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렛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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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작가 신경숙이 좋았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아픔, 상실, 허무를 겪는 다소 우울해 뵈는 소설들의 어머니이지만, 보는 이에게는 절망이 아닌 애잔함을 남겨주는 작가 신경숙이 나는 좋았다. 내가 하면 우울증 말기 증세일 것처럼 보이는 말투와 행동들은 신경숙이라는 여과기를 거치면 절망하지만은 않는, 회색빛 작가란 말처럼 희뿌연 아픔만을 아련히 남겨 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바이올렛은 적어도 아니다. 그녀에게 따라붙는 수식어인 '회색빛작가'란 말에 너무 집착을 한 나머지 아픔을 나타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적은 글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픔이란 아련히 보여질 때 보는이도 그 진솔함을 느끼지만 지나치게 자기의 아픔을 드러내려고 하면 보는 이의 외면을 살 뿐이다.

바이올렛 속의 그녀, 산이의 아픔은 지나치게 내보이려는 경향이 짙다. 자신의 아픔을 조금도 숨김없이 그대로 내보이려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나는 덜컥 겁이 났고 회피하고 싶어졌다. 그녀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기보다는 산이, 그녀는 왜 저러지? 라며 그냥 지나치는 행인의 눈길과도 같이 애써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의 아픔 속에서 작가는 무엇을 나타내고자 했을까? 아련한 아픔은 절대 아니다. 대놓고 아파하기 때문에, 보란 듯이 아픔 속에서 시달리기 때문에 절대 기존의 신경숙식 아픔은 아니다. 사랑의 아픔을 나타내고 싶었을까? 그렇다면 산이의 행동과 분열은 딱 3류다. 다소 뜨악한 그녀만의 공상과 일련의 행동. 그렇게 되면 바이올렛 자체가 3류가 되는 것일게다. 자아의 분열, 자신의 파괴를 나타내려 한 것일까? 그렇다면 산이의 행동표현은 흔히들 말하는 오바다. 상황의 구조에서 모든 것을 자연히 우러나오게 표현하던 신경숙 작가답지 않은 처리일뿐더러, 빈약한 상황으로 무리하게 표현하려는 자아 분열 모습은 그저 지나치다. 오산이란 인물이 매조키스트가 아닌 이상 지나침이란 표현은 지나치지 않다.

무수한 아픔 끝에 덩그러이 남겨두는 상실감. 그녀가 강요하는 아픔과 상실은 지나치다. 신경숙, 그녀답지 않은 글이고 바이올렛 속의 그녀, 산이는 두 번 다시 쳐다보기 싫은, 인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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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1 - 개정판, 종합편,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예리한 질문과 놀라운 답변들 휴머니스트 교양을 읽는다 3
최병권.이정옥 엮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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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읽는 내내 과연 이것이 내가 지나쳐 온 고등학교 3학년이란 지위의 지적주순인지에 감탄적 시선을 가졌다. 다소 무리가 따르는 비약과 엉성함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결론 도출에 이르기까지의 논리정연함은 나도 저런 위치의 시기에 있었기에 감탄의 대상이 된 것이다. - 물론 우리와의 교육환경자체가 다름으로 인해 오는 차이이기에 존경으로까지의 감정 발전은 없었다.

솔직히 지금의 나조차 이런 류의 철학적 질문을 받았을 때 짤막하게 이렇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의견을 논리정연하게 도출해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신이 서질 않는다. 아니, 자신이 없다. 철학에서 사회과학,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어느정도의 기본적 지식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저런 체계적인 서술이 가능하기에 나 자신의 교양수준을 잠시 되돌아보기도 했다.

다만, 여기에 실린 답변들은 다분히 작위적으로 보인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펼쳐놓는 논술이기에 여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답들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긴 하다. 하지만 논술의 강점을 나타내 주는 또 다른 특징인 독창성은 왠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대부분의 답변들이 너무 정해져 있는 틀을 따르는 듯 하다. 주어진 질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한다. 좋다. 또는 나쁘다 등등으로. 그 뒤로는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다른 대상을 찾는다. 소크라테스에서 헤겔로 헤겔에서 루소로 루소에서 사르트르로. 거의 대부분의 답변들이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전개해 나가기보다는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이렇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저렇게 말했다. 그래서 옳다는 식으로 과거의 굴레에서만 맴도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과거의 둘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 채 결론을 내리고 만다. 물론 그런 생각들을 조리있게 맞추고 중간중간에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과거의 학문들의 틀에서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지, 우리나라의 주입식과는 다르지만 또 다른 프랑스식 주입식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교양적일지는 모르지만 논술로서의 방향으로는 아니라 본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의 범위 내에서 말하겠지만 이런 글들에서는 오히려 그들보다 아는 만큼이 더 좁은 사람들에게서 나올법한 독창성은 찾기가 힘들어 보인다.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세계의 교양으로서, 즉 철학이란 학문을 위해서는 대단한 지식의 깊이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여실히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어진 질문의 궁극적 답으로서는 추천작 모음보다는 다분히 현학적 모음이 어울린다 생각이 든다. 의견전개는 자신만이 아닌 모든 이들이 쉽게 이해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체계적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하더라도 그 구성이 다분히 복잡하고 어려운 낱말선택이 취해졌을 때, 그것은 쉬운 의견개진이라기보다는 지식기반을 갖추기 않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또 다른 지식의 계층을 산출해 내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각 질문들에 나와 있는 답변들의 현학적 내용이라든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전개자체에 감탄만 하며 책을 덮기보다는 나 자신이 그런 질문에 과연 대답할 수 있는가, 대답을 하기 위한 지적 수준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가하는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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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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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어찌보면 당돌해 보이는 저자의 주장이다. 사실 우리는 뼛속은커녕 자신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부유물질의 출생·사망체계하나 관리 못해 쩔쩔 매는 입장이다. 그런 우리에게 어쩌다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온몸의 구석, 이곳저곳에서 달콤한 낮잠을 자던 아드레날린들에게 비상령이 떨어진다. 비상! 비상! 잠에서 덜 깬 아드레날린들이 갈피를 못잡고 방방거릴 때 구석구석의 땀들이 탈옥을 시도하고 우리의 손과 머리는 애처롭게 덜덜 떨게 된다.

보통 글쓰기의 방법론에 관한 책들에 대한 불평들을 살펴보면 글쓰기에 대한 너무도 당연한 말들을 -나도 저런 말쯤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만의 특권물인양 떠들어 대느냐라는 불평어린 소리들을 자주 접한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을,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저자들은 왜 그렇게 새삼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글쓰기란 것은, 우리가 매일 문자를 머릿속에 집어넣어 갈아내고, 즙을 짜내어 말로 토해 놓듯이 우리의 삶에 너무나 일상화, 일반화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저 입으로만 편히 내뱉어 버리는 행위에는 온갖 칼로리를 쏟아부음에 아낌이 없지만 정작 그런 말들을 가꾸고, 주워담을 수 있는 글쓰기에는 1칼로리조차 인색하기 그지없다. 그 인색이 정작 신경을 쓰지않음에서 오는 무시의 인색인지 나홀로의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에 회피의 인색인지는 모를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꾸준히 하셔야 해요'. '하루를 쉬는것은 1주일의 운동을 버리는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맞다 여기며 실천해야 할 사항들이라 믿는 운동에 관한 상식이다. 이런 사항들을 나탈리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통해 글쓰기도 마찬가지란 것에 - 너무도 일반화되어 있어야 할 행위 - 대해 당연한 충고를 해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글쓰기란 운동과 같이 일상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행위가 아닌건 사실이다. 두렵고, 경외스럽고, 오직 나만 소외되어 있는 것 같은 그 미지의 공간. 그 미지의 공간 속에서 멀뚱멀뚱 서있는 나탈리는 외친다. '여긴 미지의 공간이 아니라, 여러분이 서있는 그곳 바로 여기란 말입니다!!' 그녀의 외침. 그리고 뒤따르는 일상이라는 곳을 증명해 보이는 사항들. 그 증명들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뚜렷이 보이는 만큼이나 비례적으로 실천하기 두려운 것들이다. 그런 두려움을 나탈리는 조금이나마 덜어내 주기 위해 자기를 믿으며 실천을 하라고 나직히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말해주기는 쉬워 보인다. 더구나 그것이 일반인에게는 실천하기 어렵고 두려워 보이는 것이기에, 이 책처럼 항상 전문적 위치에서 말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쉽게 말한다고 치부해 버린다. '그래 말하기는 쉽지. 하지만 믿지는 않아.'라며 쉽게, 쉽게 넘겨 버린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실천에 따르는 어려움을, 그리고 두려움을 이처럼 덜어내 주기위한 말하기는, 비록 그 이야기가 당연한 말만 나열되어 있더라도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란 것만은 주지하고 싶다. 당연한 것. 그 당연한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고 그 당연한 것을 사람에 와닿게 하는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다소 잠언적인 성향이 배여있는 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잠언이 주는 모호함에 또 선(禪)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더욱 모호해 보이고,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세부적인 그런 것으로 이 책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나오는 작은 제안, 제시들을 조금이라도 따라 봤는가? 아무리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냥 팽! 하고 코웃음 흘리고 갈 터무니없어 보이는 사항도 따라보리라고 노력이라도 해보았는가?'란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자만의 몫일 것이다. 이 책의 제안, 제시에 일체의 협력도 없었던 이들은 이 책을 평할 자격이 없는 게다. 실력은 없을 망정 이 책이 안내하는 그곳의 문턱에 손이라도, 발끝이라도 대보려는 노력을 하는 분들에게는 이 책의 진미가 보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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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 상상을 초월하는 33인의 유쾌한 발상
김용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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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란 주제 자체가 추상적이어서 원고 청탁서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상상의 매력인 다양성과 신선함이 사라진다.' <상상>의 기획일지 중 한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나의 생각의 끈을 잡아 끄는 것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상상의 매력인 다양성과 신선함이 사라진다.'이다. 바로 지금, '명확한 방향'과 '다양성'이라는 두가지 조건의 조율이 여기 이 <상상>에서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의 기획의도 또는 나아갈 방향점은 33인의 유쾌한 발상이란 구심점이었다. 그러기에 이 책을 접하는 사람의 의도 또한, 33인만의 기발한 머릿속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어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의 이 의도는 앞서의 명확성과 다양성 사이의 아쉬운 조율 속에 조금은 무너지지 않았나 한다.

'인간이 잠을 자지 않는다면?', '이혼하는 사람들은 부조금을 반납하라', '전유성의 기발한 몇 가지 아이디어' 등등은 정말 유쾌한 발상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 네가 사랑하는 목성이 태양계 최대 행성이고, 1등성의 약...(중략).... 이렇게 분석하는 게 싫어. 유성이 흐를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얘기를 간직하고 싶지. 지구 밖에서 얼음이나 작은 바위 덩어리가 날아와 지구 공기와의 마찰로 인해 뜨거워지면서 빛을 발하는 거, 바로 혜성의 조각이 유성이란 걸 기억하고 싶지 않아.' 처럼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공명을 울리려는 글도 다분히 살아 숨쉬고 있다.

하지만 그런 글을 제외한 몇몇의 글은 상상이란 체계가 던져줄 수 있는 발랄함이 사라진 무미건조한 문체로 지루한 맛을 던져 주었고, 또 몇몇의 글은 다양성에 너무 중점을 준 탓인지 상상을 하라고 했더니, 상상이 지니는 의미 - 포스트 지구화, 유토피화 등등 - 와 그것에 따르는 해석과 과제를 던져 주고 있었다.

물론 그런 글이 부실하다던지, 인정할 수 없는 빈약함을 지니는 것은 결코 아니나, 책에서 강조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33인의 유쾌한 발상'이라는 문구와 비교했을 때는 뜨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상>이라는 책 속에 그런 글이 실려있음이 정말 상상을 초월하긴 했지만 그닥 유쾌하진 못한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다양성을 중시하려고 했다지만 어찌 이 정도의 조율도 하지 못했나 싶은 지경이다.

33명의 글 중 일부는 확실히 나의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유쾌하고 기발한 발상이었기에, 그 만큼 남의 상상을 즐기는 기쁨을 누릴수 있었다. 하지만 몇몇의 전체적 분위기와는 다른 논문적 글들이 그 유쾌한 기분의 연속에 찜찜함을 남겨버렸는데, 차라리 삭제 해버리는게 낫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보기드문 기획 속에 대단한 기대감으로 접해본 그 결과물은, 당초의 의도마저 실망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아쉬움이 짙게 묻어 나오는 것이었기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기획의도와 작가 사이에 조율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신경을 썼었더라면 참신한 걸작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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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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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유명한 성석제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인간의 힘>과의 만남을 가져 보았다. 첫인상은 '과연 설레인다'였지만 막상 그와의 대면을 끝내고 남겨진 나의 기분의 여운은 실망의 화장터다.

성석제의 소설은 작가 특유의 걸쭉한 입담으로 인한 유머가 아주 독창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찬사가 따라붙는 것일 게다. 나 역시 그런 독창적이고, 독특한 작가의 유머 앞에서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인간의 힘>은 순간순간에 지나치는 잠깐의 걸쭉한 유머로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전체적 소설의 유머로는 개인적으로 실격이다.

<인간의 힘>은 역사소설의 형식을 띈다. 아니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자체가 어울리겠다. 무엇이 되었든 여기서 부수적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이야기의 주 모태는 소설이 되어야 함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물론 <인간의 힘>도 부수적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주 모태는 '채동구'라는 역사적 인물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그려내는 소설의 형식을 따르고 있긴 하다. 그리고 그 형식속에 묻어나오는 재미도 뛰어나긴 하다.

하지만 이 <인간의 힘>은 70%의 소설과 30%의 역사적 사실이 균형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 체계가 구성져 어디가 소설이고 어디가 역사인지 모르게 깨끗이 용접 되어 있는 것이 아닌, 지그재그 불안정하게 땜질 되어 붙어 있다는 것이다. 즉, 소설과 역사의 담을 허물고 하나로 어우러지는 맛이 아니라, 각자의 색깔을 가지며, 고유의 영역을 목청껏 외치며 떡하니 독립해 있다는 말이다.

작가 특유의 입담으로 이야기가 한창 진행나갈 무렵이면 작가는 꼭 '이 무렵, 정세는....'이라는 말로 단순 역사적 사실들을 요약하며 이야기의 흐름에 잠시 맥을 늦춘다. 재미가 있더라도 흥분적 긴장상태에 있는 독자들에게는 이런 늦춤의 미학이 잠시나마의 휴식을 줄 수 있어 바람직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늦춤 속에서, 작가는 그 시대에 관한 일반 역사 서적에 맞먹는 분량으로 -다소 과장하여 - 설명하고 있다. 아무리 이야이가 흥미롭고 그 진행에 매료되더라도 중간에 턱하니 10페이지 이상씩을 할애하는 단순적 역사서술은 보는 이를 짜증이 나게 한다. 그리고 한 번 나기 시작한 짜증은 제 아무리 특출한 이야기꾼이라 하더라도 가라앉게 하기는 힘든 법이다.

물론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그랬다 볼 수는 있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듣는 이야기보다는 어느정도의 배경을 갖추면 확실히 그 재미가 배가되는 것이니 - 하지만 역사'소설'인 만큼 최대한 간략히 그리고 그 윤곽만 대충잡아주고 넘어가며 소설의 흐름자체는 끊지 말아야 할 것을, 모든 사건 하나한, 정황 하나하나에 10페이지 이상씩을 할애한다는 것은 독자를 위한 역사'소설'이 아닌 지면을 채우기 위햔 '역사'소설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역사소설이 갖는 재미는 이야기가 끝나가는 종반까지 그 어디에도 내가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거나, 역사적 지식에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도 그 주변의 정황속에 몰입하여 빠져들 수 있는 점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소설 중반중반에, '자 잠시 소설은 잊고, 역사적 정황으로 돌아본다면..'식으로 그 흐름을 완전히 두손 두발 놔버린다면 읽는 사람의 집중만 떨어뜨려 놓을 뿐이라 생각한다.

나 처럼 성석제란 작가의 타이틀 하나만을 믿고 덤벼들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성석제란 작가에게는 문단의 칭찬이 유달리 많이 나오고 관대한 정황속에서 잠시의 개인적 느낌이 전달 되었음 한다. 성석제란 타이틀 하나만으로, 주변의 평가하나만으로 달려들 그런 책은 글쎄, 아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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