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무려 2주 동안 빨래를 미루어서 심지어는 속옷이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는데 하필이면 오늘부터 장마철이란다. 빨래를 미뤘더니 장마가 시작된다거나 하는, 적당히 자조하는 선에서 받아들일 수도 있을 법한 사소한 현상들이 요즘의 나에게는 지극히 암담한 연속적인 불운의 한 가지 징후로 읽힌다. 어쩌면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학에 가까운 우울과 절망, 결핍감과 패배감 따위의 음습한 정서가 내 삶의 전체적인 기조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도 힘에 부친 세상이라고들 하는데 정작 나 자신은 자꾸만 어두운 내면의 나락으로 함몰되어만 가고 있으니 난감한 일이다. 몰입의 대상을 발견하면 흡사 먹이를 만난 육식동물처럼 미친듯이 돌진하던 때도 있었건만 그때 내가 내뿜던 광기와 살기, 그 생명의 기운은 지금 다 어디로 흩어져버린 것일까. 투구덕 투구덕 투구덕 투구덕. 세탁기 속에서는 빨래들이 신음하고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음습한 장마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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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9-06-2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에 있는 사람이야 말을 참 쉽게 할 수밖에 없는거고, 저는 주변사람조차 아니니 뭘 몰라서 하는 소리인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굳이 수양님께서 어두운 내면의 나락으로 함몰되실 것 까지는 없는 것 같은걸요? 저 포함해서 30대 백수가 수두룩한 제 주변도 뭐 다들 즐거운 척 하면서 잘들 살더라구요. 즐거운 척 하다보면 진짜 즐거워지겠거니하면서 말이죠. 이거 무슨 고도를 기다리며도 아니고.-_-;;;;

원치 않은 삶, 그러니깐 누가 '요즘 뭐해?'하면 나도 모르게 위축되던지 아니면 나름의 방어기제가 작동해선지 저도 모르게 공격적이 되는 삶을 산지도 올해로 거의 8년째(2002년부터 '아직 군대 안갔다'고 하면 주변에서 혀를 찼거든요)가 되다보니 이러다가 정말 세상에서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거 아닌가, 그냥 이렇게 화석처럼 굳어버리는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가끔씩 생기기는 하는데, 그럴때마다 희망이 될만한 구석을 보려고 노력을 해요. 근데 문제는, 그게 지나치다보니 현재의 제 상황마저 잊혀져서 칠렐레 팔렐레 철없이 방만해지곤 하죠. 어느정도의 비관이, 어느정도의 낙관이 가장 적절한 것인지는 영원한 숙제일듯. 일단 낙관도 비관도 사치로 비춰질 상황이 좀 되고 싶군요.-_-;;;;;

수양 2009-06-2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긴 덧글이 아닌데 왤케 웃음이 날까요ㅋㅋㅋ 덕분에 어두운 내면의 나락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ㅋㅋㅋ
 

회식이라는 게 참으로 신묘하다. 일단 날짜가 잡히면 하나도 반갑지가 않고 그저 벌써 또 회식인가 싶고 어떻게든 빠져볼 핑계 꺼리가 없나 빈곤한 머리를 쥐어짜며 궁리도 해보고 그렇지만 눈치 보여 도저히 말을 꺼낼 엄두는 못 내겠고 그러다가 고삐에 묶여 질질 끌려가는 송아지마냥 참석하는 게 회식이라면 회식인데

 

막상 회식이 끝나고 나면 직장이 갑자기 마구마구 사랑스러워지고 직무에 대한 의욕이 불끈불끈 샘솟고 그리하여 지금 여기서 나와 건배하는 이 군상들과 함께라면 중증 성인병 환자의 석달 분 처방전이 일시에 수십 장 쯤 몰려오더라도 일심으로 동체가 되어 조제기 모터가 활활 타버리도록 열광적으로 조제를 할 수가 있을 것 같고 뭐 그런 실로 괴이한 기분이 드는 거다.

 

그래서 회식 다음날이면 투지와 열정으로 충만하여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처방전을 모조리 빨아들여 버릴 기세로 일을 하지만 며칠 지나면 그것도 약발이 다 하는 모양인지 이내 속절없이 시들해져서는 문득 여기에 내가 뼈를 묻을 것도 아닌데 구태여 이렇게 충정으로 일을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날카로운 의구심이 생겨나고 이러다 내 청춘이 빛도 안 드는 골방 같은 조제실에서 다 썩어 문드러지겠다고 마음 속으로 절규를 해보기도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퇴근 시간은 자꾸만 더디게 찾아오는 것 같고 뭐 그런 지경이 되었을 때쯤에

 

놀랍게도 또다시 회식 날짜가 잡히니 신묘할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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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9-05-29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증 성인병 환자의 석달 분 처방전'이 어떠한지 매우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만-_-;;;

yamoo 2010-07-31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너무 글을 재밌게 쓰시는 거 같아요^^
 

저는 일단 말주변이 없고, 사실 말 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 또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말로 하면 쑥스러워질 테니까 이렇게 '우리 하고픈 이야기'에 오랜만에 몇자 적어 봅니다. 오늘 우연히 주홍글씨의 위 대목을 읽게 되었는데 읽고서는 마음이 좀 먹먹했던 것 같아요. 직업인으로서의 제 모습이 이 목사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마도 신념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겠죠. 신념이 없다는 게 저한테 어떤 의미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데, 배부른 환경에서의 불필요한 결벽인가 아니면 배부른 환경에서의 불필요한 허영인가 아니면 그저 게으름인가... 좀더 자기 성찰이 필요한 문제겠죠. 어쨌든, 시험은 떨어졌고 또 일 년 해볼 생각인데 이런 결심은 오기도 아니고 객기도 아니고 용기는 더더욱 아니고 오로지 그저 기존의 제 직업에 대한 신념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희 집에서는 개를 키우는데요. 개장수한테서 강아지를 사와서 목줄을 채워놓으면 첫날은 강아지가 밥도 안 먹고 어찌나 그악스럽게 짖어대는지 몰라요. 어른 개처럼 우렁차게 짖지도 못하는 어린 것이 밤새도록 그렇게 제 혼이 다 빠져나가도록 바락바락 짖어대는 거예요. 그리고 둘째날이면 목이 완전히 쉬어서 제대로 짖지도 못하고 쇳소리만 내요. 셋째날에는 그럴 기운도 없어서 축 처져 있지요. 그때 쯤에 어머니가 밥을 갖다주면 그렇게 게걸스레 먹을 수가 없어요. 이때가 제일 짠하죠. 그리고 넷째날에 엄마가 또 밥을 주러 찾아오면 이제는 막 꼬리를 흔들고 좋아라 해요. 저는 가끔 제 자신이 개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면 나는 지금 첫날이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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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셔널하고 지적이고 당당하고 성공에 대한 열망과 신념이 넘쳐흐르고 외국말도 청산유수로 하고 외모도 출중하고 행동거지도 우아하고 섹시한 건 기본이고 기타 등등 그래서 종내에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일과 사랑 모두를 쟁취해버리는ㅡ 소위 말해 패션잡지가 추구하는 여성상에 근접한 여자들을 만날 때마다 두렵고 무섭다. 그들의 자신감은 뭐랄까, 찻잎처럼 우러나는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에어컨 바람처럼 저돌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 같다.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냥 뭐 좀, 위력적으로 느껴진달까.  

그들과 함께 있다보면 대개는 나의 못남이 더 두드러져 보이므로 종종 기운이 처진다. 예를 들면, 술자리에서 그런 여자들은 (술도 거침없이 잘 마실 뿐더러) 아름다운 용모와 노련한 언변으로 분위기를 주도하다가 귀가 시간이 당도하였다 싶으면 잽싸게 일어나서 우아한 목례를 던지고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또각또각 집에 가버리는 것이다. 술자리 맨 끄트머리에서 소심하게 히죽대다가 재수가 없는 날이면 저도 모르게 너무 많이 마셔버려서 화장실에서 토하기까지 하는 나로서는, 실로 경이로운 처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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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현재 상황을 보건대 수요일의 사물함 놀이는 우리 셋 만의 마이너 문화로 전락할 가능성이 큰 것 같다. 물론, 오늘 처음으로 사물함 놀이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은 새로운 누군가가 이 쪽지를 읽게 된다면 나는 정말 기쁠 것 같고, 서면으로라도 꼭 환영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글쎄 회의적인 전망을 떨칠 수는 없네. 여하튼, 그래도 나는 이 놀이가 즐겁구나. 학원에 있는 수많은 사물함 중에 하나가 우리들의 비밀 우체통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근사하지 않니. 그리고 글이라는 건 일상 언어에 비해 깊이와 밀도 면에서 그 차원이 다르잖아. 나는 너희와 일상어가 아니라 글로 친해지게 된 점이 무엇보다도 기뻐. 

 

수요일의 사물함에 무엇을 적어넣을까 고심하다가 결정한 건데, 앞으로 나는 수요일마다 계속 이렇게 시를 소개하려고 해. 시를 같이 읽었으면 좋겠어. 그림 그리는 우리들에겐 간간히 시로 목을 축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나의 개인적인 경험인데, 화흥이 제일 많이 솟구치는 순간은 술 마실 때랑 시를 읽을 때인 것 같아. 나중에 의진이가 술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때는 꼭 우리 취중시화를 나눠 갖자. 자작시와 자작 그림을 그려 맞교환하는 것이지. 하하.  

참, 그리고 엊그제 의진이가 시를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잖아. 내가 추천해준 시인이지만 나도 그 사람의 시를 잘 몰라. 그런데 내 생각엔, 시라는 것도 그림하고 같아서, 그림도 보면, 뭘 그렸는지 몰라도 감동적일 때가 있잖아. 느낌으로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잖아. 시도 그런 것 같아. 원시시대의 시인은 아마도 샤먼이었겠지. 오늘날의 샤먼인 무속인들이 신내림 상태에서 말하는 걸 보면, 어법에 맞는 말 안 맞는 말 다 섞어서 주절주절 주문을 외는데 그 사이에 간혹 선뜩한 예언들이 불꽃처럼 튀어나오곤 하잖아. 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고등학교 때는 시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회를 치듯이 배웠지만, 시라는 걸 그렇게 읽으면, 그건 정말이지 시에 대한 모독인 것 같아. 시는 그냥 알쏭달쏭하게, 그래서 뭔가 읽고 나면 신비로운 여운이 남도록, 그렇게 읽는 것이 시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해. 아름다운 그림도 그렇잖아. 정말 아름다운 그림은 풀리지 않는 신비로운 비밀과도 같아서 보고 또 봐도 언제나 새롭고 그래서 자꾸만 잔상이 남잖아. 내가 오늘 가져온 시는 좀 짧아. 그래도 여운이 길지.  

   

그대의 시 앞에
-이시영

고독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그건 사기리 
밤새도록 앞뜰에 폭풍우 쓸고 지나간 뒤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잔바람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로이 위태로이 자신의 전존재를 다해 사운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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