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비 납치사건 1
김진명 지음 / 해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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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김진명`다운, 그가 썼다는 풍이 짙게 배이는 소설이었다. 그의 소설이 계속 두드려 맞으며 비판받아 온 고질적 문제인 변화없는 패턴과 구성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크나큰 이슈가 될법한 사건하나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추리와 탐험, 바로 김진명표 소설의 변함없는 설계도다. 하지만 그런 변화없는 설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이 여전히 명성을 유지하는 까닭은 바로 재미다. 일단 잡으면 놓기 힘들게 만드는 그 재미의 마력, 실로 벗어나기 힘든 김진명의 주문이다.

<황태자비 납치사건> 역시 재미하나는 보장 받는다. 우리 한민족의 깊은 저변의, 꺼내고 싶지 않은 자존심인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배경으로 그 내면의 일본 행적을 쫓아가 찾아낸다는, 소재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 재미의 극을 추구한다는 김진명표 향료가 가미 되어버렸으니 그 재미의 맛은 얼마나 진할 것인가.

하지만 그런 큰 재미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첫맛은 향기로워도 끝맛이 없다는것, 즉 재미 외에 남는게 없다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며 애국심이 솟아 났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부작용, 그릇된 애국심의 발로다.

몇몇 김진명씨의 작품과 더불어 <황태자비 납치사건>도 한, 일 감정을 지그시 부추기는 경향이 있는 작품이다. `이제는 일본을 그냥 한 나라로써 존경을 해 줘야지.`하고 있던 나조차 명성황후 시해 부분에 즈음하여 혐일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실로 당황스러웠다. 다른 사람들도 아마 별반 차이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이 책의 소재인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이 백번 머리 조아려도 시원찮은 판이다. 오히려 떳떳한 일본이니 한국은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소설이 지니는 극단적인 진행은 자칫 독자들에게 일본은 복수의 대상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 줄 수도 있다. 일본 새 교과서가 지니는 은근한 전쟁부추김과 한국 정복의 은근한 아쉬움은 이 소설의 극단적 진행과 정도의 차이와 방향만 조금 다를 뿐, 서로가 적개심을 가지게 한다는 데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은근한 저변의 자존심을 건드려 일으키는 민족주의적 애국심은 실로 위험하다는 것은 이제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비 납치 사건>은 한일감정을 교묘히 이용해 버렸고 특히, 저연령층에게 일본에 대한 나쁜 인식만을 심어줄 수 있는 안타까운 부작용을 뚜렷이 지니고 있다. 흥미를 위한 장치라고만 하기에는, 민족의 감정을 너무나 자극한다.

하지만 읽고난 후, 이런 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역시 흥미진진했다는 느낌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억측스런 추리와 진행이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전체의 흥미 면에는 기여하는 바가 없었을 뿐더러 그저 별 생각을 지니지 않으면 참으로 흥미로울 수 밖에 없는게 또한 사실이다. 재미하나 만으로는 만점도 모자라는 판이다. 하지만 민족의 자존심을 이용해 반일감정을 일으킬 수도 있는 등의 부작용을 고려한다면 딱 절반의 점수가 나을 듯 하다. 흥미와 부작용의 팽팽한 힘겨루기 상태. 판단은 독자의 몫.

잠깐의 자투리 시간이 날 때 즐겨 보시라. 너무나 흥미진진한 그 추리소설 같은 진행에 푹 매료 될것이다. 하지만 재미외에는 크게 건지지를 말라. 그것이 이 책을 즐기는 가장 알맞은 법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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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 브라운 신부 전집 1
G. K. 체스터튼 지음, 홍희정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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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추리소설이란 분야의 문에 수줍게 노크를 하게 되었다. 그것도 추리소설의 고전으로 불리우는, 전세계 추리소설의 팬들에게 극찬을 받고 있다는 아주 거대한곳, 마천루의 정문에 노크를 하게 되었다. 추리소설하면 셜록 홈즈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는 그 노크의 긴장감과 설레임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브라운신부`시리즈 중의 첫편인 <결백>.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장르에 대한 회의가 얼핏 들기 시작 했다. `추리소설의 진행이 원래 이런건가?` 그 즈음, 추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밋밋한 진행과 고빗사위는 커녕 클라이막스 조차 없는 싱거운 결과 구성에 나는 당혹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분명 추리영화나 만화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추리의 묘미는 무엇일까? 그 요체는 바로 `독자참여`에 있다. 여기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저 눈으로만 귀로만 주인공의 행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닌 자기나름의 의미구성과 결과 예측, 바로 이것이 추리의 재미이자 진정한 묘미이다. 그만큼 추리란 장르는 독자참여가 없으면 껍데기 뿐인 것이다. 단팥빠진 찐빵, 소시지없는 핫도그. 이처럼 그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결코 뗄래야 뗄 수 없는 찐득한 사이다.

추리 = 독자참여. 그런게 추리다. 사건 하나하나의 실마리를 자기나름대로 찾아가며 그 논리적 개연성의 달콤함을 즐기는 하나의 오락. 하지만 <결백>에서는 그런 자기나름의 참여를 위한 오락의 문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 문을 찾아보지만 오로지 들르는 것은 브라운 신부의 호통소리. `빨리 따라오시오!` 독자는 오직 브라운 신부가 걸어간 자취만을 투덜투덜 따라 가야만 했다.

`북치고 장구치고.` 브라운 신부를 한마디로 표현해보라고 하면 딱 제격인 말이다. 사건하나 `뻥` 터뜨려 놓는다. `이야. 이제 사건의 시작이다. 두근두근` 하지만 별다른 추리의 건덕지를 남겨놓지도 않은 상황에서 브라운 신부는 밑도끝도 없이 모두 해결해 버린다. `야~대단한 신부구나`가 아니다. `아, 이건 그런 것이 아닐까?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닐까?`란 추리만의 진정한 참여는 할래야 할 시간이 없다.

발단, 전개, 그리고 결말. 중간의 무언가가 빠진듯한 허전한 공허감은 실로 막대해 직면한 이로 하여금 사지에 힘이 싹 빠지게 한다. 브라운 신부. 북치고도 장구 친다고 한게 칭찬인줄 아는지 꽹과리 마저 칠려는 모습에는 두 손 두 발 안 들 수가 없다.

태어나서 처음 두드려 본 곳. 추리소설 <결백>. 신선한 추리라는 주위의 평가와는 별개로 초심자인 나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오히려 초심자의 시선덕택으로 추리소설을 본듯한 느낌이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아직은 두드리지 말아야 할 곳에 건방지게도 `쾅.쾅` 문을 두드린 것 같다.

역시 멋모르는 초심자에게는 정석의 길부터 밟는게 순리요 도리겠다. 정통추리의 면모를 제대로 익힌 뒤, 그 때서야 다시금 찾아 와 볼만한, 어쩌면 수준높은 곳이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건방지게, 멋모르게 한 노크의 대가치고는 너무 쓰디쓴 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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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 박정희
최상천 지음 / 사람나라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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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에게 박정희만큼 유명하면서 또 그 만큼 덜 알려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토록 추대를 받는 인물이라면 그의 성장배경, 환경, 행적들이 꽤 알려질만도한데 우리의 대부분은 `박정희`하면 막연히 `카리스마 넘치는 독재자`, `경제 부흥의 아버지` 정도로 밖에는 떠오르질 않으니, 어디 수피즘이라도 신봉하는지 어떻게 이런 식으로 베일에 감쳐줘 있는 것일까?

그 사실은 꽉 막혔던 언론과 지식의 자유화가 꾸준히 추진된 여기에 이르러서야 그 나체가 살포시 드러난다. 이제까지는 언론통제라는 강력한 커튼 뒤에 몸 사리고 있던 박정희,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이제 그 커튼은 삭아 문드러졌다. 이제는 당신의 알몸을 감출데가 없소이다.

그 막막하던 커튼이 삭아내리며 우리의 코를 자극하는 `친일파`라는 냄새는 충격적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예사 친일이 아닌 아주 골수 친일의 자극적인 냄새. 하지만 솔직히 이 시대 군중들의 친일파에 대한 강도높은 적개심과 비난은 명분이 없다. 그저 해방된 편안한 시대에 태어나서 `이런 매국노들!` 하고 외치는 모습들. 하지만 실제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자기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어찌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아무렴.

그런데 내가 갑자기 친일파 동정론의 색채를 띄는 까닭은? 그 만큼 대놓고 그들을 비난할 것은 아니란 의미에서다. 물론 잘한짓도 아니지만 인간에게는 두려움이라는 본능이 있다. 그 본능에 굴복해 버린 인간에게는 미워도 용서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무서워서 친일했어요` 하는데 뭐라하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잘 봐주려 해도 `인간 박정희`의 친일은 정도가 심했다. 특히나 <알몸 박정희>를 보고 있자면 심히 심장이 부담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알몸 박정희>는 박정희를 드러낸다는 공로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참고로서의 가치만 지닐 뿐, 사실명제로서의 가치는 지니기 힘들다. 아니, 지닐 수가 없다. 바로 객관력 상실이 문제다. 저자의 박정희를 싫어하는 마음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타도 박정희`의 전제 마음이 모든 독자들에게도 있을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이런 자세는 독자들에게 반감만을 일으킬 뿐. 이런 효과는 저자도 원하는 바가 아니였을터인데..

그리고 군데군데 비판가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망언마저 나온다. 그중, `일본을 보면 꼭 단세포동물을 보는 듯하다. 달랑 빨간 동그라미만 그려놓은 국기..... 밀어내기 밖에 없는 스모, 우르르 몰려다니고 줄줄이 따라다니는 꼬봉 근성, 소설이나 영화 하나로 전 국민이 울음바다가 되는 풍경, 보들보들하지만 어김없는 기계적인 태도, 모든 것이 단순성의 극치다.` 란 부분은 정말이지 저자의 단순성의 극치다. 이건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지 결코 사실이라 볼 수 없다.

이런 부분들은 참으로 아쉬웠다. 좀더 객관력과 공정성을 지녔다면 누구에게나 무난히 권할만한 책이 되었겠지만 객관력을 상실한 저자의 `나홀로 흥분 모드`는 차마 아무에게나 같이하자고 하기에는 거북하다.

박정희, 젊은 층에는 부정적 면이 많이 부각된다. 하지만 실제 그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에게는 정치야 인물이야 어떻던 `식량`이라는 궁극적 생존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영웅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양측의 조화로운 시선을 수용하기에는 <알몸 박정희>, 너무 한곳으로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런 한곳으로만의 집중을 강요하기에는.....시대가 너무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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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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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다운 소설이었다. 그녀의 소설이 가지는 그 특이한 골계미는 추리, 판타지, 무협소설들의 흥미와는 또 다른 그 무언가가 확실히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의 소설속에서 이렇게 허우적 대며 빠져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를 흡입하는 마력. 허우적, 허우적.

일단, 그녀가 가지는 골계는 읽는 이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게 뭐지?` 벌써 얼굴 붉어지는 독자들. 그 당황의 회오리에 직면한 독자는 정신없이 어지러워 진다. 평정심을 찾으려 부단히 애쓰지만 A급 `노통 회오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회오리 속에 빙글뱅글 휩쓸리다 보면 어느새 그 회오리의 일부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더이상 그녀의 소설은 현기증을 유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 소설의 현기증은 즐겁다. 신바람 노통 호~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 여기에는 한 아이가 나온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기가 신이라 굳게 믿고 있다. 맞는지는 몰라도 믿게끔 만드는 구석이 여기저기 있긴하다. 아니, 진짜 신인가? 헷갈린다. 그런 아이의 성장과정을 3살까지, 그것도 탁월한 내적심리진행으로 이루어 진다.

더불어 절대 심각하지도 않다. 오히려 기막힌 재미와 웃음속의 요람에 들어가 누은 듯, 어린 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어찌나 재밌던지.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존재와 우주본질의 근본철학적 물음표를 가지게 한다. 역시 이 요람은 예사 요람이 아니였던가 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은 여타 아멜리 노통의 소설과 같이 분량은 짧고 전개 구성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의 얇음 속에는 절대 과포장되지 않은 알맹이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 토실토실한 알맹이들을 하나하나 까먹는 재미. 이제는 아쉽지 않으려나. 그것이 이 책에 푹 빠진 요인이었고 또한 노통의 소설이 가지는 커다란 흥미의 자기장이다. 적은 노력으로 큰 만족. 이제는 너무 식상한 경제논리가 되버렸나.

지금의 난 노통이란 안경을 쓰고 말았나 보다. 그 안경을 통해 보는 세상은 이제 편협적이다. 이미 내 눈의 일부가 되어 버린 안경의 폐해는 이제 알아 차릴 수가 없다. 덕분에 난 노통의 매력을 비판할 객관력은 상실하였는지도 모른다.

`넌 노통 골수 팬이야. 말할 자격 없어!` 하지만 이런 상황속에서도 난 노통의 소설을 권한다. 물론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도 포함해서. 이제 당당히 외친다. 읽어보고 느껴보라. 이 짧음 속에 스며있는 아쉬움의 마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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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소수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9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현진 옮김 / 한길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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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 그녀의 이런 여섯 글자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어도 <로마인 이야기>라는 거대작의 여섯 글자 이름은 한 번 쯤이라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멋모르고 봤지만 나도 고등학교때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만큼 그녀란 존재는 익숙하지는 않아도 우리의 고막속에 작은 울림으로서 살며시 자리잡고 있는 터이다.

그런 유명한 그녀는 머조리티(majority), 중에서도 메이저(major)로 밖에 보일 수 없다. 대중에게서 비롯되는 환호의 파도속에서 서핑하는 모습에서는 절대 silent minority의 면모를 뒤질 수 없다. 특출한 minority지만 소속은 majority. 이렇게 나처럼 까막눈 군중의 한 개인으로서의 시선은, 간혹 이런 식으로 편협적이다.

그렇게로만 보이던 그녀가 마이너리티를 선포했단다.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제 시들해진 그녀의 위상에 한 줌 거름을 주고자? 아니. 이것은 그녀가 처음부터 군중에 속박되지 않은 그녀만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심리의 표출이었다. 뭐 그렇다고 그녀가 반골(反骨)인건 아니다. 자기만의 사상과 시선을 지닌다고 해서 반골은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 사회가 그런 경향으로 몰아 갈 뿐. 그녀만의 생각, 그녀만의 시선, 그녀만의 색채의 발로.

<침묵하는 소수>에서는 그런 작가의 의도가 잘 묻어난다. 군중의 강압적 심리에 잡혀가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나타내는 사람들과 그에 대한 그녀의 생각 집대성. 이 정도의 집대성이면 나처럼 시오노 나나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도 그녀의 내적 구조가 얼핏 보일 것이다.

물론 `에세이`인 만큼 사전에 그녀를 알고 더 알고자 하는 시도에 더 적합하긴 하겠다. 덕분에 `시오노 나나미 무지`인 나는 그녀에 대한 큰 감흥이나 흥미는 느끼지 못했고, 그저 소수인들의 침묵속에서 아스라이 뿜어져 나오는 그들만의 색채들에 더 흥미를 느낀터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침묵을 고수하는 소수가 존재한다. 이제는 그들을 그저 반골로만 치부할 때가 아닌 좀 더 소수로서의 존중을 해 줄 시대가 왔다. 그것이 또한 진정한 민주주의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학교에 제출하는 일기가 아닌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잠가 둔 서랍속의 일기`같다는 <침묵하는 소수>. 시오노 나나미란 거대한 건물의 뼈대와 그 동안 외딴 곳의 허름한 폐옥으로만 치부된 소수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면 한 번쯤 들춰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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