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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림원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첫사랑의 아픔, 또는 추억이라 불리는 그 풋풋한 알맹이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지니고 있지는 않을까? 일반적인, 보통 '우리'라고 불리는 평범한 집단의 뭉텅거리 속에서의 알맹이들은 보편이라는 그 집단이 피해 가지 못할 공통의 소속증은 아닐까? 결국은 누구나가 사랑을 하게 되고 이성을 그리워하게 되기에, 누구나 단단히 조여있는 가슴의 뚜껑을 열어 보면 그런 추억들은 다들 하나씩 고이 맺혀 있지는 않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물론 그것이 아직도 촉촉히 생맹력을 지니고 있는지 말라 비틀어져 바스라져 버렸는지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가끔, 솔로의 비탄에 잠기다 보면 사람은 왜 본능적으로 이성을 그리워하게 되는지... 난 이성적인 인간이라 자부하는데 왜 본능 따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런 추억의 주머니를 지니고 있는지, 또 왜 그 주머니를 버리지 못하고 가끔씩은 열어보는지...라는 자괴감에 빠져들곤 한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하지메도 마찬가지로 시마모토라는 첫사랑의 기억의 편린을 조용히 소유하고 있다. 바쁜 일상 덕택에 자신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그 기억의 편린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지만 어느덧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점점 자신의 알맹이를 잃어가던 하지메는 어느 순간 자신의 무언가가 텅 비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곤 드디어 자기 깊숙이 숨겨져 있던 그 기억의 덩어리를 발견하고 만다. 가슴속의 시마모토를 그리워하곤 만다.
자신의 텅 빈 일상을, 아니 텅 빈 자신을 시마모토만이 유일하게 채워줄 것이라 믿는 하지메는 가슴속에 조용히 살아 숨쉬던 그녀를 이제는 강력히 소유하려 든다. 하지만 사실 하지메는 그녀를 소유하기보다는 오히려 소유욕에게 소유를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빈공간 일부를 반드시 메워야 한다는 심한 자괴감에 소유욕은 점점 더 강해지지만 그럴수록 하지메는 더욱 일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잃어간다. 그러다 결국은 근원의 상실감을 느끼며 이제는 빈 껍질만 남아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빈 껍질의 자신과, 소유하려 하지만 결국은 상실되고 마는 하루키의 언어를 보고 있으면 언젠가 하루키의 소설을 보고 자살을 했다는 뉴스가 떠오르곤 한다. 사실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하루키의 상실과 허무의 코드는 그 색채가 강하다고 볼 수 있겠고 또 사실 나 자신이 느끼는 상실과 허무의 코드 역시 그 위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하루키의 어느 소설도 주인공인 나 자신마저 현실을 쉽게 버려 버린 적은 없었다. 일상 속에서 허무와 상실을 느껴 그곳을 탈피하려 하지만 언제나 나 자신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곤 한 것이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역시 자신의 상실감을, 자신의 빈 껍질을 채워줄 알맹이를 결국에는 현실에서 찾으려고 한다. 결국은 현실로 돌아오는 나 자신인 게다. 그런 매력에서 난 상실 속에서의 희망을 발견하곤 하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런 매력이 하루키의 매력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런 매력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매력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번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아니었다면 손조차 되지 않았을 법한 통속적인 사랑이야기의 소재로 이야기가 달리고 있다. 하지만 인간 근원의 불완전함으로 인한 고독감과 상실감을 뿌옇게 뿌려준 작품 전반의 풍경은 은은한 생각의 쇼파로 나를 데려다 주었기에 이야기 끝까지 같이 내 달릴 수 있었는지 아닌가 한다.
첫사랑의 아련한 국경의 남쪽과 현실을 잃어가는, 나 자신을 잃어가는 태양의 서쪽. 나는 그동안 어디에서 어디로 걸어오고 있었을까? 지금의 나의 위치는 어딜까? 남쪽의 아련한 희망과 서쪽의 허무한 상실과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내가 잠들어 있는 그 곳은 어딜까라는 물음을, 책을 덮으며 지그시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