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모형의 교육관 - 한국의 전통교육
정재걸 지음 / 한국교육신문사(Still)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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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자신이 머리말에서 서구 “근대적 교육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우리의 전통교육에서 찾아야 한다”고 밝힌 바처럼, 이 책의 앞부분은 주로 서구교육의 주된 교육관을 ‘주물모형’과 ‘도토리모형’으로 나누어 설명ㆍ비판하고, 자신의 입장인 ‘만두모형’의 교육관을 설명하는데 할애한다. 이에 책의 앞부분을 읽어가며 ‘만두모형의 교육관’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것이 서구교육과 어떻게 다른지를 나름대로 파악하면 될 것이고, 책의 2부 격인 후반부에서 소개하는 개화기교육, 황민화교육, 미군정기교육, 새교육운동, 60년대 교원노조운동, 발전교육론과 새마을 교육, 국민교육헌장, 80년 7.30교육조치 등은 “교양”의 차원에서라도 한번쯤 읽어두면 좋을 듯싶다. 변변한 한국현대교육사 책 한권 없는 현실에서, 지금의 교육 현실이 어떤 근현대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를 몇 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조금이나마(다이제스트판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각 시대별 교육의 구체적인 특성들과 교육운동들에 대한 인식으로 좀더 깊숙이 들어가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에 의해 [韓國敎育史庫 연구논문] 시리즈물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우리의 근현대교육사에 대한 연구물들은 왠지 90년대초까지의 열기에서 멈춰버린 느낌이다.

그렇다면, 글쓴이가 말하는 “만두모형의 교육관”은 무엇이며, 그것은 서구 교육학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주물모형”과 “도토리모형”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교육학에 대한 선행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게 주물모형과 도토리모형은 그리 낯선 개념은 아닐 것이다. 교육의 개념은 “외부로부터의 형성”(forming from without)과 “내부로부터의 계발”(development from within)의 의미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데, 주로 전자를 강조하는 것을 “주물모형”으로, 후자를 강조하는 것을 “도토리모형”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런 두 입장은 서구 교육학에서 주로 “전통주의적traditional 입장”(교사/교과중심교육으로 이해되는)과 “진보주의적progressive 입장”(아동/경험중심교육으로 이해되는)으로 대립해 온 것으로, 여전히 진행 중인 논쟁이기도하다.

사실, 피터즈나 듀이 등은 자신의 입장에서 양자를 통합하려 시도한 바 있으나, 여전히 피터즈는 전통주의자로, 듀이는 진보주의자라는 양극단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김정환선생님 역시 여러 글과 책들에서 세 가지 교육관을 언급하는데, 전자의 관점은 “만들다”의 교육관에서, 후자의 관점은 “기르다”의 교육관에서 주로 설명되는 속성들이다. 그는 두 교육관 모두 인간교육의 방법이 될 수 없다고, 그 한계를 지적한 하면서, 독일의 슈프랑어와 볼노 등의 논의에 힘입어 “일깨우다(覺醒)”라는 교육관을 이야기한 바 있다. 글쓴이가 우리의 전통교육을 근거로 삼아 “만두모형”이란 대안적인 교육관을 끄집어 낸 것 역시 위와 유사한 차원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두모형의 교육관은 “학습자의 마음 안에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진리가 들어있다는 교육관”으로, 그 비유는 “마음은 본성을 본체로 삼으니, 마음은 본성을 떡이나 만두의 알갱이처럼 가지고 있다”라는 주자의 언급에서 따온 것이다. 곧, “우리 마음은 만두와 같이 그 안에 온갖 잡다한 이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육이란 외부의 지식을 교사로부터 전달받는 것(주물모형)도 아니고, 학습자 자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신장시키는 것(도토리모형)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만두모형에 있어서 교육이란 다름 아닌 “학습자가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여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이러한 개념이 “도토리모형”과 혼동될 수 있다는 점인데, 글쓴이는 다음의 세 측면에서 그것의 구분이 가능하다고 본다. 첫째, 도토리 모형이 점진적이고 누적이라면, 만두모형은 돌발적이고 순간적이라는 점, 둘째 도토리 모형의 교육목표가 자아실현(self realization)에 있다면, 만두모형은 자기극복(自己克服) 혹은 극기(克己)에 있다는 점, 셋째 “만두모형”의 교사는 교육내용을 소유한 주물모형의 교사도 아니요, 조력자인 도토리모형의 교사도 아니라는 점이다. 곧, 교사관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이를 테면, 전통교육에서 교육의 목표는 자신이 스승(“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아 가히 남의 스승이 될만한 자”)이 되는 것인데, 스승의 현존 바로 그 자체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고 또 그것이 달성 가능한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에, 스승(곧, 교사)에 대한 존경이 만두모형의 교육관에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곧 본보기로서의 교사에 대한 존중으로, 학생들은 끊임없이 교사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 하면 교사를 기쁘게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스승은 방과 할의 방법으로 “제자가 깨달음의 문턱에서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고 있을 때 몽둥이로 때리거나, 제자의 귀에 큰 소리를 질러 그 순간 깨달음의 문턱을 넘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는 제자의 학습단계를 정확히 파악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의 만두모형의 교육관에 입각한 배움이 존재하는 학교는 일종의 “도량(道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 마음 안에 존재하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진리를 스승을 따라 배움으로써 깨닫거나, 스승의 방과 할의 방법에 힘입어 문턱을 넘어서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우리 전통교육의 모습이라는 것에 공감이 가면서도, 이것이 혹 개인의 현실도피를 위한 “탈”역사화로 이어지지는 않을까라는 생각도해본다.

참고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글쓴이의 홈페이지에서도 접할 수 있다. (http://vision.taegu-e.ac.kr/~jg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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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지능 - 인간지능의 새로운 이해
하워드 가드너 지음, 문용린 옮김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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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세기 초엽 새교육 당시 비네 등이 실시한 지능검사는 전통적인 교육에서 외면했던 “개인차(이를 테면, 학습능력이 뛰어난 아이와 떨어지는 아이의 구분 등)를 존중하는 교육”을 위한 중요한 근거로 활용된 바 있다. 아울러, 그 당시는 코메니우스나 루소 등이 제기했던 발달단계에 따른 교육을 과학화한 발달심리학(혹은 아동심리학)이 활발히 연구된 때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을 몇 가지로 간추려 보자.
우선, 다중지능이론은 지능을 단일한 지능에 의해 다른 지적인 능력들 모두가 형성된다는 “일반지능(g)”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리측정에 의존하지 않는 여덟 개의 상이한 준거들을 근거로 하여, 지능이 다양하고 독립된 지적인 능력들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곧, 가드너는 “지능이 단일한 능력이고 사람은 “똑똑하든지” 아니면 “둔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신념에 도전”하여, 우리 모두가 언어 지능, 논리 수학 지능, 음악 지능, 신체 운동 지능, 공간 지능, 그리고 인성 지능(대인관계 지능+자성 지능)의 독립된 지능 영역들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인간은 7, 8개에서 12개 정도의 기본적인 지능을 소유한 유기체이고, 지능은 유전, 특정문화와 시대 속에서 제공되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며, 우리 모두는 각자 독특한 양상의 지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드너는 이후에 여기에 자연탐구 지능, 영성 지능, 실존 지능이 추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도덕 영역과 관련해서는 그것에 대한 본질적인 요소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성은 지능의 특정 영역이 아닌 인성, 개성, 의지, 성격에 대한 진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이러한 다중지능이론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명제는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첫째, 우리 모두는 서로 동일하지 않다, 둘째 우리 모두는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곧, 우리 모두는 하나의 종형 곡선을 구성하는 점들이 아니다), 셋째 교육은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기 보다는 그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려고 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곧, “인간 개개인의 차이를 진지하게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다중지능이론의 핵심적인 관점이다.” 이는 “모든 인간이 단일한 지능적 차원에서 배열될 수 없다”는 것으로, “어떤 단일한 교육적 접근은 오직 몇몇의 아이들에게만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일러 준다. 이 역시 지능에 대한 탐구가 “개인차를 존중하는 교육”의 한 근거로 작용할 있다는 측면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세 번째로, 학교에서 “다중지능”이론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스펙트럼 교실”(spectrum classroom)이라는 교육환경의 예로, 이 (유치원)교실은 자연 표본, 말판 게임, 미술 음악 자료 등과 운동, 무용, 집짓기를 할 수 있는 공터를 포함하여 다양한 지능을 활성화시킬 만한 자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에, 아이들은 교실에서 생활하면서 지능에서의 특별한 측면을 보여줄 것이라 가정될 수 있다. 이는 심리 측정들처럼 아이들을 평가 상황에 데려가기보다는 그들에게 직접 가서 평가를 실시하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흥미를 끄는 환경을 조성하고 그들이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자신의 지능 스펙트럼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평가 중심의 사고”에 빠져 “언어적이다” 또는 “공간적이다” 등으로 아이들을 낙인찍지 말아야 한다. 이는 고무적일 수 있기도 하지만 아이를 구속할 위험이 있다.
둘째, 학생들에게 특정 지능의 전형적인 사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 글쓰기를 하도록 한 후, 그 사람들의 지능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하고 수업시간에 발표하도록 할 수 있다.
셋째, 각 지능들을 기본 원리로 하여 방과 후 프로그램을 조직할 수 있다.
넷째, 어떤 학교에서는 상급생들이 다양한 지능들을 활용하여 하급생들에게 특정 개념(지렛대의 기능을 조절하는 원리 같은 것)을 가르치도록 할 수 있다.
다섯째, 특정 지능이 학교활동의 핵심이 되도록 한다.(이를 테면, 인성 지능에 초점을 둔 학교)
이는 “각 개인에게 맞춰진 교육”, 곧 “개인차를 심각하게 고려하여 가능한 한 다양한 정신능력에 공평하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훈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끝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다중지능의 개념과 실행 그 자체가 교육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다중지능의 개념은 이미 설정된 교육기관의 목적과 의도에 유용한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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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지능이론은 지능을 과학적 추론능력과 같은 인지능력으로만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동안 주로 재능(talent)이라 인식되던 음악이나 신체운동, 인성 등을 독립된 지능의 영역으로 다양화한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이 지닌 그러한 다양한 지능의 영역들을 존중하고 개발하는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단일지능이든, 다중지능이든 지능에 바탕을 둔 “개인차를 존중하는 교육”이 “계층(급)차를 존중하는 교육”을 은폐하는(또는 정당화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는 것을 막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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