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근현대교육사를 다룬 책 몇권을 요즘 다시 살펴보고있다. 대학입학 후 반짝하다 그동안 익숙한 것으로 여기며, 관심밖의 영역에 너무 오래 남겨둔 듯하다. 


"우리가 해방후 한국에 미친 일제의 잔재와 영향을 진단하고자 할 때 인물면에서의 미청산도 대단히 중요하게 확인되어져야 하지만, 동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분야는 이들 교육 주도 세력을 매개로 하여 우리의 교육 구조 속에서 온존하거나 변형되어 있는 '일본적 요소'를 규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현대 교육 형성의 역사 속에 일본적인 제도나 요소는 '미국적 요소'와 어떻게 결합되어 오늘날과 같은 교육 제도나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교육의 역사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pp. 463-464.  물론 그것과 '계급적 요소'와의 관련성 역시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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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은 총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학벌주의가 문제의 핵심이지요. 이를 해결하는 데는 상·중·하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상책은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학력과 관계 없이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거겠죠. 하지만 이건 너무 먼 이야기라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보긴 힘들죠. 중책은 학벌사회를 능력사회로라도 바꾸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요. 지금은 대학 입학 성적으로 졸업이 보장되고 봉건시대 신분 증명처럼 평생을 따라다니죠. 단 한번의 시험으로 개인의 운명이 좌우되니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어요.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제기된 게 대학평준화, 국립대통합네트워크죠. 마지막으로 하책은 현재 대학 서열은 그대로 두되 고교평준화를 통해 내신성적으로 입학생을 뽑는 방법입니다. 이 세 가지 방법 가운데 가장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건 두 번째 중책이라고 봅니다...."


김: "국립대통합네트워크라는 발상은 고등교육을 실패가 뻔히 예견되는 사회주의적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거라고 봐요. 현재 가혹한 입시경쟁은 대학간의 경쟁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예요. 입시경쟁과 대학간 경쟁의 강도는 반비례하죠. 대학 경쟁이 치열해지면 학생을 고객으로 대할 거예요. 대학의 경쟁력은 경쟁 체제에서만 나옵니다. 우리는 고착된 서열 때문에 대학간 경쟁 체제가 조성되지 않았어요. ...."


정: "...대학평준화는 모든 대학을 똑같이 만들겠다는 게 아니에요. 대학의 물질적 조건과 입학생을 평준화하자는 거죠. 이게 학생, 교수 등 대학 주체들 간의 경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봐요. 국립대학 체제에 대해 모든 것을 국가가 관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프랑스, 독일은 국립대학 체제이지만 국가가 간섭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어요. 오히려 우리나라의 사립대학에서 이사장의 전횡이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죠. 대학이 국립인가 사립인가 하는 문제는 대학이 어떻게 운영되는가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죠."


김: "결국 국가의 구실에 대한 시각 차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는 가능한 한 사립대도 네트워크에 편입하게 해 국가 관리를 강화하자는 것 아닙니까? 저는 거꾸로 우리나라 교육문제는 과도하게 국가가 관리하기 때문이고 국가가 손을 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개선 효과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공정한 경쟁의 장만 마련해 달라는 거죠. 어느 것이 더 쉽겠습니까? 대학평준화와 같은 포괄적 국가 관리 체제의 도입은 우리 사회에서 추동력을 끌어내기 힘들어요."




전문은 오늘 자 한겨레 [토론과 논쟁]으로  http://www.hani.co.kr/section-001065000/2004/12/0010650002004120705190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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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전국 단위로 실시되는 학습 평가 시험에만 신경을 쓰게 되면서 학생들의 생활과 복지에는 거의 신경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들이 정말로 아이들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뇌가 손에 말을 하듯 손도 뇌에 말을 한다. 정신과 신체를 분리하는 지난날의 개념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금방 허점이 드러난다. 문화적인 행동 가운데서 가장 복잡한 행동을 살펴보더라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곡예나 운동경기처럼 순전히 '신체'의 능력만을 필요로 하는 고도의 기술은 절차적 지식과 선언적 지식의 숙달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은 성공한 수학자나 건축가, 과학자들에게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는 지능을 계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신과 신체를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접목시키는 것이다." -프랭크 윌슨. 여기서 선언적 지식이란 뭘까?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몸으로 학습하는 것을 도와주지만 몸을 통한 학습 또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두 부분 모두 필수이지요. 하지만 기존의 학교는 대부분이 경험을 통한 학습을 무시하고 있어요. 농구든 생물학이든, 제대로 이해하려면 경험을 통한 학습에 어느 정도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엘리엇 교장  

"사람들은 종종 혁신적인 학교에 대해 얘기할 때 이미 결함이 많이 드러난 기존 모델과 비교하지 않고, 아직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이상적인 학교와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알피 콘은 '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보다 앞서게 하기 위해'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부모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들은 이미 상당한 몫을 누리고 있다 해도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개혁은 무조건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콘이 인용한 또 다른 연구 결과들을 보면 부모들은 평등한 교육을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아이가 누리는 혜택에 방해가 되지 않는 수준 안에서만 지지한다고 한다."

[학교를 넘어선 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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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은 처음 몇해 동안 학생에게 일요일에 교회당 예배를 강제로 시켰다. 월요일에 학생이 등교하면 담임교사가 반드시 한사람 한사람을 호명하면서 "어제 예배당에 갔느냐"고 물었다. 안갔다고 하면 이유를 묻고 벌을 주었으므로 학생들은 거짓대답을 많이 하게되었다. 일요일 예배시간에 동급생 몇 사람과 남산에 가 산책하고 이튿날 학교에 가서 거짓대답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답하였다가 예배에 참여치 않은 것은 죄라 하며 수업이 끝난 뒤에 양모라는 교사에게 한 시간동안 학교에 남아 복습하는 벌을 당하고 화가 나서 자퇴한 학생이 실제로 있었다. 기독교 학교의 이런 일은 배재뿐만 아니었다. 다른 기독교 학교에서도 기꺼이 행한 규칙이며 한동안은 예배당 목사에게 예배보았다는 인준을 받는표지를 학생에게 나누어 주어 실행시키기까지 하였다. 이점에 있어서 당시 기독교 학교가 공로를 쌓아 남에게 존경을 받는 한편 전체로는 법률상 개인의 신앙자유(不신앙도 자유임)를 무시한 오만과 무례를 범하였고 개인으로는 청년에게 거짓말하고 아첨하는 습관을 기르게 한 비교육적인 과오를 저질렀고 하나로 통일될 수 없는 인간이성을 획일적으로 강제하는 어리석은 망동을 저질렀다. 어쨌든 공정한 국민교육이나 진정한 인간교육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용납되지 않는 무지한 짓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교인을 많이 얻어 선교성적을 올리려는 야심에서 나온 졸렬한 수단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이 종교계 학교교육의 큰 결함, 곧 불합리한 교육이었으므로 종교를 국가교육과 분리하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배재학당도 이 불명예는 청산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만규. [조선교육사2](거름, 1988), pp. 34-35.<200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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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의 환상 학력을 묻는다 3
가리야다 케히코 지음, 김미란 옮김 / 북코리아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많이 접할 수는 없지만, 일본인이 쓴 교육관련 책들을 보면 색다른 느낌이 든다. 예전 [교육개혁을 디자인한다](공감, 2001)를 읽었을 때처럼, 비슷한 현실 인식인 듯 하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들을 생각하도록 건드려준다. 초등학교 단계에서 정부주도의 ‘열린 교육’이 전개되었을 때, 월간조선에서 ‘정치적’인 논자로 끌어들여 언론플레이를 시킨 황용길의 [열린교육이 아이들을 망친다]의 선정성이 생각나 살까말까를 망설였던 책이다(책값 9,500원 역시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소위 ‘전통적 입장의 교육(이를테면, 교과중심교육 혹은 교사중심교육)’과 ‘진보적 입장의 교육(이를테면 경험중심교육 혹은 아동중심교육)’간의 대립과 논쟁은 사실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미야자와의 말을 빌려 글쓴이가 비판으로 삼는 아동중심교육을 우선 개념화하면, 그것은 일종의 ‘오픈 어프로치’로 “학생 개개인의 흥미, 관심에 따라 자유로운 학습을 전개함으로써 교사와 학생이 같이 배워가는 것으로, 학생 스스로가 필요한 지식을 선택하여 스스로 지식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전통적 어프로치’는 “가르쳐야 할 내용(지식)이 이미 정해져 있어 이를 교사가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중간치인 ‘프로세스 어프로치’는 “교사는 지식과 학생 사이를 이어 주는 역할을 하며, 학생은 능동적으로 지식을 배우지만 이는 교사를 통한 것으로 지식의 내용은 학생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미 정해 놓은 것”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읽을 수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아동중심교육(특히, 위에서 개념화한)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다른 하나는 교육개혁이 어떤 형태로 진행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발언이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주로 전통적 입장에서 아동중심교육을 비판하는 이들의 논리를 글쓴이 역시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며, 그래도 한 가지 주목할 바는 아동중심교육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학생들 대부분이 소외계층의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계층차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일 것이다. 글쓴이는 소외계층의 아이들에게 아동중심교육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후자의 측면에서는 교육개혁이 정확한 원인의 진단과 그에 따른 대응(처방)에 따라 이뤄져야 하는 것이고, 그렇다하더라도 그것을 나라 전체의 교육개혁 아이디어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란 점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내용을 정리해둔다.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입시위주 주입식교육의 폐단(“입시경쟁→주입식교육→점수에 따른 획일적 평가→서열화와 입시스트레스→교육문제의 발생”이라는 도식)을 없애기 위한 대안으로 아동중심교육에 기댄 교육개혁에 경도되어있다는 것이 글쓴이의 입장인데, 글쓴이가 보기에 이는 잘못된 현실 진단이다. 따라서, 대안으로 제시되는 일본 교육개혁의 핵심인, 여유(교과내용의 삭감을 통한), 살아가는 힘(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과 문제해결력을 길러주는 것), 종합학습(체험학습 위주의)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들에게 부여된 여유가 자기학습으로 연결되지 않아, 결국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해 학력저하로 이어지고, 그런 교육으로 인해 계속 피해를 보는 학생들은 결국 소외계층의 아이들로 교육 불평등이 점점 심화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 현실 조건의 마련 없이 이상만을 가지고 실행하려다보니 현실의 벽에 부딪치며 문제상황만을 만들어 내고있다(이상을 말하는 것과 이상을 실시하는 것 사의의 간극으로 인해). 곧, 일본의 현 교육개혁의 중심에 서있는 ‘미국식 아동중심교육’은 ‘학력저하’와 ‘계층불평등의 악화’만을 계속해서 생산해낼 뿐인데, 현 문교당국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보지 못하고, 일종의 교육개혁의 환상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 현 교육개혁의 방향에 담긴 몇 가지 논리근거(원인진단과 처방)의 문제점을 실증자료를 들어 하나하나씩 비판한다.
그의 비판을 좀더 덧붙이면, 우선, 아이와 교사가 함께 배운다는 인식은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이나 방법론을 경시하고 지식이라는 제3의 요소를 학생과 교사의 관계 뒤로 제쳐 버리는 것인데, 이는 “근대사회를 살아가는 성인들이 직면한 절망의 산물”로, 그들의 지혜가 막다른 벽에 부딪쳤음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아이들은 모두 성인보다 선하다. 살아가는 최선의 규범은 소박하고 무구한 아이들의 삶이다”라는 낭만적 사고가 지닌 문제이다.
셋째, 지식전달의 중요성을 경시한 활동주의 교육으로 아이들의 학습도, 교사의 학습도 활동에 묻혀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이 정착되는지도 모르는 채 형식적인 활동이 진행된다는 문제로,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새로운 지식을 이해하는 기반이 되는 지식인데, 이를 소홀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컴퓨터를 통한 정보탐색 방법에 아무리 능숙하다고 해도 거기에서 얻은 지식이나 정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수집한 정보는 무의미한 것이다.
넷째, 학력저하문제의 문제인데, 캘리포니아 주의 선례를 보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혜택 받지 못한 마이너리티 아이들이 가장 불이익을 받고 있어, 소외계층의 아이들에게 아동중심주의 교육은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결국, “다른 기관에서 공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서비스가 ‘지적측면’에서의 학생교육”(지식의 이해와 정착을 기반으로 하는)인데, 이러한 역할을 아동중심교육을 추구하는 현 공립학교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특수한 환경에서 성공한 미국과 영국의 일부 선진적 사례를 쫓아 나라 전체의 교육개혁 아이디어로 삼는다는 것은 근시한적 사고로 매우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글쓴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한다.  
학교 현실에 맞게 아래로부터 변화의 동력을 살려주고, 현실에 맞는 방법을 찾도록 해주는 것이 우선이지, 현실조건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정책으로 모든 것을 위에서 의도하는 바대로 어떤 “캠페인”하듯 끌고 가려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일 것이다. 
끝으로, 20세기 초 교육개혁운동을 전개했던 프레네, 코르착 등의 교육실천 사례나, 현재 태국에서 실천 중인 ‘무반덱’ 과 같은 아이들의 자립과 자치에 기초한 교육실험 등은 큰 틀에서 보면 “아동중심교육”이고, 주로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그들의(혹은 그곳의) 교육실천이 어떤 교육성과를 가져왔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글쓴이 역시 제한된 조건이란 단서를 달긴 했지만, 일부 아동중심교육의 성공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에, 문제를 아동중심교육으로만 좁혀본다면, 글쓴이가 아동중심교육에 대한 단편적 이해에 기대어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아닌가란 측면에서, 이 책에 대한 역비판을 제기하는 것도 가능할 듯싶다. <200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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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4-12-06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는 요즘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말을 곱씹고 있습니다.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교사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교사의 질은 교사의 대우, 임용체제의 문제 이전에, 교사교육과 교사가 되는 과정 전체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우선되지 않으면, 어떤 제도적 보완으로도 학교의 개혁은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 교사 교육을 가장 중시하는 것은 학교 운영과 교육과정 운영에 진보적인 방법을 도입할 수 있는 것은 국가도 아니고, 학교도 아닌, 더더군다나 수요자인 학생은 아닌,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표로 어떤 자료로 어떤 수업과정을 거쳐 어떤 결과를 이뤄낼 것인지...

위에서 무조건적으로 열린 수업을 하라는 한마디만 내던지는 무책임한 정책으로는 교실의 해체와 붕괴를 조장하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거든요.

bildung 2004-12-0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덕분에 이름도 지었는데, 댓글도 남겨주셨네요.^^ 교사가 되는 과정 전체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우선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저도 글샘님 서재의 이곳저곳으로 여행한번 떠나겠습니다.

비로그인 2004-12-10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댓글을 쓰는군요! 형 요즘 열심히 책 읽고 있구나. 반성해야 겠다는. 근데 위 책의 번역자는 내가 아는 김미란님인가? 왠지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형이 쓴 내용만으로도 요점이 파악되는구만요! 아 부럽다. 난 언제 이렇게 정리해보나.. 잘 정리해서 올리주세요. 지나가다 읽어라도 보게요.


bildung 2004-12-11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가 아는 그분 맞을거야. 남의 정리는 오독의 지름길^^ 요즘 자꾸 딴 책들에만 손이 가 좀 걱정이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