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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지음, 김기협 옮김 / 민들레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현 US의 교육제도는 19세기 프러시아의 새로운 교육제도에 의거하여 마련되었다는 것인데, 프러시아의 새로운 교육제도라는 것은 “아직 마음이 굳어지지 않은 어린 시절 동안 인간을 믿을 수 있는 기계의 부속품으로, 국가로부터 임무와 목적을 부여받은 인간기계로 만들어 버리는 제도”였다. 19세기 초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사에게 진후, 피히테는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란 글을 통해 국가는 이상적인 의무 학교제도를 새로이 만들어 모든 사람이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학교를 통해 프러시아의 통합을 이루려했다. 그 결과 국가의 힘에 떠밀려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강제적인 학교교육이 1819년 프러시아에서 시작되었다. 피히테는 강제적인 학교교육을 통해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고분고분한 광산노동자, 정부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민들”을 길러내 프러시아의 통합을 꾀하고자 했다.
그 제도를 위해 교사훈련에서 강조했던 것은 “첫째, 국가가 아이들의 유일하고 진정한 부모라는 것, 둘째 국가적 교육의 목적은 지적 함양이 아니라 복종과 예속이라는 것, 셋째 교실과 작업장은 단편적인 조각들로 단순화되어 아무리 바보라도 기억하고 작업할 수 있다”는 세 가지 명제였다. 따라서, “점수와 성적표가 말해주는 것은 지적 성장만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복종”을 뜻하는 것이고, “학교교육은 우리의 공식적인 국가종교”이자, “학교란 사람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기보다 사람들을 분류하기 위해”, “지성의 발달이 아니라, 복종과 순종의 사회화”를 위해 세워진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의 도입과 정착에는 “학교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은 학교용 교과서들처럼 서로 엇비슷합니다. 이미 백년 전부터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무지한 사람들보다 이끌어가기 쉽다는 것을 인식한 책략가들”의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남북전쟁 직전 무렵 이래 US 사회는 본질적으로 중앙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프러시아식 의무교육, 정부독점의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변화 이전까지 어느 곳에서도 학교는 별로 중요한 곳이 아니었고, 학교가 있기는 했지만 그 수 역시 많지 않았다.
2. 프러시아식 의무 학교교육 속에서, 공립학교 교사였던 개토는 자신이 그동안 다음의 일곱 가지 죄들을 저질렀음을 고백한다.
첫 번째 죄는 학생들에게 혼란을 심어준 일이다. 그는 모든 것들의 연관성을 파괴하도록 곧 관계의 단절을 가르쳐왔다. 그가 가르쳤던 행성의 궤도, 노예제도, 형용사, 건축제도법, 무용, 체육, 합창, 회의방법, 소방훈련, 컴퓨터언어, 육성회, 교사 연수, 퇴거 연습, 표준화된 시험, 학교 밖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연령별 격리...이런 것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만사, 만물 사이의 관련성을 해체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자, 학생들에게 이러한 혼란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학교용 “교과서는 군중 통제의 수단”이자, “교육에서 자유로운 의지와 고독을 빼버리는” 훈련을 시키는 것일뿐이다.
두 번째는 학생들을 교실에 갇혀있도록 한 점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있을 곳은 언제나 번호가 매겨져 있는 교실 안이니 교실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의 99퍼센트가 교실 안에 묶여 있도록 교실 분위기를 유도했으며, 아이들이 높은 시험성적을 올리도록 공공연히 격려하고, 잘하기만 하면 더 우월한 반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끼도 던지면서 경쟁을 부추겨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아이들은 갇혀있는 상태를 좋아하고 다른 곳에 설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세 번째로 그가 가르친 것은 무관심이다. 그는 학생들이 교과 진도표 위에서 말고는 완전한 경험이라는 것을 갖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자리에 똑바로 앉아서 온 마음을 기울여 경청하게 하고 제 눈에 들기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게 시킨다.”
네 번째로 그가 가르친 것은 정서적 의존성이다. 그는 동그라미와 ×표, 웃는 얼굴과 찌푸린 얼굴의 도장, 상과 벌, 표창 따위로 아이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미리 정해진 목표에 따르게 가르쳐왔다. 그에게 개성이란 학급 이론에 저촉되는 요인일 뿐이다.
다섯 번째로 그가 가르친 것은 지적 의존성이다. 그에게 착한 학생이란 곧 교사가 어떻게 하라고 시키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무엇 무엇을 공부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문가로 불리는 교사의 몫이며, 그는 아이들이 생각할 내용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무엇을 할지 모르게 하면서 남들이 시키는 일만 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생활양식을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조건부 자신감으로, 아이들의 자신감이 전문가의 의견에 얽매여야 한다고 가르쳐온 것이다. 곧 그는 끊임없이 아이들을 평가하고 분별해냄으로써, 아이들과 부모들이 얼마만큼 해야 만족을 느끼고 불만을 느끼게 되는지를 퍼센트 단위까지 정확히 알려주었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그것도 숫자화하여 남이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일곱 번째는 학생들이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점을 가르쳐왔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공간도, 자기만의 시간도 없다.
이 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공식의 적용을 통해 공식화된 인간, 즉 행동을 예측하고 제어하는 것이 가능한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결국, “제 가장 뛰어난 동료 교사들 중에도, 그리고 제가 만나 본 가장 훌륭한 학부모들 중에도, 교육이 다른 방법으로도 행해질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형 학교에서의 정부 독점 의무교육이 거둔 위대한 승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개토는 아래의 말들에서처럼 “교육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에서 그 대안을 찾는다.
“공교육에 어떻게든 자유시장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 해결의 길을 찾는 제일 그럴싸한 방향입니다. 문중門中의 학교들, 소규모의 기업적 학교들, 종교계 학교들, 기술학교, 농업학교들이 다양하게 병립해서 정부교육과 경쟁하는 자유시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그리는 학교교육의 자유시장이란, 남북전쟁 이전에 이 나라에 있었던 상황과 똑같은 것입니다. 자기에게 맞다고 생각되는 교육의 종류를 학생들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독학도 선택의 한 갈래가 될 수 있겠죠.”
“뉴 잉글랜드 사람들은 함께 살고 싶고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일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도 그 지역 전체가 물질적으로도, 지성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기막힌 번영을 누린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 일을 잘 알아서 처리하면 공적인 일도 어떻게든 잘 처리되는 요술이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접촉할 수 없는 머나먼 중앙부에서 보내 오는 지시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가운데 우리는 조합교회 원리의 가르침을 거듭거듭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조화로운 집단 속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한 인간은 그 인격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다는 가르침 말입니다.”
공교육(또는 국가관리의 학교교육)의 제도적 속성이 대부분의 교사들로 하여금 개토 자신과 같은 “일곱 가지 죄”를 저지르게 하고 있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학교교육이 제도화되기 이전의 “다양성”과 “선택”에 토대를 둔 교육체제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글쓴이의 입장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공립학교 비판에 대한 해결의 길을 다양성과 선택이라는 시장원리에서 찾고자 하는 것, 그리 새로운 결론은 아닐 것이다.<07-4-12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