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놀 책세상 니체전집 1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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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아무리 폭넓게 자신을 인식하고자 하더라도 그의 본질을 구성하는 충동들 전체를 인식하는 것보다 더 불완전한 것은 없다. 보다 거친 충동들의 이름은 거의 댈 수도 없으며, 그것들의 수와 강도, 그것들의 증강과 감소, 그것들 상호 간의 작용과 반작용, 무엇보다도 그것들에 영양이 공급되는 법칙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그것들이 이렇게 키워지는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다.

 

매일 겪는 우리의 체험은 어떤 때는 이 충동에, 어떤 때는 저 충동에 먹이를 던지며, 이 충동들은 이 먹이들을 탐욕스럽게 붙잡는다. 그러나 이 사건들의 전체적인 진행은 충동들 전체가 갖는 영양에 대한 욕구와 합리적인 연관이 전혀 없다. 따라서 항상 어떤 충동은 굶어서 위축되고 다른 충동은 과식하게 되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 우리의 모든 경험들은 음식물이 된다. 그러나 굶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이미 포식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이 음식물들은 맹목적으로 나뉜다. (...)

 

비유적으로 말해 어떤 충동이 충족되기를 갈망하거나, 자신의 힘을 사용하거나 펼치기를 갈망하거나, 일종의 공허를 충족하기를 갈망할 경우, 이 충동은 일상의 모든 사건들을 어떻게 하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본다. 인간이 달리든, 쉬든, 화를 내든, 읽든, 말하든, 투쟁하든, 환호성을 지르든 간에 갈증 상태에 있는 충동은 인간이 빠져드는 모든 상태를 건드려본다. (...)

 

그러나 충동들은 대부분, 특히 소위 도덕적인 충동들은 꿈속의 음식물을 통해 만족될 수 있다. 내 추측에 의하면, 우리의 꿈들은 낮 동안 우연히 음식물이 없었던 상태를 어느 정도까지는 보상하는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 어제의 꿈은 왜 다정함과 눈물로 가득 차 있고 그저께의 꿈은 익살스럽고 유쾌했으며, 그전의 꿈은 모험적이고 끊임없이 우울하게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독수리의 환희를 품고 아득한 산꼭대기를 향해 날아가는 것일까? 다정함, 익살 혹은 모험에 대한 우리의 충동에, 혹은 음악과 산에 대한 갈망에 활동 공간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충족시키는 이러한 창작들은 우리가 자면서 갖게 되는 신경의 자극에 대한 해석이다.

 

그것들은 피와 내장의 움직임, 팔과 이불의 압박, 종탑의 소리, 풍향계에서 나는 소리, 나방, 그리고 이런 종류의 다른 사물들에 대한 극히 자유롭고 극히 자의적인 해석들이다. 일반적으로 오늘밤이나 다른 날 밤이나 거의 비슷한 이 텍스트가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된다는 것, 즉 창작하는 이성이 동일한 신경의 자극에 대해 오늘과 내일, 전혀 다른 원인들을 마음 속에 그려낸다는 것은, 이 이성의 후견인이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데 근거한다. 즉 어떤 다른 충동이 만족되고 활동하고 자신을 연마하고 활기를 찾고 해방되기를 바랐던 것인데 바로 그 충동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던 것이고, 어제는 다른 충동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깨어있는 삶은 꿈꾸는 삶이 갖는 이러한 해석의 자유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창작력과 자유로움에서 뒤떨어진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깨어 있을 때는 우리의 충동들도 신경의 자극을 해석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구에 따라 자신의 '원인'을 정립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깨어있을 때나 꿈꾸고 있을 때나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도 없다고 말이다. (...)

 

우리의 도덕적인 판단들과 가치 판단들조차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생리학적 과정에 대한 영상과 상상 또는 어떤 신경의 자극을 특징짓는 일종의 습관적인 언어에 불과하다. 소위 우리의 의식은 알려져 있지 않고 아마 알려질 수 없는, 그러나 느껴지고 있는 텍스트에 대한 다소 환상적인 주석일 수 있다.

 

작은 체험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어느 날 시장을 지나갈 때 어떤 사람이 우리를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고 치자. 그때 마침 우리 안에서 어떤 충동이 최고조에 있는 지에 따라 이 사건은 우리에게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에 따라 그것은 전혀 다른 사건이 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빗방울처럼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벌레처럼 그것을 흔들어 떨어뜨린다. 어떤 사람은 다투려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조롱당할 만할 꼬투리를 주지는 않았나 하며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본다. 어떤 사람은 '과연 우스운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세계의 유쾌함과 밝음을 증대시켰다는 것에 대해 기뻐한다. 어떤 경우든, 즉 분노의 충동이든 싸우고 싶은 충동이든 사색의 충동이든 호의를 베풀고 싶은 충동이든 하나의 충동은 여기서 만족을 얻는다. 이러한 충동은 그 사건을 자신의 먹이처럼 붙잡았다. 왜 하필이면 그 충동이? 그것은 갈증과 기아에 시달리면서 잠복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어느 날 오전 11시에 어떤 남자가 내 앞에서 갑자기 벼락을 맞은 것처럼 쓰러졌다. 주위의 모든 여성들은 모두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고, 공포와 연민을 비롯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으면서 필요한 이성적인 조치를 취한 뒤 냉정하게 떠났다. 그런데 내가, 내일 오전 11시에 누군가가 내 옆에서 이런 식으로 쓰러질 것이라고 며칠 전에 통고를 받았다고 하자. 나는 온갖 종류의 고뇌로 괴로워하고 잠도 못 잤을 것이며, 결정적인 순간에 그 사람을 도와주기는커녕 그의 상태와 비슷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며칠 동안 모든 가능한 충동들이 이 체험을 마음 속에서 그리면서 주석을 달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우리의 체험이란 무엇인가? 체험 속에 있는 것보다 우리가 그것에 투입하는 것이 훨씬 많다! 아니면 우리의 체험 자체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까지 말해야 할까? 체험하는 것은 창작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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