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인류가 정착 생활을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모던타임즈의 기계공이 된 것은 더더욱 최근의 일이고. 길 위에서의 삶이야말로 태곳적 우리 본연의 모습일는지도. 희망도 절망도 없이, 담담하게 다만 은근한 온기를 지니고서 이 영화가 근원적인 삶의 형태를 비춘다.
진실과 거짓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끔 하는 이야기는 이미 많고도 많지만 이토록 진한 풍미와 깊은 여운을 가진 경우도 흔치 않겠다. 영화를 구성하는 장치며 상징이며 저마다의 요소들이 정교하고 완벽하고 아름답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불시에, 장인이 빚은 고품격의 성찬을 맛보고 나니 어질하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명확하게 가르는 편리하고 단순하고 도식적인 셈법을 이 영화가 조롱한다. 영화에서 둘은 제 꼬리를 문 뱀처럼 그 근원이 맞물려 있을 뿐만 아니라 상호간에 긴밀하게 얽힌다. 서로가 서로를 탐하고 극적인 순간에는 사도마조히즘적으로 결탁하며 위급시엔 도움을 주고받고 서로의 상처를 보살피는 등등. (게다가 주인공 '그녀'는 여성+피해자다움의 전형으로부터 완전히 비켜나 있다. 통쾌하고 신선한 파격!) 이토록 모호하고 다층적인 관계에 대해 경찰로 대변되는 제복 입은 무리들이 무엇을 알 것인가. 사후 수습조차 벅찰 뿐이다.
다채롭다. 삶의 전면에 순차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수모와 치욕의 시절이 지나면 뭉클한 경이의 순간이 찾아오고. 담담하게 감내하며 기꺼이 음미할 일이다.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탁월하다. 근데 무슨 이리도 많은 상을 받을 것까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