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이라는 게 참으로 신묘하다. 일단 날짜가 잡히면 하나도 반갑지가 않고 그저 벌써 또 회식인가 싶고 어떻게든 빠져볼 핑계 꺼리가 없나 빈곤한 머리를 쥐어짜며 궁리도 해보고 그렇지만 눈치 보여 도저히 말을 꺼낼 엄두는 못 내겠고 그러다가 고삐에 묶여 질질 끌려가는 송아지마냥 참석하는 게 회식이라면 회식인데
막상 회식이 끝나고 나면 직장이 갑자기 마구마구 사랑스러워지고 직무에 대한 의욕이 불끈불끈 샘솟고 그리하여 지금 여기서 나와 건배하는 이 군상들과 함께라면 중증 성인병 환자의 석달 분 처방전이 일시에 수십 장 쯤 몰려오더라도 일심으로 동체가 되어 조제기 모터가 활활 타버리도록 열광적으로 조제를 할 수가 있을 것 같고 뭐 그런 실로 괴이한 기분이 드는 거다.
그래서 회식 다음날이면 투지와 열정으로 충만하여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처방전을 모조리 빨아들여 버릴 기세로 일을 하지만 며칠 지나면 그것도 약발이 다 하는 모양인지 이내 속절없이 시들해져서는 문득 여기에 내가 뼈를 묻을 것도 아닌데 구태여 이렇게 충정으로 일을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날카로운 의구심이 생겨나고 이러다 내 청춘이 빛도 안 드는 골방 같은 조제실에서 다 썩어 문드러지겠다고 마음 속으로 절규를 해보기도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퇴근 시간은 자꾸만 더디게 찾아오는 것 같고 뭐 그런 지경이 되었을 때쯤에
놀랍게도 또다시 회식 날짜가 잡히니 신묘할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