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솔직히
존 로빈슨 / 대한기독교서회 / 199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숭고하게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신 개념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인격신 개념은 전통적인 대중의 신학이 말하는 신이며, 유아적인 사고수준이 만들어낸 추상 개념일 뿐이다. 마치 아이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듯, 정신이 성숙한 인류도 이제는 빅브라더로서의 신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독립을 위해서 저자는 전통적인 종교적 상징기법이 ‘높이의 표현’에서 ‘깊이의 표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파울 탈리히의 말을 인용하여 ‘신이 그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우리가 애써야 하는, 저 밖에 있는 어떤 투영이나 하늘 저쪽에 있는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의 기반’이라고 하면서, '우리 삶의 깊이와 존재의 기반'이 곧 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유신론- 각종 존재들을 주재하고 만물의 운행에 개입하는 피안의 절대자로서의 신, 과학시대 이전의 신화적 개념, 이해 안 되는 자연 현상들을 얼렁뚱땅 이해하기 위해서 도입한 임기응변의 신, '이원론적 초자연주의' 
  • 반신론- 일부 실존주의자들의 견해, 포이에르바흐와 프로이트(신을 인간의 가장 심오하고 심층적이고 원숙한 정신영역의 '투사물' 내지는 '반영물'로 봄), 헉슬리("신이 저 밖에 참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깨끗이 버려야 하며, 신이라는 것은 진화의 과정 변두리에 생겨난 현상에 불과하다. 참된 종교는 자기 의식이라고 하는 더 높은 형태로 발전하는 진화의 과정과 자기 자신을 조화시키는 데 있다.")  

나는 실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반신론이 동양사상의 범신론과는 함께 엮이기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여하튼 이 책에서는 반신론과 범신론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일원론적 자연주의'라고 말하고 있는 거 같다(두 이론 모두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서의 신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서도 세계를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저자는 하나의 우상을 헐어버렸다는 점에서 초자연주의에 대한 자연주의의 비판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자연주의적 태도가 '종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깊이 있는 것들, 생명에 대한 무한한 신비감, 실존의 근원적 의미 파악 같은 것들'까지도 말살해버렸기 때문에 역시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계시의 깊이, 영원의 번쩍임, 거룩한 것과 신성한 것의 심판, 무조건적인 것과 신비스런 것과 황홀한 것에 대한 의식, 이러한 것들은 순수한 자연주의적 범주만으로는 도저히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p.70)" 따라서 저자는 궁극적으로는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모두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저자는 신학자의 입장에서- 초월적 신 존재를 부정하는 반신론자들의 도전에 맞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존속해야 할 어떤 이유와 가치를 모색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나온 이론이 '신성내재론'(딱히 무슨 이론이라고 나오지 않아 자의로 명명함)이다. 저자가 말하는 신은, 우리의 삶의 중심 안에 있으며 삶의 한계가 아니라 중심에서 만날 수 있는 실재의 깊이다. 존재 전체의 궁극적 깊이, 실존 전체의 창조적인 기반과 의미이다. 이때의 신은, 실체로서의 존재 여부를 관건으로 하지 않는다. 이 때의 신은 그저 어떠한 '속성'이고 '요소'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해맑밥님이 말씀한 '종교성'이라는 것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 아닐까 한다. 물론 더 자세한 것은 오쇼를 읽어봐야 알겠지만) 

신성내재론(?)의 신 개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요약 정리하면 되려 왜곡만 시킬 것 같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신의 문제라는 것은 이러한 존재의 깊이가 실재이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환상이냐 하는 문제이지, 저 푸른 하늘 저쪽 아니면 다른 어디에 어떤 '존재'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중대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문제, 즉 우리에게서 궁극적 실재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신이 초월해 있다는 것은 신적인 대상들이 있는 어떤 '초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유한의 세계가 그 자체 안에서 그것을 넘어선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스스로 초월해 있는 것이다. (...) 신은 자연 위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의 '황홀성' 속에 그 초월적인 '깊이'와 '기반'으로 존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산과 파괴의 메커니즘 소비사회는 ‘생산-소비’ 가 아니라 ‘생산-파괴’의 메커니즘이다. 체계는 생산성의 타산을 맞추기 위해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를 기획한다. 파괴는 전략적 목적을 지니고 사회의 지배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성장은 불평등(불균형)에 의존한다 사회의 성장이 평등을 만들어내느냐 불평등을 만들어내느냐 하는 논의는 무의미하다. 애초에 성장 자체가 불평등(불균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모든 사람에게 절대량으로서는 보다 많은 소득과 재화에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지만(그래서 복지와 평등이 실현된 것처럼 착각되지만), 경제성장의 중심 자체에 확립되는 것은 ‘왜곡의 과정’이며, 성장에 진정한 의미를 주는 것은 이 ‘왜곡비율’이다.  

체계는 성장을 활용한다 체계는 구조적으로 완전히 양면적인 것(부와 빈곤, 충족과 불만족, 진보와 공해)을 동시에 산출해내지 않고서는 존속할 수 없다. 양극은 항상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체계는 불균형과 구조적 궁핍에 의해 생존한다. 성장이 불평등에 의존하므로, 체계에게는 '성장'이야말로 최적의 생존 수단이다. 성장은 표면적으로 '민주주의의 평등주의적 원칙'을 증명하는 듯 보이면서도(사실, 실제로 증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일종의 알리바이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면에서는 '특권 및 지배질서 유지' 기능을 수행하여 체계의 양면성을 강화시킨다.  

소비 과정 소비 과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될 수 있다- (1)코드에 기초한 의미작용 및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2)분류 및 사회적 차이화의 과정. (2)의 경우에는 재화가 ‘차이표시기호’로 작용한다. 하나의 차이표시기호는 다른 기호들을 무한하게 지시하므로 (2)의 소비는 자가증식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때 언제나 혁신은 정상(최상류층)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전의 차이표시기호가 존재가치를 상실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회적 거리를 복원해야 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류는 언제나 하류와 차이를 두기 위해 새로운 욕구를 생산해내고, 이러한 욕구가 도미노처럼 상부에서 하부로 끊임없이 '대류'한다.  

체계의 요소로서의 욕구 소비사회의 욕구는 향유나 만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욕구는 '체계의 요소'로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개인과 사물의 관계'로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산업사회에서 노동력이 노동자-노동산물의 관계와 무관하고, 교환가치가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교환과 무관한 것처럼 오늘날의 소비사회에서는 '욕구'가 그렇다. 욕구는 체계 유지와 존속을 위한 조직적인 요소이다. 욕구는 재화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화를 획득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이나 위세, 명예 등 상징적인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사물은 더 이상 명확하게 규정된 기능이나 욕구와 관련이 없다. 사물은 이제 전혀 다른 것에 대응한다.  

욕구의 정신분석학적 접근 욕구는 사물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욕구는 하나의 팔루스처럼 사물과 사물 사이를 거닐고, 미끄러지고, 전이된다. “어느 한 기표로부터 다른 기표로의 이러한 도주는 결핍에 근거하기 때문에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표층적 현실에 불과하며, 또한 바로 이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욕망이 계속되는 사물 및 욕구 속에서 그때 그때마다 표출되는 것이다.“ 

사회 통제 수단으로서의 소비 소비는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이며, 강제이고, 도덕이며, 제도이고, 사회화의 양식이다. 소비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가치체계이며, 체계라고 하는 용어가 집단통합 및 사회통제의 기능으로서 포함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소비를 학습하고 훈련하는데, 이것은 사실 '19세기에 행해진 농촌인구의 산업노동에의 대대적인 훈련'의 20세기에서의 등가물이며 그 연장이다. 19세기의 체계가 노동을 통해 사회를 통제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체계는 소비를 통해 사람들을 사회화하고 통제한다. 소비는 새로운 양식의 ‘사회적 노동’이며, 체계는 힘센 노동자, 즉 욕망에 가득찬 소비자를 필요로 한다.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비는 소비자들을 어느 한 코드에 집단적으로 배정하기는 하지만 그런 효과가 결코 어떤 사회적인 위력이 되지는 않는다. 소비는 어디까지나 사적 영역이고 그 구조는 대단히 유동적이고 폐쇄적이다. 따라서 소비사회는 구체적인 부정(否定)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집단적인 연대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소비의 대상(재화)은 지위의 계층화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19세기 산업사회와 오늘날의 소비사회가 본질적으로 같은 논리로 작동하는 체계이고 상호간에 유비가 가능할지라도 소비사회에서는 계급혁명과 같은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선전과 개성 선전은 ‘차이를 상업적으로 생산해내는’ 의미작용을 갖는다. 선전이 만들어내는 ‘개성화의 차이’는 개인들을 서로 대립시키는 게 아니라 무한 척도 위에 서열화시킨다. 사람들은 선전을 통해 추상적인 어떤 모델이나 특정 양식에 근거해서 자기를 특징짓는다. 실제적인 개성, 차이, 특이성은 포기된다. 코드(차별적인 몇가지의 도식, 예를 들면 의류패션에서 무슨무슨 '룩')에의 복종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가치들이 유동적인 서열로 통합된다. 개성은 더 이상 개인의 내부에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우러나오는 게 아니다. 개성은 유명인사나 패션잡지, 디자이너들이 독점적으로 만들어 낸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함으로써(소비함으로써) 개성을 획득한다. 

여성적 모델과 남성적 모델 남녀 모델은 대립적 이미지를 지니며, 양자의 차이가 소비의 질서를 유지한다. 남성적 모델은 명예와 용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까다롭게 따져서 과감하게 선택한다. 여성적 모델은 자기만족과 자기도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 모델은 직접적인 경쟁에 들어가지 않고, 경쟁의 ‘대상’이 되어서 선택을 당한다. 오늘날에는 여성적 모델이 소비의 모든 영역에서 점차 확대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전거만 있으면 서울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신념하에 오늘 밤 급기야 청와대 진입을 시도했으나 아쉽게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전경이 길을 가로막지만 않았어도 나는 힘차게 페달을 밟고 청와대 집무실로 뛰쳐들어가 딱 정수기 물 한 잔만 얻어마시고 나올 참이었다. 전경의 말에 따르면, 이 길은 밤 여덟 시만 넘으면 대통령 말고는 아무도 못 지나다닌다는 것이었다. 나는 통행권을 보장받지 못한 서울 시민으로서 경악과 분노와 울분과 비애에 휩싸여 핸들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클레. 그러니까 내가 클레라는 재즈바를 발견한 것은 청와대 진입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심적 공황 상태에 빠져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클레는 삼청동 어느 후미진 골목 귀퉁이에 참으로 교묘하게 숨어 있었다. 간판은 손톱만 했고 입구는 담벼락의 일종으로 착각할 여지가 다분했다. 클레는 뭐랄까, 마치 보호색으로 위장한 애벌레 같았달까. 왠지 밤마다 무언가 은밀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재즈바였다. 과거 유신 시대에는 재야 지식인들의 비밀결사모임 장소로 애용되었으며, 90년대 말에는 사이비 종교 단체의 변태적인 제의가 벌어지곤 했습니다- 만약 클레의 역사를 궁금해하는 내게 재즈바 사장님이 다가와 이렇게 말해주었더라면 모조리 믿었을 것이었다. 

나는 청와대 정수기 물을 얻어먹는 대신, 은밀하고 불온하고 그래서 참을 수 없이 매혹적인 이 재즈바에 두 시간인가 앉아있다 왔다. 클레의 내부는 역시 짐작대로 좁고 어두침침했다. 좁은 정도로 말하자면- 오손도손 모여 앉아 음모와 모략, 비밀과 획책을 꾸미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면적이었고, 어두침침하기로 말할 것 같으면- 비행청소년들이 본드를 나눠마시며 삶의 애환을 나누기에 딱 좋은 정도의 조도였다. 삼삼오오 모여앉은 사람들은 다들 무언가를 은밀하게 공모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마치 비밀스런 범죄의 현장에 동참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이 몹시 좋았으므로, 어쩌면 나는 앞으로 클레에 종종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率路 2009-05-13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좋게 생각한다면야 야밤에 청와대 앞길 경호원들이랑 눈 마주치는거 보다는 타의로라도 그냥 돌아오신게 결과적으로 더 나은 일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거기 분위기가 영 살벌해서-_-;;;;;

수양 2009-05-13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쿨럭
 

청소하다가 그만 호랑이 기운이 넘쳐흘러 청소기 목뼈를 똑 분질러버린 것이 벌써 엊그저께 일이다. 남아도는 힘 때문에 세간을 다 말아먹게 생겼다고 자책하며 동대문 운동장역에 있는 서비스 센터를 찾아갔더니만, 토요일이라 일찍 문을 닫아버린 모양이었다. 하릴없이 돌아가는 수밖에.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기가 싫어서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는데, 딴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길을 잘못 들어 그만 남산으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남산 국립극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때마침 온통 떨어진 은행잎 천지였다. 그야말로 색채의 향연이었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서비스센터도 문을 닫고, 돌아오는 길까지 잘못 들어서 오늘은 온통 낭패의 연속이로구나 싶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뜻밖의 기쁨을 누리게 될 줄이야.  

이것은 퍼머넌트 옐로, 저것은 인디언 옐로, 이것은 레몬 옐로에 올리브 그린을 섞은 것... 나는 은행잎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면서 화폭에 과연 어떤 색으로 옮길 수 있을지 미간을 오므리고 가늠해보았다. 나에게는 이것이 한없이 비밀스럽고 즐거운 놀이였다. 붓을 놓은 지가 이미 오래인데도 이렇게 느닷없이 색채가 만발해 있는 풍경을 마주하면 어디선가 틀림없이 유화 물감 냄새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것 같고, 그러면 나는 당장에라도 캔버스 앞으로 달려가고만 싶다. 

그러나 나는 왜곡되지 않은 공정한 서술을 위해서 보다 냉철한 묘사를 감행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길임은 틀림없었지만, 동시에 고약한 은행 냄새가 진동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남산 올라가는 길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시각은 즐겁고 후각은 괴로워서, 걷다 보면 바야흐로 오감이 분열되고 정신 착란의 조짐까지 나타나는 참으로 상서롭지 않은 길이었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의 역사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판이 알차다. 사이즈도 큼직하고, 색채도 선명하고, 부분확대 사진도 많고. 책에 실린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자꾸 마음이 가는 건 중세 시대 그림들이다. 중세 그림은 바로크 회화처럼 순간적인 압도감을 주지는 않는다. 흔히 생각하는 객관적인 미의 기준에 그리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투박한 형식이야말로 그들이 지닌 커다란 재능처럼 느껴진다. 중세의 그림에서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정신의 자유가 느껴진다. 

중세가 꼭 암흑의 세월이기만 했을까. 광기가 단지 교정해야 할 장애가 아닌 예지적 영감으로 추앙받던 세상, 밤하늘에 천사가 떠다니고 괴물과 악마와 인간이 공존하던 세상은 얼마나 다이나믹했을까. 이 책을 펼쳐놓고 중세인들이 느꼈을 세계를 상상하고 있으면, 첨단 과학의 이 시대가 상대적으로 메마르게 느껴진다. 확실히 우리는 너무나 많이 파헤친 나머지 앙상해져 버린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