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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지음, 김기협 옮김 / 민들레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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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현 US의 교육제도는 19세기 프러시아의 새로운 교육제도에 의거하여 마련되었다는 것인데, 프러시아의 새로운 교육제도라는 것은 “아직 마음이 굳어지지 않은 어린 시절 동안 인간을 믿을 수 있는 기계의 부속품으로, 국가로부터 임무와 목적을 부여받은 인간기계로 만들어 버리는 제도”였다. 19세기 초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사에게 진후, 피히테는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란 글을 통해 국가는 이상적인 의무 학교제도를 새로이 만들어 모든 사람이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학교를 통해 프러시아의 통합을 이루려했다. 그 결과 국가의 힘에 떠밀려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강제적인 학교교육이 1819년 프러시아에서 시작되었다. 피히테는 강제적인 학교교육을 통해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고분고분한 광산노동자, 정부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민들”을 길러내 프러시아의 통합을 꾀하고자 했다.
그 제도를 위해 교사훈련에서 강조했던 것은 “첫째, 국가가 아이들의 유일하고 진정한 부모라는 것, 둘째 국가적 교육의 목적은 지적 함양이 아니라 복종과 예속이라는 것, 셋째 교실과 작업장은 단편적인 조각들로 단순화되어 아무리 바보라도 기억하고 작업할 수 있다”는 세 가지 명제였다. 따라서, “점수와 성적표가 말해주는 것은 지적 성장만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복종”을 뜻하는 것이고, “학교교육은 우리의 공식적인 국가종교”이자, “학교란 사람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기보다 사람들을 분류하기 위해”, “지성의 발달이 아니라, 복종과 순종의 사회화”를 위해 세워진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의 도입과 정착에는 “학교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은 학교용 교과서들처럼 서로 엇비슷합니다. 이미 백년 전부터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무지한 사람들보다 이끌어가기 쉽다는 것을 인식한 책략가들”의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남북전쟁 직전 무렵 이래 US 사회는 본질적으로 중앙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프러시아식 의무교육, 정부독점의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변화 이전까지 어느 곳에서도 학교는 별로 중요한 곳이 아니었고, 학교가 있기는 했지만 그 수 역시 많지 않았다.


2. 프러시아식 의무 학교교육 속에서, 공립학교 교사였던 개토는 자신이 그동안 다음의 일곱 가지 죄들을 저질렀음을 고백한다. 

첫 번째 죄는 학생들에게 혼란을 심어준 일이다. 그는 모든 것들의 연관성을 파괴하도록 곧 관계의 단절을 가르쳐왔다. 그가 가르쳤던 행성의 궤도, 노예제도, 형용사, 건축제도법, 무용, 체육, 합창, 회의방법, 소방훈련, 컴퓨터언어, 육성회, 교사 연수, 퇴거 연습, 표준화된 시험, 학교 밖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연령별 격리...이런 것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만사, 만물 사이의 관련성을 해체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자, 학생들에게 이러한 혼란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학교용 “교과서는 군중 통제의 수단”이자, “교육에서 자유로운 의지와 고독을 빼버리는” 훈련을 시키는 것일뿐이다.



두 번째는 학생들을 교실에 갇혀있도록 한 점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있을 곳은 언제나 번호가 매겨져 있는 교실 안이니 교실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의 99퍼센트가 교실 안에 묶여 있도록 교실 분위기를 유도했으며, 아이들이 높은 시험성적을 올리도록 공공연히 격려하고, 잘하기만 하면 더 우월한 반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끼도 던지면서 경쟁을 부추겨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아이들은 갇혀있는 상태를 좋아하고 다른 곳에 설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세 번째로 그가 가르친 것은 무관심이다. 그는 학생들이 교과 진도표 위에서 말고는 완전한 경험이라는 것을 갖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자리에 똑바로 앉아서 온 마음을 기울여 경청하게 하고 제 눈에 들기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게 시킨다.”



네 번째로 그가 가르친 것은 정서적 의존성이다. 그는 동그라미와 ×표, 웃는 얼굴과 찌푸린 얼굴의 도장, 상과 벌, 표창 따위로 아이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미리 정해진 목표에 따르게 가르쳐왔다. 그에게 개성이란 학급 이론에 저촉되는 요인일 뿐이다.



다섯 번째로 그가 가르친 것은 지적 의존성이다. 그에게 착한 학생이란 곧 교사가 어떻게 하라고 시키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무엇 무엇을 공부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문가로 불리는 교사의 몫이며, 그는 아이들이 생각할 내용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무엇을 할지 모르게 하면서 남들이 시키는 일만 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생활양식을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조건부 자신감으로, 아이들의 자신감이 전문가의 의견에 얽매여야 한다고 가르쳐온 것이다. 곧 그는 끊임없이 아이들을 평가하고 분별해냄으로써, 아이들과 부모들이 얼마만큼 해야 만족을 느끼고 불만을 느끼게 되는지를 퍼센트 단위까지 정확히 알려주었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그것도 숫자화하여 남이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일곱 번째는 학생들이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점을 가르쳐왔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공간도, 자기만의 시간도 없다.


이 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공식의 적용을 통해 공식화된 인간, 즉 행동을 예측하고 제어하는 것이 가능한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결국, “제 가장 뛰어난 동료 교사들 중에도, 그리고 제가 만나 본 가장 훌륭한 학부모들 중에도, 교육이 다른 방법으로도 행해질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형 학교에서의 정부 독점 의무교육이 거둔 위대한 승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개토는 아래의 말들에서처럼 “교육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에서 그 대안을 찾는다. 


 “공교육에 어떻게든 자유시장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 해결의 길을 찾는 제일 그럴싸한 방향입니다. 문중門中의 학교들, 소규모의 기업적 학교들, 종교계 학교들, 기술학교, 농업학교들이 다양하게 병립해서 정부교육과 경쟁하는 자유시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그리는 학교교육의 자유시장이란, 남북전쟁 이전에 이 나라에 있었던 상황과 똑같은 것입니다. 자기에게 맞다고 생각되는 교육의 종류를 학생들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독학도 선택의 한 갈래가 될 수 있겠죠.”



“뉴 잉글랜드 사람들은 함께 살고 싶고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일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도 그 지역 전체가 물질적으로도, 지성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기막힌 번영을 누린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 일을 잘 알아서 처리하면 공적인 일도 어떻게든 잘 처리되는 요술이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접촉할 수 없는 머나먼 중앙부에서 보내 오는 지시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가운데 우리는 조합교회 원리의 가르침을 거듭거듭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조화로운 집단 속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한 인간은 그 인격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다는 가르침 말입니다.” 



 공교육(또는 국가관리의 학교교육)의 제도적 속성이 대부분의 교사들로 하여금 개토 자신과 같은 “일곱 가지 죄”를 저지르게 하고 있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학교교육이 제도화되기 이전의 “다양성”과 “선택”에 토대를 둔 교육체제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글쓴이의 입장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공립학교 비판에 대한 해결의 길을 다양성과 선택이라는 시장원리에서 찾고자 하는 것, 그리 새로운 결론은 아닐 것이다.<07-4-12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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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죽었다 한마당 글집 3
에버레트 라이머 지음, 김석원 옮김 / 한마당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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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일리히와 나눈 15년간의 대화가 바로 이 책을 나오게 한 원인이라는 라이머의 진술처럼, 이 책의 많은 부분들은 일리히의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의 내용과 비슷하다. 저자 자신이 “일리히 조차도 부분적으로는 나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공통된 문제의식의 다른 편제란 생각이다.
 
Ⅱ-1. 이를 테면, 그가 문제로 삼고 있는 학교 역시 ‘제도적 장치로서의 학교’, 곧 “일정한 연령집단(취학연령 규정)이, 단계적인 교육과정(표준화된 수업순서, 표준화된 능력과 성과측정)을 공부하기 위해 교사(질문보다 정설定說만을 제시하는)가 감독하는 교실(시공간의 규정과 통제)에 출석할 것이 요구되는 제도”이다. 이러한 “제도적인 차원의 학교교육은 민족국가의 발전과 함께 도래한 것으로, OO 민족국가라는 건축물의 설계도에 가장 적합한 시민을 만들어 내는 데 목표”가 있었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확대된 이유는 “현대사회의 여러 제도는 기존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무거운 짐을 떠맡고 있는데, 이 제도 중에서 학교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곧, “학교는, 사회구성원 전체를 위한 것인 양 가장하는 사회의 현실과 신화를 조화시키는 의식(儀式)을 찬양한다. 학교는 인간을 전문화된 제도로서 기술과 가치의 관점에서 그들을 선택하고 형성해간다. 학교는 그 자체의 위계질서적인 구조를 통하여 권력과 특권이 하나로 통합된 사회의 위계질서에 순응하도록 학생들을 길들이며”, “학생들에게 다른 사회기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Ⅱ-2. 덧붙여, “교육을 위한 국가기금(國家基金)의 혜택은 현재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학교교육은 기술문명사회에서 보편적인 종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서, 그 사상을 전파하고 구체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상을 받아들이게 유도하고,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어, “교육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활 기회life chance에 있어서 학교교육의 일률적인 독점을 배격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학교는 <기회평등>, <자유>, <진보>, <능률>에 대한 사회적 신화와 이데올로기를 합리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들에서도 비슷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Ⅲ-1. 결국, “학교가 교육의 유일한 방법으로 독점적 위치를 굳히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사람과 지식을 조작가능한 대상물을 다루듯이 취급”하고 있는데, 이 과정의 가장 큰 위험은 “(학교)교육과정으로 조작 배출되는 인간이 사회적 지배가치와 계층화된 질서의 교의(敎義)의 노예가 되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운명을 지배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는데 있다. 이상의 제도화된 학교에서 흔히 학교 찬성론자들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다음의 논리들은 그릇된 신화일 뿐이다(일리히가 기능교육과 자유교육 모두가 무능하다고 지적한 바처럼). 1) “학교가 없다면 어린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책 읽는 법이라도 배울 수 있겠는가?”(실제에 있어서 문자 해득력은 학교교육을 받기 이전에 익히는 것이 보통이다), 2)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배우지 못하는 개념들을 배운다”(이는 학교 외 다른 학습 환경이 가져다주는 학습 효과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3) “학교가 문법이나 수학 및 과학의 이론, 그리고 예술을 가르친다”(그런 것을 과연 학교에서 더 많이 배울 수 있을까란 반론이 가능하다), 4) “학교는 유년시절에서 성인 생활로 건너가는 데 필요한 교량의 역할을 하며, 제멋대로 자란 어린아이들을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변화시켜 준다.”
Ⅲ-2. 이에, 학교제도는 교육자원(여러 가지 형식의 기록체제가 거의 모든 사람에 의해 언제라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편성하는 도서관 같은)과 기술 모델(컴퓨터에 의한 수업 같은 것(CBI같은), 기술 시범을 보일 수 있는 역할모델) 그리고 동료집단(공통된 관심사를 지닌)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하며, 그렇게 됨으로써 다음의 세 유형의 교육자가 꼭 필요하게 된다. 1) 교육자원망의 설계자와 관리자, 2) 개인적인 교육계획을 수립하고 교육적인 어려움을 진단하고 그 대책을 수립할 수 있는 교육자, 3) 각 학업 분야의 지도자. 이러한 대안적 체제는 일리히가 말하는 네 가지  ‘학습 네트워크’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들이다.

Ⅳ. 헨티히가 [왜 학교에 가야하나요?]에서 학교에 가야한다고 드는 이유나(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지적하며), 일리히와 라이머가 “탈학교”를 주장하며, 자유로운 “학습”(“교육”이기보다는)이 가능한 교육체제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 헨티히는 그것을 “학교”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이고, 일리히와 라이머는 제도화된 학교의 독점에서 벗어난(탈脫학교된), 새로운 교육체제에서 가능하다는 것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제도화된 학교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어떤 형태의 교육체제가 공공자금의 낭비 없이 교육의 “공공성”을 유지하며, 참된 “배움”을 가능하게 할것인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일리히와 라이머가 던져주었다고 본다. 그런데, 라이머가 자신이 정의한 학교 형태에 대한 반작용의 예로, 섬머힐, 퍼시픽 고등학교Pacific High School, 자유학교, 야외학교를 든 것을 보면(이는 지금의 제도권밖 대안학교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제도화된 학교의 교육독점”이지, 학교라는 형태 자체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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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인간의 욕구를 제도적으로 충족되게 만들어 통제하는 방식은 기억해두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이는 학교뿐 아니라, 건강, 여행 등 다른 여러 가지 인간의 욕구에 대해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1.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재화나 서비스를 규정하고(학교는 교육education을 학교활동schooling으로 규정),
2. 이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 이러한 규정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며(사람들은 교육을 학교활동과 동일시하도록 유인된다),
3. 필요로 하는 사람 중에 일부분은 그 생산물을 향유할 수 없도록 배제해 버리며(어느 수준에 이르면 단지 일부 사람들만이 다닐 수 있게 된다),
4.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자원을 매점매석한다(학교는 교육에 유용한 자원을 매점매석한다).
<200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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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의 환상 학력을 묻는다 3
가리야다 케히코 지음, 김미란 옮김 / 북코리아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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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접할 수는 없지만, 일본인이 쓴 교육관련 책들을 보면 색다른 느낌이 든다. 예전 [교육개혁을 디자인한다](공감, 2001)를 읽었을 때처럼, 비슷한 현실 인식인 듯 하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들을 생각하도록 건드려준다. 초등학교 단계에서 정부주도의 ‘열린 교육’이 전개되었을 때, 월간조선에서 ‘정치적’인 논자로 끌어들여 언론플레이를 시킨 황용길의 [열린교육이 아이들을 망친다]의 선정성이 생각나 살까말까를 망설였던 책이다(책값 9,500원 역시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소위 ‘전통적 입장의 교육(이를테면, 교과중심교육 혹은 교사중심교육)’과 ‘진보적 입장의 교육(이를테면 경험중심교육 혹은 아동중심교육)’간의 대립과 논쟁은 사실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미야자와의 말을 빌려 글쓴이가 비판으로 삼는 아동중심교육을 우선 개념화하면, 그것은 일종의 ‘오픈 어프로치’로 “학생 개개인의 흥미, 관심에 따라 자유로운 학습을 전개함으로써 교사와 학생이 같이 배워가는 것으로, 학생 스스로가 필요한 지식을 선택하여 스스로 지식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전통적 어프로치’는 “가르쳐야 할 내용(지식)이 이미 정해져 있어 이를 교사가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중간치인 ‘프로세스 어프로치’는 “교사는 지식과 학생 사이를 이어 주는 역할을 하며, 학생은 능동적으로 지식을 배우지만 이는 교사를 통한 것으로 지식의 내용은 학생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미 정해 놓은 것”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읽을 수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아동중심교육(특히, 위에서 개념화한)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다른 하나는 교육개혁이 어떤 형태로 진행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발언이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주로 전통적 입장에서 아동중심교육을 비판하는 이들의 논리를 글쓴이 역시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며, 그래도 한 가지 주목할 바는 아동중심교육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학생들 대부분이 소외계층의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계층차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일 것이다. 글쓴이는 소외계층의 아이들에게 아동중심교육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후자의 측면에서는 교육개혁이 정확한 원인의 진단과 그에 따른 대응(처방)에 따라 이뤄져야 하는 것이고, 그렇다하더라도 그것을 나라 전체의 교육개혁 아이디어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란 점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내용을 정리해둔다.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입시위주 주입식교육의 폐단(“입시경쟁→주입식교육→점수에 따른 획일적 평가→서열화와 입시스트레스→교육문제의 발생”이라는 도식)을 없애기 위한 대안으로 아동중심교육에 기댄 교육개혁에 경도되어있다는 것이 글쓴이의 입장인데, 글쓴이가 보기에 이는 잘못된 현실 진단이다. 따라서, 대안으로 제시되는 일본 교육개혁의 핵심인, 여유(교과내용의 삭감을 통한), 살아가는 힘(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과 문제해결력을 길러주는 것), 종합학습(체험학습 위주의)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들에게 부여된 여유가 자기학습으로 연결되지 않아, 결국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해 학력저하로 이어지고, 그런 교육으로 인해 계속 피해를 보는 학생들은 결국 소외계층의 아이들로 교육 불평등이 점점 심화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 현실 조건의 마련 없이 이상만을 가지고 실행하려다보니 현실의 벽에 부딪치며 문제상황만을 만들어 내고있다(이상을 말하는 것과 이상을 실시하는 것 사의의 간극으로 인해). 곧, 일본의 현 교육개혁의 중심에 서있는 ‘미국식 아동중심교육’은 ‘학력저하’와 ‘계층불평등의 악화’만을 계속해서 생산해낼 뿐인데, 현 문교당국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보지 못하고, 일종의 교육개혁의 환상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 현 교육개혁의 방향에 담긴 몇 가지 논리근거(원인진단과 처방)의 문제점을 실증자료를 들어 하나하나씩 비판한다.
그의 비판을 좀더 덧붙이면, 우선, 아이와 교사가 함께 배운다는 인식은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이나 방법론을 경시하고 지식이라는 제3의 요소를 학생과 교사의 관계 뒤로 제쳐 버리는 것인데, 이는 “근대사회를 살아가는 성인들이 직면한 절망의 산물”로, 그들의 지혜가 막다른 벽에 부딪쳤음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아이들은 모두 성인보다 선하다. 살아가는 최선의 규범은 소박하고 무구한 아이들의 삶이다”라는 낭만적 사고가 지닌 문제이다.
셋째, 지식전달의 중요성을 경시한 활동주의 교육으로 아이들의 학습도, 교사의 학습도 활동에 묻혀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이 정착되는지도 모르는 채 형식적인 활동이 진행된다는 문제로,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새로운 지식을 이해하는 기반이 되는 지식인데, 이를 소홀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컴퓨터를 통한 정보탐색 방법에 아무리 능숙하다고 해도 거기에서 얻은 지식이나 정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수집한 정보는 무의미한 것이다.
넷째, 학력저하문제의 문제인데, 캘리포니아 주의 선례를 보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혜택 받지 못한 마이너리티 아이들이 가장 불이익을 받고 있어, 소외계층의 아이들에게 아동중심주의 교육은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결국, “다른 기관에서 공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서비스가 ‘지적측면’에서의 학생교육”(지식의 이해와 정착을 기반으로 하는)인데, 이러한 역할을 아동중심교육을 추구하는 현 공립학교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특수한 환경에서 성공한 미국과 영국의 일부 선진적 사례를 쫓아 나라 전체의 교육개혁 아이디어로 삼는다는 것은 근시한적 사고로 매우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글쓴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한다.  
학교 현실에 맞게 아래로부터 변화의 동력을 살려주고, 현실에 맞는 방법을 찾도록 해주는 것이 우선이지, 현실조건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정책으로 모든 것을 위에서 의도하는 바대로 어떤 “캠페인”하듯 끌고 가려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일 것이다. 
끝으로, 20세기 초 교육개혁운동을 전개했던 프레네, 코르착 등의 교육실천 사례나, 현재 태국에서 실천 중인 ‘무반덱’ 과 같은 아이들의 자립과 자치에 기초한 교육실험 등은 큰 틀에서 보면 “아동중심교육”이고, 주로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그들의(혹은 그곳의) 교육실천이 어떤 교육성과를 가져왔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글쓴이 역시 제한된 조건이란 단서를 달긴 했지만, 일부 아동중심교육의 성공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에, 문제를 아동중심교육으로만 좁혀본다면, 글쓴이가 아동중심교육에 대한 단편적 이해에 기대어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아닌가란 측면에서, 이 책에 대한 역비판을 제기하는 것도 가능할 듯싶다. <200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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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4-12-06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는 요즘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말을 곱씹고 있습니다.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교사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교사의 질은 교사의 대우, 임용체제의 문제 이전에, 교사교육과 교사가 되는 과정 전체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우선되지 않으면, 어떤 제도적 보완으로도 학교의 개혁은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 교사 교육을 가장 중시하는 것은 학교 운영과 교육과정 운영에 진보적인 방법을 도입할 수 있는 것은 국가도 아니고, 학교도 아닌, 더더군다나 수요자인 학생은 아닌,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표로 어떤 자료로 어떤 수업과정을 거쳐 어떤 결과를 이뤄낼 것인지...

위에서 무조건적으로 열린 수업을 하라는 한마디만 내던지는 무책임한 정책으로는 교실의 해체와 붕괴를 조장하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거든요.

bildung 2004-12-0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덕분에 이름도 지었는데, 댓글도 남겨주셨네요.^^ 교사가 되는 과정 전체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우선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저도 글샘님 서재의 이곳저곳으로 여행한번 떠나겠습니다.

비로그인 2004-12-10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댓글을 쓰는군요! 형 요즘 열심히 책 읽고 있구나. 반성해야 겠다는. 근데 위 책의 번역자는 내가 아는 김미란님인가? 왠지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형이 쓴 내용만으로도 요점이 파악되는구만요! 아 부럽다. 난 언제 이렇게 정리해보나.. 잘 정리해서 올리주세요. 지나가다 읽어라도 보게요.


bildung 2004-12-11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가 아는 그분 맞을거야. 남의 정리는 오독의 지름길^^ 요즘 자꾸 딴 책들에만 손이 가 좀 걱정이긴하다.
 
페다고지 -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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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의 원제목인 [억압받고 있는 자들의 교육(학)(Pedagogy of the Oppressed)]이 말해주듯, “우리가 어떻게 억압의 상황을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그의 교육론을 읽을 필요가 있다. “억압자는 그 권력을 피억압자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힘으로 만들지 못”하며, “오직 피억압자의 약함으로부터 비롯된 권력만이 양측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자들의 교육(학)(이른바, ‘은행저금식 교육’)은 억압체제의 존속을 위한 수단으로만 복무할 뿐 결코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교육(학)이 아니다.




“억압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민중은 먼저 억압의 원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변혁의 행동을 통해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고 더 완전한 인간성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교육(학)은 “억압과 억압의 원인들을 피억압자가 성찰할 대상으로 만들고”- 프레이리에게 “대화란 인식론적 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그러한 “앎의 과정에는 개인적 성격만이 아니라 사회적 성격”이 포함된다-, “이 성찰로부터 피억압자가 자신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여해야 할 필연성이 도출될 것이며, 또한 그 투쟁 안에서 그 교육학은 새로이 다듬어 질 것이다.” 그렇게 다듬어 지는 교육(학)은 ‘문제제기식 교육(혹은 대화)’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프레이리의 문제제기식 교육에 비추면, 해방 과정을 이끄는 대부분의 혁명 지도부가 “억압자가 사용하는 ‘교육’모델을 모방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는 것, 곧 “해방과정에서 교육학적 행동을 부정하고 선전을 이용해서 피억압자들을 설득하려고 한 것”은 중요한 문제다. “피억압자의 신념은 혁명 지도부가 가져다주는 선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의식화에서 비롯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자신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필자)투쟁은 시작”되는데, “선전, 책략, 조작은- 이는 모두 지배를 위한 무기들이다- 인간성 회복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유일한 “인간화 교육의 방법은 교사(이 경우에 혁명 지도자)가 학생(이 경우에 피억압자)을 조작할 수 있는 도구로 여기는 게 아니라 학생 자신의 의식을 표현하게 만드는 데 있다.” “피억압자의 정치적 행동은 순수한 의미에서 교육적 행동, 곧 피억압자와 함께 하는 행동”인 “공동지향적인 교육”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교육은  A가  B를 위해, 또는  A가  B에 관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가 함께 행하는 것이다.” “행위자는 단순한 행위자가 아니라 상호의사소통 속의 행위자”, “혁명 지도부는 민중 없이, 또는 민중을 위해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사고하는 것” 등 달리 표현되는 말들이긴 하지만, 모두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억압적 세계에 묶고 있는 주술과 신화의 탯줄’을 끊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모순들을 인식하는 법을 배우고, 현실의 억압적 요소들에 맞서 행위 할 수 있게 된다. 곧, “현실이 제 모습을 드러내면 인간은 침잠 상태에서 탈출하여, 현실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현실 개입-역사적 자각-은 탈출구로부터 한 단계 전진한 것이며, 상황에 대한 의식화의 결과이다. 의식화는 모든 탈출의 특징인 자각의 자세를 심화시킨다.”




정리하면, “억압자가 억압하기 위해 억압적 행동이론을 필요로 한다면, 피억압자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도 역시 행동이론이 필요하다”는 말에서 ‘행동이론’을 교육이론으로 바꿔 이해한다면, 이 책은 피억압자의 해방을 위한 행동이론으로서의 교육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의사소통 없이 ‘성명’만으로 혁명을 수행한 다음, 혁명이 성공하면 그 뒤에 철저한 교육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은 프레이리에게 옳지 않은 생각이다. 곧, 그에게는 “대화의 관계가 따로 있고, 혁명의 단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혁명 활동의 본질이 대화”이다. 그리고 이는 “권력을 획득한 뒤 시작할 새로운 교육”이 아니며, 일종의 “문화혁명을 준비하는 문화활동”으로서의 교육이다. 이러한 사회변화의 측면을 놓치고 그의 교육론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발간사를 쓴 마세두의 표현처럼 “사이비 비판적 교육자”들에 의해 “그의 혁명적 정치학을 대화적 방법이라는 공허한 내용으로 제한해 버리는” 잘못을 우리 역시 범하게 될 것이다.




몇 가지 생각나는 바를 덧붙이면, 우리 역시 프레이리 등의 비판적 교육학자들이 교직과정에서 잘 다뤄지지 않고, 다뤄진다해도 ‘대화식 방법’과 같은 제한된 범위로만 이해되는 까닭은 30주년 기념판의 발간사를 쓴 마세두가 표현한 바처럼, “교육학교들이 대개 프레이리가 평생을 통해 반대했던 이데올로기와 관습을 대변하는 실증주의적이고 매니지먼트한 모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지배 권력이 언제나 학생들의 의식화에 반대하는 것 역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란 점이다. 학생들의 “타자(억압자)를 위한 존재”에서 “자신을 위한 존재”로의 변화는 곧, “억압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고, 그들이 신봉하는 은행 저금식 교육관은 학생의 의식화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화와 관련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의식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화를 한다는 명목으로 ‘은행 저금식 교육’의 형태를 되풀이하는 일일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올바른 독해나 프레이리에 대한 이해의 길잡이가 필요하다면, 앞의 마세두의 발간사가 도움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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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큰 틀에서 그의 교육론을 정리했다. 피억압자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이중성의 문제(파농과 멤미, 헤겔의 주인-노예관계 등과 관련시켜), 후설, 사르트르 등과 관련된 그의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해석, 마오쩌둥, 레닌, 게바라 등 다양한 혁명가들의 논의를 끌어들이는 그의 혁명론에 대한 좀더 자세한 분석과 적합성에 대한 검증이 뒤따라야겠지만, 이는 그의 후속작업을 따라가며 차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그의 글에서 어려움을 느끼거나 단순한 교육학 책이라 생각하다 몇 장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은, 우선 그가 왜 이 책을 저술했는가에 대한 배경이해가 생략됐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아울러, 자신이 피부로 느끼는 현 ‘억압’의 정도와 프레이리가 끌어들이는 인물들에 대한 선이해(혹은 관심)의 부족 역시 그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0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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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없는 사회
이반 일리히 지음, 심성보 옮김 / 미토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Ⅰ. 우선, 몇 가지 용어들의 의미를 분명히 해보자.
첫째, 일리히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학교는 “특정의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고, 의무적인 커리큘럼에 풀타임 출석을 요구하는 교사가 관계하고 있는 과정”, 곧 현재의 제도화된 학교를 의미한다.

둘째,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脫학교(deschooling)”의 의미는 학교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단일종파에 의한 종교의 독점이 폐지됐던 것처럼, 학교에 의한 교육독점을 폐지하자는 것, 곧, 미국에서 교회가 탈(脫)국가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 역시 국가관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학교의 탈국가화” 주장이다. 이는 학교에 독점적으로 공공재원을 쏟아 부으며 낭비하지 않는 것이고, 교회나 학교에 출석하는 이들에게 어떤 사회적 특권을 주던 시스템을 없애는 일이다.
참고로, 이후에(1995) 일리히는 자신의 주장이 학교제도를 폐지하자는 오해를 사람들에게 불러 일으켰다고 하면서 자신의 긴급한 과제는 “교육을 무료로 즐기는 선물이나 서비스라기보다 강제된 의무사항으로 고착화시키는 흐름을 역전시키는 것”에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그가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이 갖는 위험성이 학교를 폐지하고 학교 밖에서 교육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결된다”는데 있다고 지적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학교의 안이든 밖이든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교육이 전문가에 의해 감독되고, 학생은 완전히 도움을 받는 수동의 형태로 취급되는 교육”에 있다(이반 일리히, 1997:171).


Ⅱ. 그에게 “강제된 의무사항으로 고착화된 교육”이 지배적인 “학교화된 사회”는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자신의 인생지도, 세계관 형성, 합법성과 비합법성의 구분 등을 학교라는 제도에 의존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병원이라는 제도적 기관에서 치료받지 않고, 개인 스스로 치료하는 행위를 무책임한 것으로 여기도록 하여, 병원에 치료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학교에 가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게 하여, 학교가 배움을 제공하는 하나의 특권화된 곳이라 여기게 한다. 이러한 제도에 대한 의존(특히, 학교)이 문제인 이유는, “한번 학교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들은 학교 이외의 제도의 필요성도 쉽사리 받아들이게 된다. 젊은 사람이 일단 스스로의 상상력을 커리큘럼에 따른 교수활동에 의해서 형성하는 데 버릇이 들게되면 그들은 어떠한 유형의 제도적 계획도 받아들이는 상태가 된다. 그들은 ‘교수’받음으로 해서 상상력의 발전이 억제된다.......이와 같이 책임을 자신으로부터 제도에 전가해버리게 되면 사회는 틀림없이 퇴보해갈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의무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둘째, 특권화된 학교가 수행하는 3중의 기능이다. 곧, “학교화된 사회”에서 학교는 사회적 신화(소비화, 물신화)의 저장소의 기능, 그 신화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제도화하는 일, 그리고 그 신화와 현실간의 차이를 재생산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의례의 장소로 기여한다는 것이다.

셋째, 학교에 많은 공적자금을 투입해도 빈민층의 교육은 개선되지 못하고, 특정한 아이들에게만 공적자금이 사용된다. 곧, 학교에서 혜택을 받는 이들은 그 혜택을 누릴 준비와 조건이 갖추어진 부유한 아이들이다. 그는 이를 공적자금으로 건설된 고속도로의 혜택이 결국 자동차를 지닌 이들에게만 돌아가지, 자동차를 부릴 여유가 없는 이들에겐 거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본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학업성적을 개선시키기 위해 투여되는 비용이 불충분하며, 투여된 자금 역시 비효율적으로 사용되어 빈곤층을 위해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빈곤층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학교)제도의 혜택이 아닌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자금이라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가 보기에 교육상의 불리함은 현재의 학교 내 교육에 의존해서는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넷째, 위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을 학교로 끌어들이는 기제가 필요한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다음의 두 가지이다. 우선, 학교가 학업성취(자격)의 공인기구로 기능하면서, 개인의 자격(능력)과 (학교)이력(履歷)을 동일시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할당하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한 한 방안으로 일리히는 자격과 (학교)이력을 분리하기 위해 학력조사를 금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문제는 학업성취의 평가준거가 되는 교육과정(커리큘럼)인데, 그것이 다름 아닌 상품처럼 “패키지된 (지배)가치”라는데 있다. 곧, 현재의 패키지된 (지배)가치를 얼마나 잘 숙지했느냐가 곧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된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학습은 학교수업(자격증을 지닌 교사의 가르침)의 결과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라는 신화의 조장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은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고, 의도적 학습의 상당부분도 계획적 교육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

다섯째, 이러한 사회에서 학교는 기능(skill)교육에도 무능하고,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에도 무능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곧, “교육” 기능의 상실이다.

Ⅲ. 그렇다면, 일리히가 말하는 제도의존적인 삶에서 벗어난 “脫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가 지향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일리히에게 이는 “공생(혹은 상호친화적, conviviality)”의 제도, 곧 자율적이며 창조적인 교류가 가능하고, 개인의 자유가 실현되는 사회이다. 좀더 덧붙이면, 이 사회에서 가능한 학교를 대치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대안은 모든 사람들에게 현재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동일한 학습의욕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그 기회를 동등하게 나눠가질 수 있는 네트워크나 서비스를 갖는 것이며, “탈학교 사회”는 우발적인 교육이나 비공식적(informal) 교육에의 새로운 접근방법을 의미한다.
그리고, 훌륭한 교육제도는 1) 학습하고자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인생의 어느 때에도 학습에 필요한 수단이나 교재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 2) 자신이 알고 있는 일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어가지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 그러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 3) 공중(公衆)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학습을 위한 네 가지 네트워크를 통해 가능한데, 그것은 교육 목적 달성을 위해 참고자료를 서비스하는 것(도서관 등), 기능(skill)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기능교환소(일종의 역할 모델링) 설치, (학습활동을 위한)동료 맺어주기(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넓은 의미에서의 교육자에 대한 자료 서비스이다.

Ⅳ.
정리하자면, 현재의 제도화된 학교는 현 사회의 물신(物神)화, 소비화를 조장하며, 그것의 가치체계를 재생산하는 의례(儀禮)기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이 계속해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학교에 개인들을 계속해서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한데, 그 방안이 바로 “학교화된 사회”를 조장하여 그들로 하여금 학교의존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학교를 의무화하고, 그곳에 학력인정의 특권을 부여하여 학교가 사회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도록 한다. 이에, “학교이력(履歷)=개인능력”이란 공식이 조장되고, 개인들은 의례기관인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학교가 수행하는 3중의 기능에 따라 현 지배가치의 신화를 계속해서 내면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의례기관에서 어떤 기능(skills)의 효율적인 습득이나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 역시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를 떨쳐내기 위해서는 제도화된 학교의존적인 삶에서 벗어나 교육제도를 새롭게 재편하는 일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일리히가 주장하는 “학교에서 벗어난 사회”이며, 학습을 위한 네 가지 네트워크를 통해 자유롭고 즐거운 배움이 존재하는 “공생의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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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학습이나 사회적 평등도 학교교육이라는 의례에 의해서 촉진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교육개혁을 시작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 거기에서 어떤 것이 가르쳐질지라도 의무제의 공교육이 필연적으로 소비사회를 재생산한다는 것을 우선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소비자 사회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학교에 많은 공적자금을 투입해도 빈민층의 교육은 개선되지 못하고, 특정한 아이들에게 공적자금이 사용된다.”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이 “교육공공성”에 있다면, 과연 어떤 체제가 그것을 담보하기 좋은 조건인지는 한번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의 의견에 어떤 논쟁점을 제기하기보다는 일단 나름대로 이해한 바를 정리해 둔다. 200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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