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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공화국의 종말 - 인재와 시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대한민국이 산다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6월
절판


그렇다면 공교육이 부실하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우리 한국인들이 공교육이 부실하다고 주장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학교가 학생들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인격체로 사고하고 행위하는 의지와 능력을 제대로 키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학교 교육이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가치나 규범을 제대로 전수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부실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학교 교육이 학생들의 지적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부실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고등학교 교육이 대학에서의 교육을 따라갈 지적 능력을 제대로 키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부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 한국인들은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이 공교육이 부실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대학 입시에서 찾아야 한다.-152-153쪽

대학이 일사분란한 서열을 갖게 되면, 고등학교 교육은 처음부터 명문대 인기 학과 합격을 지향하고 추구하게 된다.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들은 그 자체로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많은 학생들을 조금이라도 나은 대학의 조금이라도 나은 학과에 입학시킴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게 된다. 또 학생들 사이에 단 1점이라도 더 따기 위한 무한 경쟁이 생겨난다. 그리고 학교는 학교대로 학생들을 단 1점이라도 더 좋은 점수를 따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런 학교가 바로 이른바 명문 고등학교가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공교육의 부실이 발생한다... -153쪽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이 제공되는 학교 수업은 아무리 내용이 견실해도 불충분하고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서는 나와 너 사이에 하등의 차이를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이 누구에게든지 공통적으로 제공되는 공교육은 부실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한국의 학생들에게 그리고 학부모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만이 홀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지, 교육의 방식과 내용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사교육이 등장하게 되는 사회심리학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cf. 이상 지금의 일제고사(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가 불러올 상황과 연결지을 수도-153-154쪽

대학에서는 단 한두명밖에 수강생이 없더라도 칸트, 하이데거에 대한 강좌를, 성리학에 대한 강좌를 개설해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토론식과 논술식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대학 이외의 그 어떠한 사회문화적 조직이나 공간에 의해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업이 이를 대체할 수 있다면 대학은 굳이 존재할 근거나 의미가 없다. 역으로 만일 대학이 상품을 생산하고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면 기업의 존재 근거와 의미는 퇴색하거나 없어질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시민 교양 수준의 강좌는 폐지해야 한다. 설령 수백명이 몰린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수백명이 몰린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대학 밖의 어디서 그런 강좌가 열리는지 홍보하는 포스터나 책자는 학생들을 위해 비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말이다. 대학생에게도 교양을 갖추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추구할 곳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대학 밖 어딘가에!-162-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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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지음, 김기협 옮김 / 민들레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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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US의 교육제도는 19세기 프러시아의 새로운 교육제도에 의거하여 마련되었다는 것인데, 프러시아의 새로운 교육제도라는 것은 “아직 마음이 굳어지지 않은 어린 시절 동안 인간을 믿을 수 있는 기계의 부속품으로, 국가로부터 임무와 목적을 부여받은 인간기계로 만들어 버리는 제도”였다. 19세기 초 예나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사에게 진후, 피히테는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란 글을 통해 국가는 이상적인 의무 학교제도를 새로이 만들어 모든 사람이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학교를 통해 프러시아의 통합을 이루려했다. 그 결과 국가의 힘에 떠밀려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강제적인 학교교육이 1819년 프러시아에서 시작되었다. 피히테는 강제적인 학교교육을 통해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고분고분한 광산노동자, 정부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민들”을 길러내 프러시아의 통합을 꾀하고자 했다.
그 제도를 위해 교사훈련에서 강조했던 것은 “첫째, 국가가 아이들의 유일하고 진정한 부모라는 것, 둘째 국가적 교육의 목적은 지적 함양이 아니라 복종과 예속이라는 것, 셋째 교실과 작업장은 단편적인 조각들로 단순화되어 아무리 바보라도 기억하고 작업할 수 있다”는 세 가지 명제였다. 따라서, “점수와 성적표가 말해주는 것은 지적 성장만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복종”을 뜻하는 것이고, “학교교육은 우리의 공식적인 국가종교”이자, “학교란 사람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기보다 사람들을 분류하기 위해”, “지성의 발달이 아니라, 복종과 순종의 사회화”를 위해 세워진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의 도입과 정착에는 “학교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은 학교용 교과서들처럼 서로 엇비슷합니다. 이미 백년 전부터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무지한 사람들보다 이끌어가기 쉽다는 것을 인식한 책략가들”의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남북전쟁 직전 무렵 이래 US 사회는 본질적으로 중앙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프러시아식 의무교육, 정부독점의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변화 이전까지 어느 곳에서도 학교는 별로 중요한 곳이 아니었고, 학교가 있기는 했지만 그 수 역시 많지 않았다.


2. 프러시아식 의무 학교교육 속에서, 공립학교 교사였던 개토는 자신이 그동안 다음의 일곱 가지 죄들을 저질렀음을 고백한다. 

첫 번째 죄는 학생들에게 혼란을 심어준 일이다. 그는 모든 것들의 연관성을 파괴하도록 곧 관계의 단절을 가르쳐왔다. 그가 가르쳤던 행성의 궤도, 노예제도, 형용사, 건축제도법, 무용, 체육, 합창, 회의방법, 소방훈련, 컴퓨터언어, 육성회, 교사 연수, 퇴거 연습, 표준화된 시험, 학교 밖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연령별 격리...이런 것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만사, 만물 사이의 관련성을 해체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자, 학생들에게 이러한 혼란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학교용 “교과서는 군중 통제의 수단”이자, “교육에서 자유로운 의지와 고독을 빼버리는” 훈련을 시키는 것일뿐이다.



두 번째는 학생들을 교실에 갇혀있도록 한 점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있을 곳은 언제나 번호가 매겨져 있는 교실 안이니 교실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의 99퍼센트가 교실 안에 묶여 있도록 교실 분위기를 유도했으며, 아이들이 높은 시험성적을 올리도록 공공연히 격려하고, 잘하기만 하면 더 우월한 반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끼도 던지면서 경쟁을 부추겨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아이들은 갇혀있는 상태를 좋아하고 다른 곳에 설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세 번째로 그가 가르친 것은 무관심이다. 그는 학생들이 교과 진도표 위에서 말고는 완전한 경험이라는 것을 갖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자리에 똑바로 앉아서 온 마음을 기울여 경청하게 하고 제 눈에 들기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게 시킨다.”



네 번째로 그가 가르친 것은 정서적 의존성이다. 그는 동그라미와 ×표, 웃는 얼굴과 찌푸린 얼굴의 도장, 상과 벌, 표창 따위로 아이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미리 정해진 목표에 따르게 가르쳐왔다. 그에게 개성이란 학급 이론에 저촉되는 요인일 뿐이다.



다섯 번째로 그가 가르친 것은 지적 의존성이다. 그에게 착한 학생이란 곧 교사가 어떻게 하라고 시키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무엇 무엇을 공부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문가로 불리는 교사의 몫이며, 그는 아이들이 생각할 내용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무엇을 할지 모르게 하면서 남들이 시키는 일만 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생활양식을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조건부 자신감으로, 아이들의 자신감이 전문가의 의견에 얽매여야 한다고 가르쳐온 것이다. 곧 그는 끊임없이 아이들을 평가하고 분별해냄으로써, 아이들과 부모들이 얼마만큼 해야 만족을 느끼고 불만을 느끼게 되는지를 퍼센트 단위까지 정확히 알려주었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그것도 숫자화하여 남이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일곱 번째는 학생들이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점을 가르쳐왔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공간도, 자기만의 시간도 없다.


이 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공식의 적용을 통해 공식화된 인간, 즉 행동을 예측하고 제어하는 것이 가능한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결국, “제 가장 뛰어난 동료 교사들 중에도, 그리고 제가 만나 본 가장 훌륭한 학부모들 중에도, 교육이 다른 방법으로도 행해질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형 학교에서의 정부 독점 의무교육이 거둔 위대한 승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개토는 아래의 말들에서처럼 “교육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에서 그 대안을 찾는다. 


 “공교육에 어떻게든 자유시장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 해결의 길을 찾는 제일 그럴싸한 방향입니다. 문중門中의 학교들, 소규모의 기업적 학교들, 종교계 학교들, 기술학교, 농업학교들이 다양하게 병립해서 정부교육과 경쟁하는 자유시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그리는 학교교육의 자유시장이란, 남북전쟁 이전에 이 나라에 있었던 상황과 똑같은 것입니다. 자기에게 맞다고 생각되는 교육의 종류를 학생들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독학도 선택의 한 갈래가 될 수 있겠죠.”



“뉴 잉글랜드 사람들은 함께 살고 싶고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일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도 그 지역 전체가 물질적으로도, 지성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기막힌 번영을 누린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 일을 잘 알아서 처리하면 공적인 일도 어떻게든 잘 처리되는 요술이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접촉할 수 없는 머나먼 중앙부에서 보내 오는 지시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가운데 우리는 조합교회 원리의 가르침을 거듭거듭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조화로운 집단 속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한 인간은 그 인격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다는 가르침 말입니다.” 



 공교육(또는 국가관리의 학교교육)의 제도적 속성이 대부분의 교사들로 하여금 개토 자신과 같은 “일곱 가지 죄”를 저지르게 하고 있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학교교육이 제도화되기 이전의 “다양성”과 “선택”에 토대를 둔 교육체제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글쓴이의 입장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공립학교 비판에 대한 해결의 길을 다양성과 선택이라는 시장원리에서 찾고자 하는 것, 그리 새로운 결론은 아닐 것이다.<07-4-12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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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학교 어떻게 만들까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지음, 조응주 옮김 / 민들레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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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좋은 학교는 유기적이다. 유기적 사물은 전체를 이루는 한부분으로서 없어서는 안될요소이다. 학교는 아이의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로, 아이의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치며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의 요구까지 충족시킨다. 유기적 학습환경의 질서는 외부에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고 표준화되고 살균 포장된 패키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둘째, 좋은 학교는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협력의 장이자 구성원 모두가 발언권이 있는 곳이다. 강제적 지배와 상명하달식 권위가 아니라 상호 합의에 기반을 두어야하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학습환경인 곳에서는 아이들에게 운영에 동참할 권리를 준다. 교사는 무서운 감독이나 규율반장이나 비판자가 아니라 선배, 멘토, 안내자가 된다. 경쟁적으로 성적을 내고 등수를 정하는 것은 학교의 공동체 의식을 갉아먹는다. 학생의 상대적 성과를 정적인 숫자로 나타내지 않는다. 한해동안의 성과를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관리. 공동체는 본질 자체가 포용적임.
셋째, 좋은 학교는 자유라는 명칭과 관계없이 아이들에게 선택의 권리 그것도 아주 많은 선택의 권리를 허용한다. 좋은 선택을 할 줄 아는 숙련된 기술이야 말로 제대로 사는데 필수요건임을 알고 있기때문이다.
넷째, 사랑은 공동체에서 최고로 중요한 요소이다.
다섯째, 투과성이 좋은 숨쉬는 그릇과 같아서 학교 안과 바깥 세상 사이에 잦은 교류가 이루어진다. 삶과 배움이 같은 뜻을 지닌다. 니일의 말처럼 "아이를 학교에 끼워맞추려하지 않고 학교를 아이한테 맞는 자세가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20-30쪽

결국, "유기적 기능, 인간관계, 공동체, 민주주의, 융통성, 자유, 신뢰, 책임, 선택, 사랑"이 좋은 학교의 기본원칙임.-30쪽

알바니 프리스쿨을 처음 방문한 학부모들은 대부분 "우리 아이에게 하루종일 놀아도 된다는 선택권을 주면 과연 공부를 할까요?" 같은 질문을 제기하는데 이에 대한 메르코글리아노의 대답은 다음과 같음.

"나는 우리 학교에서 배움의 부재때문에 골치 아팠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말밖에 해주지 못한다. 강압적인 방법이나 속임수를 써서 아이들을 배우게 할 필요는 전혀없다.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다. 감동적인 책을 읽고 싶어하고, 자기의 꿈과 희망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하고, 수리數理를 익히고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발견하고 싶어한다. 과거를 파헤쳐 현재와 미래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싶어한다. 한마디로 능력과 지식과 독립심을 갖추고 싶어한다."-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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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죽었다 한마당 글집 3
에버레트 라이머 지음, 김석원 옮김 / 한마당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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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일리히와 나눈 15년간의 대화가 바로 이 책을 나오게 한 원인이라는 라이머의 진술처럼, 이 책의 많은 부분들은 일리히의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의 내용과 비슷하다. 저자 자신이 “일리히 조차도 부분적으로는 나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공통된 문제의식의 다른 편제란 생각이다.
 
Ⅱ-1. 이를 테면, 그가 문제로 삼고 있는 학교 역시 ‘제도적 장치로서의 학교’, 곧 “일정한 연령집단(취학연령 규정)이, 단계적인 교육과정(표준화된 수업순서, 표준화된 능력과 성과측정)을 공부하기 위해 교사(질문보다 정설定說만을 제시하는)가 감독하는 교실(시공간의 규정과 통제)에 출석할 것이 요구되는 제도”이다. 이러한 “제도적인 차원의 학교교육은 민족국가의 발전과 함께 도래한 것으로, OO 민족국가라는 건축물의 설계도에 가장 적합한 시민을 만들어 내는 데 목표”가 있었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확대된 이유는 “현대사회의 여러 제도는 기존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무거운 짐을 떠맡고 있는데, 이 제도 중에서 학교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곧, “학교는, 사회구성원 전체를 위한 것인 양 가장하는 사회의 현실과 신화를 조화시키는 의식(儀式)을 찬양한다. 학교는 인간을 전문화된 제도로서 기술과 가치의 관점에서 그들을 선택하고 형성해간다. 학교는 그 자체의 위계질서적인 구조를 통하여 권력과 특권이 하나로 통합된 사회의 위계질서에 순응하도록 학생들을 길들이며”, “학생들에게 다른 사회기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Ⅱ-2. 덧붙여, “교육을 위한 국가기금(國家基金)의 혜택은 현재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학교교육은 기술문명사회에서 보편적인 종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서, 그 사상을 전파하고 구체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상을 받아들이게 유도하고,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어, “교육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활 기회life chance에 있어서 학교교육의 일률적인 독점을 배격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학교는 <기회평등>, <자유>, <진보>, <능률>에 대한 사회적 신화와 이데올로기를 합리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들에서도 비슷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Ⅲ-1. 결국, “학교가 교육의 유일한 방법으로 독점적 위치를 굳히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사람과 지식을 조작가능한 대상물을 다루듯이 취급”하고 있는데, 이 과정의 가장 큰 위험은 “(학교)교육과정으로 조작 배출되는 인간이 사회적 지배가치와 계층화된 질서의 교의(敎義)의 노예가 되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운명을 지배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는데 있다. 이상의 제도화된 학교에서 흔히 학교 찬성론자들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다음의 논리들은 그릇된 신화일 뿐이다(일리히가 기능교육과 자유교육 모두가 무능하다고 지적한 바처럼). 1) “학교가 없다면 어린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책 읽는 법이라도 배울 수 있겠는가?”(실제에 있어서 문자 해득력은 학교교육을 받기 이전에 익히는 것이 보통이다), 2)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배우지 못하는 개념들을 배운다”(이는 학교 외 다른 학습 환경이 가져다주는 학습 효과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3) “학교가 문법이나 수학 및 과학의 이론, 그리고 예술을 가르친다”(그런 것을 과연 학교에서 더 많이 배울 수 있을까란 반론이 가능하다), 4) “학교는 유년시절에서 성인 생활로 건너가는 데 필요한 교량의 역할을 하며, 제멋대로 자란 어린아이들을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변화시켜 준다.”
Ⅲ-2. 이에, 학교제도는 교육자원(여러 가지 형식의 기록체제가 거의 모든 사람에 의해 언제라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편성하는 도서관 같은)과 기술 모델(컴퓨터에 의한 수업 같은 것(CBI같은), 기술 시범을 보일 수 있는 역할모델) 그리고 동료집단(공통된 관심사를 지닌)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하며, 그렇게 됨으로써 다음의 세 유형의 교육자가 꼭 필요하게 된다. 1) 교육자원망의 설계자와 관리자, 2) 개인적인 교육계획을 수립하고 교육적인 어려움을 진단하고 그 대책을 수립할 수 있는 교육자, 3) 각 학업 분야의 지도자. 이러한 대안적 체제는 일리히가 말하는 네 가지  ‘학습 네트워크’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들이다.

Ⅳ. 헨티히가 [왜 학교에 가야하나요?]에서 학교에 가야한다고 드는 이유나(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지적하며), 일리히와 라이머가 “탈학교”를 주장하며, 자유로운 “학습”(“교육”이기보다는)이 가능한 교육체제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 헨티히는 그것을 “학교”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이고, 일리히와 라이머는 제도화된 학교의 독점에서 벗어난(탈脫학교된), 새로운 교육체제에서 가능하다는 것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제도화된 학교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어떤 형태의 교육체제가 공공자금의 낭비 없이 교육의 “공공성”을 유지하며, 참된 “배움”을 가능하게 할것인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일리히와 라이머가 던져주었다고 본다. 그런데, 라이머가 자신이 정의한 학교 형태에 대한 반작용의 예로, 섬머힐, 퍼시픽 고등학교Pacific High School, 자유학교, 야외학교를 든 것을 보면(이는 지금의 제도권밖 대안학교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제도화된 학교의 교육독점”이지, 학교라는 형태 자체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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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인간의 욕구를 제도적으로 충족되게 만들어 통제하는 방식은 기억해두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이는 학교뿐 아니라, 건강, 여행 등 다른 여러 가지 인간의 욕구에 대해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1.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재화나 서비스를 규정하고(학교는 교육education을 학교활동schooling으로 규정),
2. 이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 이러한 규정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며(사람들은 교육을 학교활동과 동일시하도록 유인된다),
3. 필요로 하는 사람 중에 일부분은 그 생산물을 향유할 수 없도록 배제해 버리며(어느 수준에 이르면 단지 일부 사람들만이 다닐 수 있게 된다),
4.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자원을 매점매석한다(학교는 교육에 유용한 자원을 매점매석한다).
<200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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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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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정권까지의 정치현실뿐 아니라 지금의 정치현실을 이해하고 확증(confirmation)는데 도움을 준 책이다. 이를테면, 우선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들어오긴 했지만, 최근의 정치행태는 “매우 보수적인 이념적 범위 안에서 기존의 정치행태를 지속함으로써 사회적 기대와는 거리가 먼 정치계급(political class)의 쟁투장에 가까운 것”으로 “사회의 근본적 이슈와 괴리된 권력투쟁 이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누더기 4대입법을 두고 벌이는 싸움은 내년 보궐선거와 그 이후를 위한 권력투쟁이상은 아니다.
둘째, “한 사회가 이념적으로 자유롭지 못할 때, 냉전반공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인 정치언어로 기능하고 있을 때, 민주주의는 그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합의 형성의 기제가 되기는커녕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사회의 기득구조와 특권체제를 정당화는 정치적 기제에 머무르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냉전반공주의가 지배하는 보수독점의 정치적 대표체제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결과는 무수히 많”은데, “직접적으로 그것은 서민과 노동계급의 이익 및 요구가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지속시킨다.” 얼마 전 정부가 보여준 공무원노조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비정규직법안을 보라. 열린우리당 역시 개혁적 레토릭을 구사하긴 하지만, 보수독점의 정치체제를 이끌어가는 한 축 이상은 아니다. 
셋째,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공고화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개혁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기득권 세력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제나 민주화에 격렬하게 저항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란 점이다. 따라서, 현재의 개혁부진 원인의 한 측면 역시 “변화에 저항하는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민주 세력이 보여준 무능력에” 있다. 

참고로, 글쓴이가 이 책에서 요구하는 바는, 한국사회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고,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여러 장애요인을 제거하는 자유주의적 재편, 민주적 재편(재벌구조, 관료체제, 노사관계 등)이다. 이는 마지막부분에서 한국민주주의의 이념적 기반으로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언급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자조차 빨갱이 사냥으로 몰았던 일은 우리 사회의 미성숙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 때문일까, 민주화를 저해하는 주범 중의 하나인 보수언론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중요하게 언급된다. 보수언론을 포함한 “시민사회의 보수적 부문에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권위주의 하에서 성장한 자신들의 특수 이익을 보장하는 것으로 왜곡되었”으며, “다른 가치와 이념의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냉전반공 이데올로기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가치와 병립하기 어렵다.”

김규항은 [B급좌파](야간비행, 2001)에서 “구사대”를 모르는 라디오DJ를 두고, “교양”을 언급한 바 있다. 얼마 전의 경험은 다음과 같은 대학의 현실에서 그 일화가 먼 이야기 같지 않다는 생각을 들게 한 바 있다.

“지난 날 권위주의의 강권통치에 맞서 민주화를 이뤄 낸 대학사회는 더 이상 비판적 지성이 살아 숨쉬는 전당이 아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학 4년의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미래의 노동시장에 남보다 좋은 조건으로 진입하기 위한 준비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다. 그러는 사이 교육의 가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에 압도되어 버렸다. 캠퍼스에서 운동이 소멸한 이후 이를 대체한 것은 진리탐구를 위한 지적 열정이나 작업도 아니고 사회현실에 대한 지적 비판도 아니다. 비판정신이 거세된 대학사회는 마치 거대한 사회입시 학원과 같은 것이 되었다.”

한국사회를 위한 “교양” 차원에서라도 이 책은 한번쯤 읽어보았으면 한다. 글쓴이는 “개인들이 그 스스로의 가치와 내면의 정신세계를 갖지 못하고 바깥에 존재하는 가치와 기준에 의해 그리고 여론의 헤게모니적인 힘에 의해 휩쓸리고 동원될 때,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타락하기 쉽다”라고 말하는데, “개인들이 그 스스로의 가치와 내면의 정신세계를 갖추고 있는 것” 역시 “교양”의 한 측면이다.

얼마 전, 언론을 타고 화제가 된 바 있는 글쓴이의 논문은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정당들과 민주정부에 의해 정치적인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진전하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결론은 이미 이 책에서 예비 되고 언급된 것이며, 누군가 지적한 바대로 이러한 현실해석과 발언이 가능한 사람들이 대학강단에 거의 없거나 사라지는 현실이 바로 우리 대학(학문)의 큰 위기가 아닌가한다. <200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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