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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ㅣ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유람선을 타고 가던 어느날. 홀에는 댄스파티가 벌어졌다. 아, 타이타닉을 떠올리지는 말길. 온갖무게를 가지고 연주를 하고 있는 이도 없고, 온갖 귀금속을 부적인양 몸에 붙이고 화려한 드레스로 왈츠를 추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냥. 우리의 춤판이다. 유람선에서는 꼭 왈츠를 추란 법은 없다.
어떤 모임을 가진 사람들인지, 40인지 50대인지 모두 여자뿐이었다. 술마시고 춤추고 웃고 흥겹다. 부어라 마셔라. 마셨으면 흔들어라. 흔들어라. 으쌰으쌰. 저기있는 당신도, 귀막고 있는 당신도 다같이 으쌰으쌰.
그사이, 그 꽃밭에, 그 화사만발한 꽃만의 향연에 불청객 수컷 벌 한마리가 난데없이 끼어든다. "이봐, 이봐, 너무 즐거운거 아냐? 나도 끼워 달라구, 같이 놀아보세."
아무리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한국이지만, 그 거침없는 꿀벌의 대시에는 꽃들도 조금은 기분이 상했나보다. 꽃님들은 그를 과감히 내친다. 감히, 혼자 꿀맛을 보려는 특권을 누리려면, 예의를 보여라는 거다. 꽃잎도 좀 닦아 주고, 화분도 좀 옮겨주고. 응? 이에 그 남자, 먹다 남은 음식을 치우고, 술을 날라오고, 서빙을 자처한다. 저좀 잘 봐주세요. 네? 네? 이정도면 꿀 한방울 값은 안될까요? 네? 네?
유람선 위. 의자에 앉아서 이모습을 내려다 보던 김연수. 그는 이 장면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단다..
"사랑 따위는 하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소주를 살 일도, 노래를 부를 일도, 춤을 출 일도 없을 텐데."....
내가 요즘에 가장 싫어하는 CF가 하나 있다. 인기가 있는지 시리즈물로 제작되고 있는 어떤 마트 선전인데, 거기에는 여자1명과 남자2명이 나온다. 그런데 그 남자 2명이 이 여자 한명을 무지나 좋아하나 보다. 서로 여자의 관심을 끌려고 온갖 오도방정(! 너무 나를 그렇게 보지는 말길.) 을 떨고, 그 방방거림에(!)따라 그 여자는 이리갔다 저리갔다. 흔들흔들 한다.
난 저 CF가 정말, 너무, 극히나, 절대적으로 싫었다. 젠장, 사랑이라는 게 저런거야? 어떤 인간이 사랑은 쟁취하는거야!라며 한대 쥐어 박아버리고 싶은 웃음을 짓더니,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며 골빈 웃음을 짓더니 정말 그런건가? 쟤들 도대체 뭐하는 거야? 저렇게까지 사람에게 잘보이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저렇게 진땀을 빼야 하나? 사랑은 헌신이라고는 하지만, 저건 그게 아니잖아? 지금 뭐야?
라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흥분하고 있을 때, 니가 그러니까 여자가 없는거야라는 면박을 당하고 있을 때, 저 김연수의 생각을 봤다. 사랑따위 안할 수 없냐니? 저 작가 제정신인거야? 어떻게 대놓고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근데, 그런데 말야. 이거 너무 반갑잖아.
그랬다. 일단 소설의 내용이 뭐든, 김연수가 썼던 아니든 간에, 나는 나의 혼자만의 생각에 턱하니 들어 맞는 어떤 코드를 하나 찾은 것이다. 나는 정말 이 책에, 이 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갈릴레오가 지구가 돈다고 하는데도 안돈다는 다른이들때문에 돌아버리고 있을때, 옆에서 누가 "잘했어요, 맞아요. 지구가 돌아요~" 했으면 얼마나 좋아했으랴? 그가 누구든 분명 와락 끌어 안았을 것이다. 나도 그와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발단 전개 절정 결말. 세상사가 다 이런 아치 모양의 다리를 건너가는 게 아니겠니? 그러니까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거지. 여름 매미가 가을 단풍을 알 턱이 없지. 너는 연애도 제대로 못 해본 어리보기라서 잘 모르겠지만, 낭만적 사랑도 마찬가지야. 너는 사랑이 발단하고 전개되어 절정에서 영원할 것 같니? 결말은 영원히 유예될 거라고 생각하니? 천만의 말씀. 천 년의 사랑이든 만년의 사랑이든 한 번 지나가면 사랑은 잊혀져.' 50p
주인공 광수는 결혼직후,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한송이 꽃의 꺾임때문에 의처증 같은 심정으로 자신의 결혼이라는 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그녀가 누구였고, 과거는 어떤것인지. 그리고 그 돌아봄이 이 소설의 주 사건이다. 진우라는 인물은 처음의 작가의 생각과도 같이 사랑에 대한 회유와 염세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사랑따위 하지말라는 주의는 아니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영원하지도, 꼭 아름다운것만큼은 아니다라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이 두명이 다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이 둘의 대화가 주를 이루고, 나머지 인물은 거의 부수적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선영이가 있다. 꼭 내가 싫어한다는 CF와 구성이 비슷하다만, 그 CF와 이 소설의 차이점을 말하자면, 한개는 내가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것이고 나머지 한개는 20대 초반의 나의 인생에 새로운 시각을 하나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당연히 후자다.
다만 알아둘 것은 작가가 "사랑따위 안 하고 살 수 없나"하고 했고, 거기서 내가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해서, "나는 영원히 사랑따위 믿지 않고, 사랑을 증오하리라"라는 것을 얻었다는게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었다면 "엄마, 나 100점 맞았어요"라며 자랑스레 내가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며 호언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사랑의 파탄소설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사랑에 대한 불신의 모습이 역력히 비치는 진우조차도 사랑을 원망하는 척 하지만, 그의 내면을 보면 어쩌면 그도 사랑을 그리워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소설이다.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 123p 라고 하지만,
꽃에는 입술이 없지만 자신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사랑에는 혀가 없지만 네가 누구인지 먼저 알아 내라고 종용한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개인으로 자란다. 거울에 비친 그 위대한 개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지구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느냐는 미 우주항공국의 업무지만, 우리가 얼마나 깊이 사랑할 수 있느냐는 스스로 대답할 문제다. 그건 우리가 얼마나 자신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느냐, 혹은 우리가 얼마나 자신을 깊이 사랑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80 - 81p
라고도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분명 작가의 생각은 사랑따위 집어춰라!는게 아니란걸 알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사랑에 대해 불신하는 진우의 모습에서 겉으론 강한척(?)하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사랑을 갈망하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나같은 - 사랑, 천만에!! - 사람에게도 사랑이라는 불씨를 당겨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난 바로 딱히 그와 같지는 않지만 그에 반응하는 나의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어느날, 친구와 카페에 앉아서 얘기하던 중, 나의 사랑의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시각을 보고, 친구가 한마디 해 주었다.
"물론, 맞아. 그런 모습이 그렇게 보이고 나도 그렇게 보여. 그런데 말야 웃긴건, 그렇게 생각을 하고, 또 그런 말을 내뱉고, 그렇게 조언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랑을 하지 않았고, 또 하지 않고 있다는 거지. 사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알은 척하지만, 실제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어."
그때 딱히 나는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전혀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거니와, 정곡을 찔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철없는 나에게는 어떤 확고한 시각 하나로 나를 고정시키기 보다는 다양한 시선으로 나를 둘러쌀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실망하더라도 덜 실망하고, 상처 받더라도 덜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또하나의 시선을 얻게 된 것이었다.
분명,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나 아닌 다른 인간을 사랑한다는 그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고, 상대방의 결점을 결점으로 보지 않고, 자기자신으로 안으려는 모습이 아름답다. 시끄럽다. 그래, 사랑 그건 아름다움 그자체다. 내가 아무리 궁시렁 거려봤자. 불변의 진리다. 이의 있는사람?
그도 그럴 것이, 온통 사랑을 찬양하고 있는 것들의 홍수 뿐이다. 물론, 사랑의 아픔을 노래하고 그 아픔의 힘들고, 아려옴을 말하는 이도 있지만, 결국 귀결은 그래도 그 사랑은 아름다웠다거나, 그래도 나의 앞날에는 사랑이 존재하리라는 것이다. 즉,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이다. 사랑은 당신의 주위를 언제나 빙빙, 끝없이 돈다는 것이다. 이런 무대에,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지 않고, 오늘부로 서기로 했답니다.라고 지껄였다간은, 보기좋게, 아니 별로 보기에는 좋지 않게 뺨 한대 맞을게다.
항상 그 찬양일색이라는 것에 불만이었던 나는, 처음에 그런 불만을 달래고 싶어 이 책을 집었다. 왜 우울할 때는 더 우울한 영화를 본다거나, 음악을 듣는다거나 하여 펑펑 울어버리는게 조금은 시원할때도 있지 않은가? 나도 딱 그 심정이었다. 혼자만의 꿍꿍이로 앓던 나의 마음에 "사랑, 꺼져라"는 내용으로 나를 위로하리라며 집어 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나같은 이들을 슬쩍 유혹하여 집어들게 하고서는, 다른 안경하나 턱 하니 씌워 버리는 김연수, 그는 대단한 작가다. "어?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아니었어. 사랑은 정말 아니란 말이지." 설령, 그가 그런 마음으로 이 책을 썼고, 내가 착각의 자유를 맘껏 누린 꼴이 되었더라도, 이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참으로 나의 마음을 끄는 소설이다. 한 사람에게 또 다른 시선을 가져다 주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