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 관동대지진에서 태평양전쟁 발발까지의 예술 운동과 공동체 카이로스총서 35
구라카즈 시게루 지음, 한태준 옮김 / 갈무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대적 생명권력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20세기 초 일본 사회에서 문화예술 방면의 개인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미학적 인식, 예술관 등을 살펴보고 있다. 전통적인 유대가 해체되고 자본주의 생활 양식이 본격화되던 20세기 초 일본 사회와, 개인이 갈수록 '벌거벗은 생명'으로 시장에 내몰려지고 있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혹독한 삶의 풍경은 일견 거울상이라 할 만한 지점이 있고, 1920~30년 당시 일본의 문화예술인들이 보여주었던 새로운 인식과 지향을 탐구하는 것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이 시대에 '생명에의 감각'을 다시금 회복하기 위한 시의성 있는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취지가 아쉽게도 이 책은 다소 난삽한 인상을 준다. 본론에서 다루고 있는 광범위한 주제들이 어떻게 '미적 아나키즘',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으로 엮일 수 있는지 충분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지켜낸다는 것 - 칭화대 10년 연속 최고의 명강, 수신의 길
팡차오후이 지음, 박찬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구한 철학적 전통을 지닌 나라는 경제성장기에 이런 책이 나오는구나. 이 또한 중국의 저력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책세상 니체전집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백승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그너 음악을 안 들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오늘날로 치면 바그너는 무슨 블록버스터 영화 감독 내지는 라스베이거스 쇼 연출가 같은 그런 존재였나 보다. 쇼의 대단원을 항상 위대한 구원의 레파토리로 결말 짓는. <바그너의 경우>에서 니체는 일부러 광대 같은 문체를 구사하면서 바그너의 데카당한 면에 대해 엄청나게 열폭하고 있는데 열폭이 지나쳐서 심지어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그는 바그너를 극복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그너를 물어뜯는 그는 너무나 '약자' 같다.

보나마나 바그너는 <니체의 경우>같은 건 쓰지도 않았을 텐데 아무리 니체가 강자네 초인이네 어쩌구 저쩌구 해도 자신의 사상의 일관성을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이런 표리부동한 글을 읽고 있으면 차라리 측은한 마음마저 생긴다. 자기 분열과 자기 모순. 이상적 자아와 현실 자아 간의 엄청난 괴리. 니체는, 현대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상과는 별개로 내게는, 사이코패스를 이상적 자아로 상정했으나 현실적으로는 너무나 '그리스도교'적이고 '약자'이며 '병자'인 인간의 균열적 존재론을 정초한 자로 와닿는다. 나랑 퍽 닮은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니체가 재미있게 읽히는 지도 모르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활발발 2015-02-2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 전집을 백날 읽어도 입문서 한 권 제대로 읽은 사람보다 못하고 자의적인 오독으로 괴물만 커진다면 니체를 읽어서 무엇하리오~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 이 원한은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대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원한이다. 고귀한 모든 도덕이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가치를 설정하는 시선을 이렇게 전도시키는 것, 이렇게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리는 대신 반드시 밖을 향하게 하는 것은 실로 원한에 속한다.

 

노예 도덕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대립하는 어떤 세계와 외부 세계가 필요하다. 생리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일반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다. 노예 도덕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반작용이다. 고귀한 가치 평가 방식에서 사정은 정반대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성장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더 감사하고 더 환호하는 긍정을 말하기 위해 자신의 대립물을 찾을 뿐이다. (...) 원한을 지닌 인간은 정직하지도 순박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지도 솔직하지도 않다. 그의 영혼은 곁눈질을 한다. (...) 그는 '나쁜 적'을, '악한 사람'을 생각해내고, 사실 그것을 근본 개념으로 거기에서 그것의 잔상 또는 대립물로서 다시 한 번 '선한 인간'을 생각해 낸다. 그것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이란 무엇일까? 내가 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 나를 질식시키고 초췌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쁜 공기다! 나쁜 공기란 말이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내 근처로 다가오며, 내가 잘못된 영혼의 내장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 밖의 것이라면 어떤 고난, 궁핍, 나쁜 날씨, 중병, 신고(辛苦), 고독이든 견뎌내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람은 지하의 투쟁적인 생존을 영위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일도 잘 해결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되풀이해서 세상에 나타나고 되풀이해서 승리의 황금 시간을 체험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때 위급한 모든 경우에 언제나 더 팽팽하게 당겨지는 활처럼, 부러지지 않고 팽팽하게 당겨져 새로운 것, 좀 더 어려운 것, 멀리 있는 것을 향하도록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선악의 저편에 숭고한 수호의 여신들이 있다면, 내가 한 번 볼 수 있게 해달라! 아직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 만한 완전한 것,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것, 행복한 것, 강력한 것, 의기양양한 것을 내가 한번 볼 수 있게 해달라! 인간을 변호하는 인간, 인간을 보완하고 구원하는 행복의 경우를,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에 대한 믿음을 견지할 수 있는 경우를 한번 볼 수 있게 해달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2-18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8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침놀 책세상 니체전집 1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책세상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사람이 아무리 폭넓게 자신을 인식하고자 하더라도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충동들 전체를 인식하는 것보다 더 불완전한 것은 없다. 보다 거친 충동들의 이름은 거의 댈 수도 없으며, 그것들의 수와 강도, 그것들의 증강과 감소, 그것들 상호 간의 작용과 반작용, 무엇보다도 그것들에 영양이 공급되는 법칙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그것들이 이렇게 키워지는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다.

 

매일 겪는 우리의 체험은 어떤 때는 이 충동에, 어떤 때는 저 충동에 먹이를 던지며, 이 충동들은 이 먹이들을 탐욕스럽게 붙잡는다. 그러나 이 사건들의 전체적인 진행은 충동들 전체가 갖는 영양에 대한 욕구와 합리적인 연관이 전혀 없다. 따라서 항상 어떤 충동은 굶어서 위축되고 다른 충동은 과식하게 되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 우리의 모든 경험들은 음식물이 된다. 그러나 굶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이미 포식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이 음식물들은 맹목적으로 나뉜다. (...)

 

비유적으로 말해 어떤 충동이 충족되기를 갈망하거나, 자신의 힘을 사용하거나 펼치기를 갈망하거나, 일종의 공허를 충족하기를 갈망할 경우, 이 충동은 일상의 모든 사건들을 어떻게 하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본다. 인간이 달리든, 쉬든, 화를 내든, 읽든, 말하든, 투쟁하든, 환호성을 지르든 간에 갈증 상태에 있는 충동은 인간이 빠져드는 모든 상태를 건드려본다. (...)

 

그러나 충동들은 대부분, 특히 소위 도덕적인 충동들은 꿈속의 음식물을 통해 만족될 수 있다. 내 추측에 의하면, 우리의 꿈들은 낮 동안 우연히 음식물이 없었던 상태를 어느 정도까지는 보상하는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 어제의 꿈은 왜 다정함과 눈물로 가득 차 있고 그저께의 꿈은 익살스럽고 유쾌했으며, 그전의 꿈은 모험적이고 끊임없이 우울하게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독수리의 환희를 품고 아득한 산꼭대기를 향해 날아가는 것일까? 다정함, 익살 혹은 모험에 대한 우리의 충동에, 혹은 음악과 산에 대한 갈망에 활동 공간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충족시키는 이러한 창작들은 우리가 자면서 갖게 되는 신경의 자극에 대한 해석이다.

 

그것들은 피와 내장의 움직임, 팔과 이불의 압박, 종탑의 소리, 풍향계에서 나는 소리, 나방, 그리고 이런 종류의 다른 사물들에 대한 극히 자유롭고 극히 자의적인 해석들이다. 일반적으로 오늘밤이나 다른 날 밤이나 거의 비슷한 이 텍스트가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된다는 것, 즉 창작하는 이성이 동일한 신경의 자극에 대해 오늘과 내일, 전혀 다른 원인들을 마음 속에 그려낸다는 것은, 이 이성의 후견인이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데 근거한다. 즉 어떤 다른 충동이 만족되고 활동하고 자신을 연마하고 활기를 찾고 해방되기를 바랐던 것인데 바로 그 충동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던 것이고, 어제는 다른 충동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깨어있는 삶은 꿈꾸는 삶이 갖는 이러한 해석의 자유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창작력과 자유로움에서 뒤떨어진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깨어 있을 때는 우리의 충동들도 신경의 자극을 해석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구에 따라 자신의 '원인'을 정립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깨어있을 때나 꿈꾸고 있을 때나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도 없다고 말이다. (...)

 

우리의 도덕적인 판단들과 가치 판단들조차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생리학적 과정에 대한 영상과 상상 또는 어떤 신경의 자극을 특징짓는 일종의 습관적인 언어에 불과하다. 소위 우리의 의식은 알려져 있지 않고 아마 알려질 수 없는, 그러나 느껴지고 있는 텍스트에 대한 다소 환상적인 주석일 수 있다.

 

작은 체험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어느 날 시장을 지나갈 때 어떤 사람이 우리를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고 치자. 그때 마침 우리 안에서 어떤 충동이 최고조에 있는 지에 따라 이 사건은 우리에게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에 따라 그것은 전혀 다른 사건이 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빗방울처럼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벌레처럼 그것을 흔들어 떨어뜨린다. 어떤 사람은 다투려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조롱당할 만할 꼬투리를 주지는 않았나 하며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본다. 어떤 사람은 '과연 우스운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세계의 유쾌함과 밝음을 증대시켰다는 것에 대해 기뻐한다. 어떤 경우든, 즉 분노의 충동이든 싸우고 싶은 충동이든 사색의 충동이든 호의를 베풀고 싶은 충동이든 하나의 충동은 여기서 만족을 얻는다. 이러한 충동은 그 사건을 자신의 먹이처럼 붙잡았다. 왜 하필이면 그 충동이? 그것은 갈증과 기아에 시달리면서 잠복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어느 날 오전 11시에 어떤 남자가 내 앞에서 갑자기 벼락을 맞은 것처럼 쓰러졌다. 주위의 모든 여성들은 모두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고, 공포와 연민을 비롯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으면서 필요한 이성적인 조치를 취한 뒤 냉정하게 떠났다. 그런데 내가, 내일 오전 11시에 누군가가 내 옆에서 이런 식으로 쓰러질 것이라고 며칠 전에 통고를 받았다고 하자. 나는 온갖 종류의 고뇌로 괴로워하고 잠도 못 잤을 것이며, 결정적인 순간에 그 사람을 도와주기는커녕 그의 상태와 비슷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며칠 동안 모든 가능한 충동들이 이 체험을 마음 속에서 그리면서 주석을 달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리의 체험이란 무엇인가? 체험 속에 있는 것보다 우리가 그것에 투입하는 것이 훨씬 많다! 아니면 우리의 체험 자체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까지 말해야 할까? 체험하는 것은 창작하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