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조선야사
김형광 엮음 / 시아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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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야기 야사`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은 책이다. 비록 정사가 아닌 여러 이야기를 실어 놓고는 있지만 야사만이 지니는 흥미나 호기심이 일만한 글들은 아니었다. 그리고 작가는 정사와 비교해 가며 읽으면 재미가 있을거라고 호언장담하지만 정사와 비교해 가며 읽을거리는 거의 없었고 작품 그 자체만으로 끝나는게 대부분이었다. 박재고개라든가 옥외춘 등. 실 정사와는 거의 무관한 그런 작품은 그 자체로써의 의미가 있는 작품들이었지 정사와 비교해 가며 그것을 파헤치는 재미는 없었다는 것이겠다. 잠시 시간 날때나 지루할때 훑어 볼만하지만, 정사와는 다른 면모를 보기위해 정식으로 읽기에는 많이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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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숲 1
신영복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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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본절판


<더불어 숲>은 신영복님이 세계 여러 곳을 여기저기 두루 방문하며, 각각의 곳에서 사색의 정취를 시나브로 묻어 나오게 남겨놓은 기행작품이다. 비록 작가의 개인적인, 감상적인 사색이지만 이번의 사색은 경치에 대한, 자연에 대한 한가한 경탄의 사색이 아닌 곳곳의 장소에서 묻어 나오는 의미와 시대의 관계를 적절히 조화시킨, 일면 완상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시대 고찰적인 그 만의 사색이었다.

특히 작가는 아무 곳에나, 내키지 않아도 유명하다는 명패하나만 홀린 듯 쫓아 간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 친화적이거나 번영을 누렸던 고도(古都), 또는 현재 아주 발전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나라들을 찾아다니며 그 곳의 현주소와 앞으로 미래에서의 대응, 즉 과거와 미래와의 끊임없는 관계에서 현실의 의미를 주목하고 있다. 그 관계는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대한 질문이었고 나아가 우리나라 현실에 대한 고찰, 더 나아가 세계가 지향해야 할 위치와 방향에 대한 작가의 고뇌이자 안타까운 시선으로 우리에게 뱉어내는 충고였다.

파리의 노상카페에서의 변화, 터키의 조화로운, 융합적인 자세, 일본의 복잡하면서도 질서 잡힌 모습들. 네팔 히말라야에서의 자연에 대한 숭배의 자세. 등등. 흔히 우리가 `우와`란 감탄사 한 발에만 족하고 지나치던 곳에서 신영복 작가는 우리의 보잘 것 없는 감상을 벗어난 진정한 그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는 거였다.

지구는 둥글지만 결코 세계는 둥글지 않았다. 소위 문명과의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있는 나라와 문명과 절교 중인 나라들. 하지만 그 속의 문화란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었다. 진정한 문화란 사람들의 바깥에 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성 속에 씨를 뿌리고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성숙해 가는 것이라 강조한 작가는 세계 각처를 돌아다니며 그 나라의 문화들을, 그리고 그 문화에 상대적으로 위치한 우리의 현주소를 고찰했다. 비록 안타까운 현실에 있더라도 한결같은 희망이, 꿈이 있다고 속삭이는 작가는 설령 지금은 암울할 지라도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밤이 깊으면 별이 더욱 빛나기 때문이라는 말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더불어 숲>. 더불어 숲은 시인 고은님의 `어떤 진실은 그것이 고백을 닮을 때 더욱 절실하게 됩니다.`라는 문구로 그 소박한 여정의 길을 활짝 열었고 이제 기나긴 노정의 바느질에 매듭을 매었다. 언제나 경어체로써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히, 언제나 예스러운 표현으로 보는 이를 감상적이게 만드는 신영복님의 글. 그 글은 이제 시대에 대한 고백이라는 짐을 하나 더 얹음으로써 나직히, 그리고 더욱 절실하게 우리의 고막을 울리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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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일요일. 어김없이 11시의 기나긴, 힘겨운 고지를 넘기며 -고생했다 위로하며, 부스스한 눈으로 여기가 어디인지를 멍하니 생각한다. `내가 몇 시 잤더라?` 아침도 귀찮고 아무 생각없이 침대에 앉아 주위에 시선의 화살이나 마구 날려본다. 도저히 창문과 문을 구분할 수 없게끔 어지러이 잘 정돈된 나의 방. 그 모습이 나의 눈에 버릇없이도 걸어들어오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조차 귀찮아진다. 방청소도 하고, 환기도, 세탁도 해야 할 텐데..귀찮다..귀찮다. 정말 귀찮다. 푹~ 다시 쓰러지는 사려깊은 몸.

삶의 일상은 이처럼 매번 겪으면서도 때론 지루할 때가 있다. 아니, 매번 겪어서 지루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 지루함이란 자신의 게으름의 사생아라 굳게 여기며 이제는 안 그래야지, 이제는 안 그래야지를 반복하지만 그 반복의 끝은 무얼 생각하며 바지런히 걷고 있는지 그 모습을 보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 자신에게 때아닌 실망을 하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힐끗 보며 지나가는 이가 있다. `여보쇼. 이름이?` `나? 호어스트 에버스라 하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는 호어스트가 소극장의 낭독을 목적으로 쓴 작품들 중 일부를 모아 놓은 것이다. 비록 남에게 들려주고자 자작한 이야기지만 그 자체는 호어스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픽션이면서도 논픽션인, 일상적이지만 일탈적인 이야기들로 가득차 넘실넘실 넘치고 있다. 그 번뜩이는 이야기, 그 마구 쏟아지는 이야기들로 우리의 눈과 귀에도 이미지들이 원 없이 넘치게 된다.

호어스트의 삶. 그의 삶은 게으름 자체, 게으름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삶을 보고 있으면, 양치질을 하면서 손은 가만히 있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해도, 커피 타 먹기 귀찮아 커피를 씹어먹고 조금 후 뜨거운 물을, 후식으로 설탕을 먹었다 해도 거짓말이 아닐거란 생각이 들게 한다. 차마 내가 하기에는 게으르고도 나태한 그 삶. 하지만 왠일인지 호어스트가 하고 있는 걸 보면 절로 유쾌해 지며 절로 웃음이 나온다.

사실 책을 읽으며 킥킥대며 웃기란 쉽지가 않은 법이다. 그저 속으로 미소만이라면 모를까, 옆사람이 의심의 눈길로 나를 쳐다볼 수 있게끔 킥킥대기란, 웃음을 참지 못하기란 힘든게 사실이다. 더군다나 우리와 정서상으로는 다소 이질적인 서양의 대치적 입장에서라면 말이다. 하지만 호어스트, 그는 과감히 그 룰을 깨버린다. `당신, 책을 보며 웃지 않는다고? 흠, 잠깐 이리 와보지. 동양인? 아, 글쎄 일단 와 보라니까.`

월요일부터 일요일에 이르기까지 삶의 에피소드들. 전화요금 할인제만을 믿고 새벽에 전화를 하는 에피소드, 맹장염 수술에 관한 에피소드, 자기 뇌 속의 한판 축구의 현장, 이사 에피소드 등등의 쉼없이 펼쳐지는 에피소드들. 호어스트의 삶에 내재하는 그 에피소드들은 정말이지 유쾌하다. 쉴새없이 키득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책이 이렇게 유쾌해도 되는지 지체없이 반문을 던져본다.

원래 방랑이란 보기에는 낭만적이라도 당사자에게는 항시 서러운 다리운동인 만큼, 호어스트의 삶도 보기에는 유쾌해도 막상 내가 그런 입장이라면 무기력의 표본실이 될게다. 하지만 이런 게으르기만 해 보이는 그의 삶도, 그 나름의 가치의 목소리를 지닌다. 언제나 우리 일상의 밖에서 뻘뻘 땀 흘리며 달음박질을 치고있는 바로 일탈이라는 목소리 말이다.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 바지런히 동으로, 분주히 남으로, 눈코 뜰새없이 생활하는 우리들에게 호어스트, 그는 그저 옆에 멍하니, 여유롭게 서서 우리를 탓하고 있다. `다들 왜 저리 쉴새없이 바쁜거야? 할 일은 잠시 미뤄두고 지금을 생각해 보라구. 잠시라도 일상을 벗어나 보라구.` 그래,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이 아니다. 금요일에만 가질 수 있는, 이제 곧 주말이라는 밝고 가벼운 기대. 세상은 항상 금요일이 아니기에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이, 아니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호어스트 에버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였을까? 안돼면 자우림의 `일탈`이라도 내 질러 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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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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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 하루키의 소설. 매력적이다. 이상적이다. 진지하다. 흥미롭다. 이해가 가능하지만 이해가 불가능하다. 아이러니다. 하루키 작품속의 인물들은 언제나 진지하고도 이성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그 주제는 언제나 비현실적 또는 이상적인 것이다. 이런 소설 속 인물의 대화에서 독자는 나른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매력에 빠지게 된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타고 올라올 동아줄 하나쯤은 마련하는게 좋을터다.

접근 : 스푸트니크의 연인. 물어보지 않아도 하루키의 소설이란 것을 알 수 있을 만큼의 적당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명함을 여기저기서 들이민다. 언제나 진지하며 막힘 없는 생각과 언변의 소유자인 `나`와, 정상적이지만 비정상적인, 이성적이지만 이상적인, 그리고 결코 연인이 될 수 없는 여자친구 `스미레`. 거기에 자기 자신의 반을 잃어버린,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린 중년의 여성 뮤. 모두가 하루키식 제조법에 의해 창조된 인물들이다.

접촉 : 스미레는 동성애자다. 뭐 그렇다고 거부감 느낄건 없다. 그녀는 연상의 같은 여자, 동성인 뮤를 사랑한다.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면에서도. 그리고 그 사랑에 집착한다. 뮤 역시 스미레를 좋아한다. 단 이성적인 감정은 없다. 당연하다. 일단 그들은 동성이니까. 하지만 뮤는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뒤로,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감정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좀처럼 가지기 힘들다. 그 미묘하고 복잡한 사이 `나`는 파고들 자리가 없다. 이대로 끝나 버리는가 보다.

대화 : 기호와 상징의 차이가 뭐야? 어느날 나에게 문득 던진 스미레의 질문. 새벽 3시. 질문에 화답을 던진뒤 잠으로 기어들어간다. 후에 다시 만나게 된 스미레. 그녀는 스미레지만 겉은 또 다른 스미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분열 : 어느날 스미레는 뮤의 반쪽, 또 다른 뮤가 있는 그 이상적인 세계로 떠나 버린다. 그리스의 한 외딴 섬에서, 뮤가 자신의 반을 소리없이 잃어버리듯 스미레도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스미레를 찾아 나선 `나`, `나` 역시 `나`와의 일탈을 경험하며 과연 내가 위치하고 있는 그 자리가 어딘지에 당황하게 된다. 뮤가 자기자신의 반을 잃어버린 현실 속에 존재하는 완전체인 나. 존재하는 자아와 존재스럽지 못한 자아. 여기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나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해체 : 모두가 자기자신을 되찾기 위한 궤도에 끊임없이 진입한다. 결국 스미레는 또 다른 뮤와 조우를 했을까.. 마지막의 스미레는 진정 스미레인가.. `나`가 존재하는 이 세상. 이 세상이 과연 제대로 된 존재의 의미를 지닐까. 그리고 현실계게의 나도 과연 진정한 나로써의 의미를 지닐까?

소멸 : 사람이 맞으면 피를 흘린다. 당연한 이치, 당연한 논리와 같이 당연히 존재하고 있는 나, 그 당연한 나를 찾기 위한 당연한 세상의 조건들은 비박스럽다. 오로지 한 길은 영원한 꿈을 꾸는 것. 하지만 영원한 꿈을 꾸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현실성과 자아와는 대립의 관계에 있었던가....

흔적 : 스푸트니크의 연인, 자아를 찾기 위한, 나의 자아와 그들만의 자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스푸트니크처럼 외로이 자기만의 소우주를 떠다니는 우리의 자아들. 그 외로운 행로 속에 잠시 궤도를 같이 하는 다른 스푸트니크의 자아를 우리는 인연이라 부른다. 하지만 다소 어렵다. 그저 흐름의 길모퉁이를 터벅터벅 걸어다니기에는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리고 대화 하나하나에 다소 많은 이해의 신경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역시 하루키스럽다. 하루키 팬들에게는 하루키스러움이 가장 큰 요구사항일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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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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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기행이라는 놈과 대하고 있자면 그 속에 장황히 펼쳐지는 -오솔길하나, 잠시 앉았던 돌덩이 하나- 그 모든 것이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동시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아도 변함없는 나의 고정불변한 위치에 안타까움이 치밀어 오른다. 무료한 일상에서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픈 욕구를 울컥 솟게 만드는, 시덥잖은 구석에서 드러누워 책장을 넘기는 나에게,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게 싶게 하는, 도발적이지만 유쾌한 매력의 솜덩어리 기행. 그 매력은 나의 모든 정신을 스멀스멀 흡수해 버린다.

<나를 부르는 숲>은 나의 그런 도벽적 충동심을 유발하기에 기가막힌 재치를 지니고 있다. 저기 멀리도 있는 -요즘은 비행기란 문명의 이기로 금방 가기도 한다만- 미국의 애팔래치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이미지를 그리게 만드는, 등산이란, 자연이란 바로 저런거야라는 생각을 명징하게 그리고 유쾌하게 그려내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사실 브라이슨과 떠나는 그 길은 첫걸음부터가 한바탕의 유쾌한 소동이다. 어느날 결심한 산악행. 그 산행을 위해 투덜거리면서도, 직원의 귀찮은 설명을 들어가면서도, 장비를 잔뜩, 푸짐하게도 산다. 그러다 우연히 접하는 숲속의 귀염둥이 곰의 안부.

나무로 도망쳤는데도 따라와서 사람을 죽였다더라, 총을 여러방 맞았는데도 사람한테 돌진하더라. 죽은 척하는건 소용없다더라. 텐트속에 누워 있는데도 곰이 들이 닥친다더라. 특히 요즘의 곰들은 좀더 포악해졌다, 그의 침대 위 엷은 램프에서 눈이 접시만해지며 곰의 안부와 조우하고 있을때, 독자들을 향해 봉긋 솟아 있는 표지의 곰의 얼굴모습은 보고있는 이를 키득거리게 만든다.

이 책의 매력은 그런 유쾌함과 키득거릴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여기에는 일단 숲을 향한, 나도 한번쯤 이 기회에 산과 만남을 가져야겠다는 충동심의 묘한 매력과, 절대 사람을 부추기거나 강요하지않는 소박함이 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잡으며 그들은 등반을 완벽히 끝내는 영웅적인, 초월적인 의지를 지니는 인간일거라 머릿속에 뭉실뭉실 그려냈을게다. 하지만 그 뭉실거리는 이미지는 그들과 대면하는 순간부터 처참하게 뭉그려져 버린다. 빌 브라이슨과 그의 동료 카츠는 아주 평범한, 너무나 평범해, 건너편 인상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이 소박해만 보이는 인물들일 뿐이다. `에이~ 브라이슨과 카츠가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나선다고? 핫 농담하지마~` 특별히 유달은 성격도 아니고 몸이 날쌘것도 아닌 그들. 그들은 모험에 설레는 공포심을 지닌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설레는 공포심을 우리도 공유하게 된다.

너무 힘들어서 `우리 트럭을 타고 바로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 결국 중간지점을 새초롬 빼먹고, 힘들다고 `이봐, 카츠. 우리 식량 어딨어? 설마 커피 걸리는 필터도?` 필수적인 짐을 냉팡냉팡 내동댕이 치는 둘의 익살극, 그리고 우리가 공포와 친근한 만큼 그들도 딱 그만큼 공포를 대하는 모습. 그리고 종종 겪는 좌절.

이것은 영웅심리에 도취되어 `여러분,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절대 여러분이 할 수 없는 대단한 산악을 성공했답니다.`라는 산악인과는 달리 우리의 마음에 너무 와닿게 된다, 심지어 그들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니..

`누가 뭐래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우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다.`며 그들의 행로에 뿌듯한 자신감을 가지는 그들에게서 도전이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전문인이 아닌 우리도 떠날 수 있다는 자신감,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부담을 떠 넘기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우리는 들뜨게 되며 그 붕붕뜬 기분속에서 일순간의 웃음을 벗어난 그 무엇과 대면하게 된다.

우리의 쉼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동행해 주었던 <나를 부르는 숲>은 그 동행의 끝에 남겨두는 `부담`이란 부담스러운 존재가 없어 더욱 솔직하며 담백하다. 빌 브라이슨, 카츠와 떠나는 유쾌한 산행. 그들만의 투덜거림에서 키득거리는 재미를 얻을게다. 그 키득거리는 재미 속에서 푸르른 숲의 상쾌한 뒷맛을 음미할 수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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