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무려 2주 동안 빨래를 미루어서 심지어는 속옷이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는데 하필이면 오늘부터 장마철이란다. 빨래를 미뤘더니 장마가 시작된다거나 하는, 적당히 자조하는 선에서 받아들일 수도 있을 법한 사소한 현상들이 요즘의 나에게는 지극히 암담한 연속적인 불운의 한 가지 징후로 읽힌다. 어쩌면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학에 가까운 우울과 절망, 결핍감과 패배감 따위의 음습한 정서가 내 삶의 전체적인 기조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도 힘에 부친 세상이라고들 하는데 정작 나 자신은 자꾸만 어두운 내면의 나락으로 함몰되어만 가고 있으니 난감한 일이다. 몰입의 대상을 발견하면 흡사 먹이를 만난 육식동물처럼 미친듯이 돌진하던 때도 있었건만 그때 내가 내뿜던 광기와 살기, 그 생명의 기운은 지금 다 어디로 흩어져버린 것일까. 투구덕 투구덕 투구덕 투구덕. 세탁기 속에서는 빨래들이 신음하고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음습한 장마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