 수많은 가지, 그리고 대롱대롱 나 보란듯이 달려있는 잎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햇빛을 내리 쬐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곳은 고향의 시골집 마당이 아니라 고층 빌딩의 옥상이라 한 번 생각해 보자.

딱따구리가 한 그루의 나무에 올종망종 뚫어놓은 무수한 구멍들. 그 조그마한 어두운 구멍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번 들여다보았더니, 어두컴컴한 그 속에는 우리의 삶들이. 우리 자신들의 나날의 일상이 보인다고 생각해 보자. 음. 그럼 보고 있는 나는 뭐가 되는 거지?

흔하게 겪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사고의 틀을 조금만이라도 비틀어 탈피해 보면 나타나는 이런 아이러니컬한 이미지들. 우리는 그런 일상을 벗어나는 이미지를 상상이란 단어의 광주리 속에 고스란히, 고이 모아서 담아둔다.

상상이란 그 자체는 우리의 두뇌를 실로 유쾌하게 만들어준다. 나 자신이 하든 그 누가 해놓은 것을 같이 공유하든지 간에 상상이라는 그 자체는 무겁고 빽빽한 삶 속에서 우리에게 잠시의 여유를, 짓눌려 체증을 일으키는 가슴을 얼마동안은 가벼이, 상쾌히 만들어 준다. 힘든 작업 뒤 잠깐의 커피타임이 우리의 몸을 편안히, 왠지 모를 안락함을 안겨주듯 상상이란 매일의 일상이란 족쇄에 포박 당해 있는 우리의 뇌를, 마음을 잠시나마 훨훨 자유로이 만들어 주는 기특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유쾌한 상상이란 것도 막상 내가 하기에는 뭔지 모를 막막함이, 불편함이 따른다. 생각하자니 막상 묶여 있는 머릿속에 자유로이 떠오르는 건 없고, 해서 무엇인가를 보며 자신의 생각의 조임을 조금이나마 느슨히 만들고 싶은데.., 무엇인가가 나의 마음을 자극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무엇인가가 어디 없을까하는 흔한 코스로 겪을 법한 방황. 그 방황 속의 한 컷에 이어지는 다음 장면은 오히려 지금의 나 자신의 위치를 더욱 무료하고 힘들게, 또한 한심하게 만들뿐이다.

그런 귀차니즘과 막막한 시스템 속에 돌아가는 자신의 두뇌체제에 적잖은 윤활유가 되어 줄, 그런 두뇌체제의 막막한 벽을 과감히 무너뜨릴 망치가 되어 줄 것으로 나는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추천한다.

20여 편의 베르나르의 단편이 실려 있는 <나무>. <나무>의 각 작품들은 하나 하나가 정말 기발하고 눈을 번뜩이게 한다. '아. 그래.' 라는 감탄사와 함께 깨소금같이 쏟아지는 기발함은, 그 기발함이라는 하나의 대상만으로도 읽는 이를 충분히 유쾌하고 상쾌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음이 간다. 같은 인간의 두뇌라지만 어떻게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런 상상으로 우리를 다시 구성할 수 있을까? <나무>를 읽으면서 드는 작가에 대한 이런 경외심은 존경의 38선을 넘어 점점 질시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18개의 정말 기발한 상상력과 함께 하나하나 인간 세상에 대한 반성적 질문 역시 던지게끔 하는 단편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 하나씩만 머릿속에서 오물거려도 컵 속의 그득한 아이스크림이 알게 모르게 입안으로 실종되어 버리듯 너무나 쉽사리 줄어들어 버리는 아쉬움을 겪을 게다. 게다가, 그 아쉬움이란 것이 재미라는, 반성이라는 테마와는 별개로 너무나 절박하고 애절해서 아마 그 아쉬움 속에서 또 다른 즐거움의 맛을 경험하게 될 터이다.

재미와 아쉬움. 그리고 그 끝에 나만의 사색의 공간을 남겨주는 '상상'이란 곳. 그리고 그 '상상'이란 곳의 가이드가 되어 주는 <나무>. 그곳은 피서지를 물색하고 있는 요즘의 많은 이들에게 또 다른 좋은 피서지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한다. 몸만 피서를 한다는 것이 어디 진정한 피서던가? 가끔은 이처럼 생각의 피서지도 다녀올 법하다. 이번에는 우리의 머리도 잠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휴가기간을 줘 보는거다. 혹시 아는가. 베르나르처럼 머리가 시원해(?) 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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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림원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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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아픔, 또는 추억이라 불리는 그 풋풋한 알맹이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지니고 있지는 않을까? 일반적인, 보통 '우리'라고 불리는 평범한 집단의 뭉텅거리 속에서의 알맹이들은 보편이라는 그 집단이 피해 가지 못할 공통의 소속증은 아닐까? 결국은 누구나가 사랑을 하게 되고 이성을 그리워하게 되기에, 누구나 단단히 조여있는 가슴의 뚜껑을 열어 보면 그런 추억들은 다들 하나씩 고이 맺혀 있지는 않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물론 그것이 아직도 촉촉히 생맹력을 지니고 있는지 말라 비틀어져 바스라져 버렸는지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가끔, 솔로의 비탄에 잠기다 보면 사람은 왜 본능적으로 이성을 그리워하게 되는지... 난 이성적인 인간이라 자부하는데 왜 본능 따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런 추억의 주머니를 지니고 있는지, 또 왜 그 주머니를 버리지 못하고 가끔씩은 열어보는지...라는 자괴감에 빠져들곤 한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하지메도 마찬가지로 시마모토라는 첫사랑의 기억의 편린을 조용히 소유하고 있다. 바쁜 일상 덕택에 자신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그 기억의 편린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지만 어느덧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점점 자신의 알맹이를 잃어가던 하지메는 어느 순간 자신의 무언가가 텅 비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곤 드디어 자기 깊숙이 숨겨져 있던 그 기억의 덩어리를 발견하고 만다. 가슴속의 시마모토를 그리워하곤 만다.

자신의 텅 빈 일상을, 아니 텅 빈 자신을 시마모토만이 유일하게 채워줄 것이라 믿는 하지메는 가슴속에 조용히 살아 숨쉬던 그녀를 이제는 강력히 소유하려 든다. 하지만 사실 하지메는 그녀를 소유하기보다는 오히려 소유욕에게 소유를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빈공간 일부를 반드시 메워야 한다는 심한 자괴감에 소유욕은 점점 더 강해지지만 그럴수록 하지메는 더욱 일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잃어간다. 그러다 결국은 근원의 상실감을 느끼며 이제는 빈 껍질만 남아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빈 껍질의 자신과, 소유하려 하지만 결국은 상실되고 마는 하루키의 언어를 보고 있으면 언젠가 하루키의 소설을 보고 자살을 했다는 뉴스가 떠오르곤 한다. 사실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하루키의 상실과 허무의 코드는 그 색채가 강하다고 볼 수 있겠고 또 사실 나 자신이 느끼는 상실과 허무의 코드 역시 그 위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하루키의 어느 소설도 주인공인 나 자신마저 현실을 쉽게 버려 버린 적은 없었다. 일상 속에서 허무와 상실을 느껴 그곳을 탈피하려 하지만 언제나 나 자신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곤 한 것이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역시 자신의 상실감을, 자신의 빈 껍질을 채워줄 알맹이를 결국에는 현실에서 찾으려고 한다. 결국은 현실로 돌아오는 나 자신인 게다. 그런 매력에서 난 상실 속에서의 희망을 발견하곤 하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런 매력이 하루키의 매력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런 매력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매력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번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아니었다면 손조차 되지 않았을 법한 통속적인 사랑이야기의 소재로 이야기가 달리고 있다. 하지만 인간 근원의 불완전함으로 인한 고독감과 상실감을 뿌옇게 뿌려준 작품 전반의 풍경은 은은한 생각의 쇼파로 나를 데려다 주었기에 이야기 끝까지 같이 내 달릴 수 있었는지 아닌가 한다.

첫사랑의 아련한 국경의 남쪽과 현실을 잃어가는, 나 자신을 잃어가는 태양의 서쪽. 나는 그동안 어디에서 어디로 걸어오고 있었을까? 지금의 나의 위치는 어딜까? 남쪽의 아련한 희망과 서쪽의 허무한 상실과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내가 잠들어 있는 그 곳은 어딜까라는 물음을, 책을 덮으며 지그시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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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돌리노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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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건 끊임없이, 언제나 흐르며 또 재해석된다. 폭군, 혼군으로 불리우던 광해군이 뛰어난 왕으로 재해석을, 정여립의 반란이 정치적 모략이 아니였는가하는 재해석이 등등. 역사는 언제나 그 자체로 머물지 않고 재해석되며 재구성되어 왔다. 그런 시각 속에서 이런 사고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역사적 사실 속에 우리에게는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또 다른 어떤 사실, 사건이 있지는 않을까? 바로 이런 시각 속에서 쓰여진 것이 움베르트 에코의 <바우돌리노>다.

<바우돌리노>. 괜찮은 소설이었다. '움베르트 에코 = 많은 지식을 요하며 독자들에게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라는 공식에 어느 정도 수정이 가해진 듯한 소설이었다. 나처럼 중세 십자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사람도 책을 읽는 중간 중간에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조금씩 그 시대에 관한 지식을 습득해도 소설의 진행에는 별반 어려움을 겪지 않을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요 내용은 십자군 3차원정 때 익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프리드리히 1세란 사실적 인물과 '바우돌리노'라는 역사적 허구의 인물이 융합되어 얽혀 전개되는 것이다. 이 역사적 사실 속에 허구적 인물을 그려넣어 부드럽게 전개해 나가는 에코를 보면 작가의 실력이 정말 돋보인다는 느낌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세 우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키메라, 누비아, 스키아푸스, 등등의 등장은 마치 신화 한편을 읽는 듯한, 소설을 읽어 나감에 있어 흥미진진함을 던져주었고 터키의 괴뢰메 국립공원의 역사적 배경과 모습을 토대로 '픈다페침'이란 공간을 연출해 냄은 경이감마저 들게 해주었다.

중세 십자군 전쟁이라는 다분히 짙은 기독교적 배경을 지닌 <바우돌리노> 이지만 이 책에서의 종교적 색채가 가지는 비중은 크지 않았다. 덕택에 종교로 인한 거부감은 들지 않을 터이다. 혹시나 어렵지는 않을까, 다소 읽기 버거운 작품이 아닐까, 종교적 색채가 강한 작품은 아닌가하고 고민하고 있으신 분들에게 큰 어려움 없이 권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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