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역 니체의 말 초역 시리즈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시라토리 하루히코 엮음, 박재현 옮김 / 삼호미디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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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이런 말을 했나? 어떤 맥락에서 이런 말을 했나? 니체를 이렇게 읽어도 되나? 유사-자기계발서 컨셉의 말랑한 잠언집으로, 간편하고 실용적인 스타일로, 니체를 이렇게 소비해도 되나? 독서에 연속적으로 제동을 가하는 의구심 일체를 한방에 날려주는 글귀가 195쪽에 나온다. "공부나 교제, 일이나 취미, 독서 등 무엇인가 새로운 일에 맞딱뜨렸을 경우의 현명한 대처 요령은 가장 넓은 사랑을 가지고 맞서는 것이다. 꺼리는 면, 마음에 들지 않는 점, 오해, 시시한 부분을 보아도 즉시 잊어버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며 전체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잠자코 지켜본다. 그럼으로써 드디어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그것의 심장인지 확연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좋다 혹은 싫다와 같은 감정이나 기분에 치우쳐 도중에 내팽개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넓은 사랑을 갖는 것. 이것이 무언가를 진정으로 알고자 할 때의 요령이다." 하하하. 아무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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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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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당신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 당신이 진리이다. 만약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고 있다면 매번 속을 것이다.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진리이다. 예수는 이것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로 전하려고 했다. 예수의 이 말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직접적으로 진리를 가리킨다. 하지만 잘못 해석하면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예수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존재, 모든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신의 존재인 그 생명에 대해 말했다. 기독교 신비가들은 그것을 ‘내면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부른다.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진아), 즉 내면에 거하는 신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 차원과 연결될 때—그 차원과 연결되는 것은 당신의 자연스러운 상태이지 특별히 기적적인 성취가 아니다—당신의 모든 행동과 관계들은 당신이 깊은 내면에서 감지하는 모든 생명과의 일체감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라고 성 어거스틴은 말했다. 언어로는 이것 이상으로 진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삶에서도 세상 속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우연 같은, 뿐만 아니라 무질서하게 여겨지는 일련의 일들 배후에는 더 높은 질서와 목적이 숨어 있다. 이것을 선에서는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눈이 내릴 때, 모든 눈송이가 저마다 정확히 자기 자리에 내린다.” 생각을 통해서는 이러한 더 높은 질서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내용물에 대한 것인 반면, 더 높은 질서는 형상 없는 의식의 영역, 우주 지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잠깐이나마 들여다볼 수는 있고, 더 나아가 그 질서에 우리 자신을 맞춤으로써 그 더 높은 목적이 펼쳐지는 데 의식적인 참여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으로 들어갈 때, 생각에 지배되는 마음에게는 주위 사방에 있는 무질서와 혼돈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삶—좋은 것—과 죽음—나쁜 것—조차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완전히 썩은 부패한 물질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에 오직 고요만이 자리하고 생각이라는 소음이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곳에 숨은 조화가 있고 신성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모두가 완벽한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어서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방식 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더 큰 질서를 알아차리게 된다.

-생각에 지배되는 마음에게는 조경이 잘된 공원이 더 편안하다. 공원은 자연스럽게 무성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통해 계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질서가 있다. 원시림의 질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에는 혼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좋고 나쁨이라는 마음의 분류를 넘어서 있다. 생각을 통해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생각을 내려놓고 고요히 깨어 있으면, 또한 이해하려고도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으면, 감지할 수 있다. 그때 처음으로 숲의 신성에 눈이 열릴 것이다.

-숨은 조화와 신성을 감지하면 자신도 그 일부임을 알 수 있고, 그것을 깨달을 때 당신도 그 조화의 의식적인 참여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자연은 당신이 삶의 전체성과 다시 연결되도록 돕는다.

-꿈이 있고, 그 꿈을 꾸는 자가 있다. 꿈은 형상들의 일시적인 놀이이다. 그것이 이 세계이다. 상대적으로는 실재하지만 절대적으로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거기 꿈꾸는 자, 절대적 실체가 있다. 그 안에서 형상들은 왔다가 간다. 꿈꾸는 자는 개인이 아니다. 개인도 꿈의 일부이다. 꿈을 꾸는 자는 그 안에서 꿈이 나타나고 꿈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우주의 실체를 구성하는 두 부분, 즉 물체와 공간, ‘어떤 것임’과 ‘어떤 것이 아님’은 당신 자신의 실체를 구성하는 두 부분이다. 분별 있고, 균형 잡히고, 결실 있는 삶은 실체를 구성하는 이 두 차원인 형상과 공간 사이의 춤이다. 많은 사람들은 형상의 측면에, 감각 지각과 생각과 감정에 너무도 동일화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한 숨은 절반은 그들의 삶에 누락되어 있다. 형상과의 동일화 때문에 에고 속에 계속 갇혀 있는 것이다.

-전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세상 또는 우주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미생물에서 인간, 은하에 이르기까지 실제로는 개별적으로 분리된 물체들이나 독립된 존재들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다차원적인 그물망의 일부입니다. (...) 이 전체성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상호연결성보다도 더 깊은 차원이 있습니다. 더 깊은 그 차원에서는 모든 존재가 하나입니다. 그것이 ‘원천’이며,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은 ‘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지성으로, 그것이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우주라는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전체는 사물의 존재와 ‘순수한 있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형상으로 나타난 것과 나타나지 않은 것, 세상과 신으로. 그러므로 전체와 연결될 때, 당신은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전체의 상호연결성의 일부가 되고, 전체의 목적의 일부가 됩니다. 전체의 목적은 의식을 이 세상에 등장시키는 일입니다. 그 연결의 결과로, 자발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들, 기회를 제공하는 만남들, 우연들, 동시에 일어나는 다발적인 일들이 훨씬 더 자주 일어나게 됩니다. 칼 융은 이 동시성을 ‘비인과적 연결 원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현실이라는 표면 차원에서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에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표면의 세계 밑바탕에 존재하는 지성이 외부로 나타난 것으로, 마음의 이해를 뛰어넘는 깊은 연결입니다.

-어떤 생각도 전체의 무변광대함을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 실체는 통일된 전체이지만 생각은 그것을 조각들로 잘라 놓는다. 이것이 근본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개별적으로 분리된 사물들과 사건이 있다거나 이것이 저것의 원인이라고 믿는 것이다. 모든 생각은 어떤 시각을 담고 있으며, 모든 시각은 그 본질상 한계를 담고 있다. 한계를 담고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적어도 절대적인 진리는 아님을 의미한다. 오직 전체만이 진리이지만 그 전체는 말해질 수도 생각되어질 수도 없다. 전체는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으로는 불가해한 것이다.

-세상 속으로 나타났다가 다시 나타나지 않은 상태로 회귀하는 것, 즉 확장과 수축은 우주의 보편적인 두 가지 운동이다. 우리는 그것을 밖으로 나감과 집으로 돌아옴으로 부를 수 있다. 이 두 가지 운동은 심장의 끊임없는 팽창과 수축, 호흡의 들숨과 날숨처럼 우주 전체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되고 있다. 그 운동은 잠과 깨어남의 순환 속에서도 반영된다. 매일 밤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의 상태로 들어갈 때 당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타나지 않은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며, 그런 후에 아침이 되면 기운을 보충해 다시 나타난다.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는 충격을 받고 이해할 수 없으며 절망하고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제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동안 삶이 그들을 위해 가지고 있던 모든 의미와 목적은 축적, 성공, 세움, 보호, 그리고 감각적인 만족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외부적인 운동이고 형상과의 동일화, 즉 에고와 관계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그들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외부적인 운동보다도 더 깊은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 지금까지는 개인의 삶 속으로 영적 차원이 들어오는 것은 대개 늙음과 상실과 개인적인 비극을 통해서였다. 말하자면 내면적인 목적이 나타나는 것은 외부적인 목적이 무너지고 에고의 껍질에 금이 가서 열리기 시작할 때뿐이다. 그러한 사건들은 형상의 소멸을 향한 회귀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형상 차원에서의 잃음은 본질 차원에서의 얻음이다. 고대 문명과 전설에 등장하는 ‘눈 먼 예언자’와 ‘상처 입은 치료사’ 같은 전통적인 인물을 보면 형상 차원에서의 크나큰 상실이나 장애가 영적 차원으로의 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형상의 불안정한 본성을 직접 경험하면 다시는 형상을 과대평가하지 않게 되고, 맹목적으로 형상을 추구하거나 형상에 집착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형상의 소멸, 그중에서도 특히 늙음으로써 나타나는 깨달음의 기회는 현대 문명에서는 이제 막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다. (...) 한 개인의 삶에서 에고가 회귀 운동과 자신을 더 이상 동일시하지 않으면 늙음이나 다가오는 죽음은 본래의 의미를 되찾는다. 영적 차원으로의 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노인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은 늙어 가면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그들의 쇠약해져 가는 형상들은 투명해져서 의식의 빛이 비쳐 나오고 있었다.

-새로운 지구에서는 늙음이 인간 개인의 의식이 꽃피어나는 높은 가치를 지닌 시기로 인식될 것이다. 그 시기는 아직 삶의 외부적인 환경들 속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늦은 귀향의 시기이고, 자신의 내면적인 목적에 눈을 뜨는 시기이다. 그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늙음의 시기는 깨어남의 과정이 강렬해져서 마침내 정점에 이르는 시기가 될 것이다.

-알아차림이 깊어지고 에고에 삶을 지배당하지 않게 되면 늙음이나 개인적인 비극에 의해 자신의 세계가 축소되거나 붕괴되지 않아도 자신의 내면적인 목적에 눈뜰 수 있다.

-에고의 기능장애로 인해 손상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은 우주 지성의 외부 팽창 주기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그 창조의 추진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형상의 창조에 의식적인 참여자가 된다. 창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를 통해 우주의 지성이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며, 따라서 행위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반발력을 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행위는 모두의 선을 목표로 한 것들이다. 그런 행동은 배타적이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 분리시키지 않고 합친다. ‘나의’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 ‘나의’ 종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 속 의식의 등장을 위해, ‘나의’ 종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 가진 모든 존재와 자연 전체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행위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다. 행위는 필요하지만 우리의 외부 현실을 나타나게 하는 데는 이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창조의 일차적인 요소는 의식이다. 아무리 활동적이고 아무리 많이 노력해도 우리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 상태이다. 내부 차원에서 변화가 없으면 아무리 행동해도 차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형태만 다른 똑같은 세상을, 에고가 밖으로 투영된 또 하나의 세계를 몇 번씩 재창조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깨어 있는 행동은 외부적인 목적—무엇을 하는가—과 내면적인 목적—깨어남과 그 깨어 있음을 유지하는 것—이 조화를 이룬 행동이다. 깨어 있는 행동을 통해 당신은 외부로 향한 우주의 목적과 조화를 이룬다. 당신을 통해 의식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의식은 당신의 생각 속으로 흘러들어 와 생각들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가 행동을 안내하고 힘을 부여한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가 당신의 운명을 실현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하는가는 당신의 의식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 의식이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그렇게 해서 당신을 통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다. 당신이 삶을 우주의 창조적 힘과 연결시키는 세 가지 방식이다. 여기서 방식이란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와 당신의 행동을 깨어 있는 의식과 연결하는 밑바탕의 에너지 주파수를 의미한다. 이 세 가지 방식 중 어느 하나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이 하는 일은 기능장애적이고 에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 각각은 의식의 특정한 진동 주파수를 대표한다. 가장 단순한 일부터 매우 복잡한 일까지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그 셋 중 하나가 작동하도록 특별히 깨어 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의 어느 상태에도 있지 않다면, 자세히 살펴보면 당신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받아들임의 상태에서 행동한다는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당신이 평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평화로움은 미묘한 에너지 파동으로 당신이 하는 일 속에 흘러든다. 겉에서 볼 때 받아들임은 수동적인 상태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다. 왜나하면 이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무엇인가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 평화, 그 미묘한 에너지 파동이 의식이며, 그 의식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방식 중 하나가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는 것이다. 항복은 받아들임의 한 측면이다.

-즐거움은 ‘순수한 있음’의 역동적인 측면이다. 우주의 창조적 힘이 자신을 의식할 때, 그것은 기쁨으로 나타난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면서 그 행위를 할 때, 그리고 그 행위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닐 때, 그것이 어떤 일이든 즐거울 것이다. 사실 즐거움은 당신이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강한 살아 있음의 느낌이다. 그 살아 있음은 당신 자신과 하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은 실제로는 ‘순수한 있음’의 기쁨을 역동적인 측면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열정은 삶(생명)과 하나이며, 열정에 의해 움직이는 행동이 아무리 역동적이어도 당신은 그 행동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다. 회전하는 바퀴의 중심에는 늘 고요하면서 강렬하게 살아 있는 공간이 있다. 모든 활동 한가운데에 평화로운 중심부가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의 원천인 동시에 그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다. / 형상의 소멸을 향해 돌아가는 운동이 시작되면, 열정은 더 이상 당신에게 봉사하지 않는다. 열정은 외부로 향하는 삶의 주기에 속한다. 오직 받아들이는 항복을 통해서만 돌아가는 운동, 즉 집으로 가는 여행과 자신을 맞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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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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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가 만들어 내는 감정들은 마음이 외부적인 요인과 자신을 동일화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물론 그 외부적인 요인들은 불안정할 뿐 아니라 어느 순간에라도 변하기 쉽다. 이보다 훨씬 더 깊은 감정은 사실 감정이 아니라 ‘순수한 있음’의 상태이다. 감정은 반대되는 것들의 세계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순수한 있음’의 상태는 흐려질 수는 있어도 반대의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순수한 있음’의 상태는 사랑, 기쁨, 평화로서 당신의 내면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온다. 그것들은 당신의 진정한 본성이다.

-앎은 받아들임이 뒤따라야 한다. 그 밖의 것들은 그 앎을 다시 흐려 놓을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순간에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느끼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의 일부이다. 있는 그것에 반론을 던질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을 깊이 안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떠다니는 다양한 사상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미아가 되는 대신 ‘순수한 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유일하게 진정한 행복인 ‘순수한 있음’의 기쁨은 형상, 소유, 성취, 사람 또는 사건을 통해 오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그 기쁨은 밖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당신 내면의 형상 없는 차원으로부터, 의식 그 자체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며, 따라서 본래의 당신 자신과 하나이다.

-공간이 모든 사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듯이, 또한 고요 없이는 소리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신도 당신 존재의 중요한 본질인 형상 없는 차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단어가 잘못 사용되어 오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그 차원을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순수한 있음’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순수한 있음’은 사물의 존재에 앞선다. 사물의 존재는 형상이고 내용물이고 ‘일어나는 것’이다. 사물과 사건은 생명(삶)의 전면에 있고, ‘순수한 있음’은 이른바 생명(삶)의 배경에 있다.

-우리의 행성을 제정신으로 되돌리고 인류가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대상 의식을 공간 의식으로 균형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공간 의식의 등장이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이다. 공간 의식은 사물을 의식하는 것—언제나 감각 지각, 생각, 감정의 순서로 진행되는—과 동시에 그 밑바탕에 알아차림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다.

-형상과 더 이상 완전히 동일화되지 않을 때, 진정한 당신인 ‘의식’은 형상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자유는 내적 공간의 등장이다. 설령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고요, 알아차리기 힘든 평화로 다가온다. 겉으로 보기에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조차도 그 고요와 평화가 그곳에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어나는 사건들 주위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또한 오르내리는 감정 주위에도, 심지어 고통 주위에도 공간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각 주변에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으로부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평화가 발산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형상이고, 그 평화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의 평화이다.

-이제 당신은 이 세상의 것들에 의미와 중요성을 주지 않고도 그것들을 즐기고 음미할 수 있다. 그것들은 원래 의미와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당신은 창조의 춤에 참여할 수 있으며, 결과에 집착함 없이 행동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해 “나를 만족시켜 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 주고,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줘.” 하고 불합리한 요구를 하지 않게 된다. 세상은 당신에게 그것들을 줄 수도 없으며, 그런 기대를 내려놓으면 자신이 만들어 내는 고통은 막을 내린다. 그런 모든 고통들은 형상의 과대평가와 내적 공간의 차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당신 삶에 내적 공간의 차원이 생길 때, 감각의 즐거움 속에 실종되는 일도 집착함도 없이, 즉 이 세상에 중독되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즐길 수 있다.

-내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은 그것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물건과 경험을 찾듯이 찾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영적 자각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딜레마이다. (...) 그것은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형상이 없다. 그것은 공간이다. 고요이며, ‘순수한 있음’의 달콤함인 동시에 이런 언어들을 훨씬 뛰어넘는다. 언어는 다만 그것을 가리키는 표지판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 안에서 직접 느낄 때 더욱 깊어진다. 그러므로 소리, 풍경, 감촉 같은 어떤 단순한 것의 가치를 알아볼 때, 아름다움을 볼 때,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과 친절을 느낄 때, 그 경험의 원천이며 배경인 넓은 내적 공간을 감지해 보라.

-그렇다면 ‘경험하는 자’는 누구인가? 당신이다. 그럼 당신은 누구인가? 의식이다. 의식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대답이 불가능하다.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대상을 왜곡한 것이고 그것을 또 다른 대상으로 만든 것이 된다. 전통적으로는 ‘영혼’이라 불리는 이 ‘의식’은 일반적인 의미의 언어로는 알 수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다. ‘안다’는 것은 모두 주체와 객체, 아는 자와 앎의 대상이 있는 이원성의 영역 안에서의 일이다. 주체인 나, 그 ‘아는 자’ 없이는 어떤 것도 알 수 없고, 인식할 수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지만 그 ‘아는 자’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형상만이 앎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이 형상 없는 차원 없이는 형상의 세계도 있을 수 없다. 형상 없는 차원은 형상들의 세계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빛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이 나의 ‘순수한 있음’의 삶이다.

-생각의 흐름에 틈을 만듦으로써 내적 공간을 발견하라. 그 틈이 없으면 당신의 생각은 어떤 창조적인 불꽃도 없는 반복적이고 활기 없는 것이 된다. 이 행성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상태이다. 그 틈의 시간적 길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몇 초만이라도 충분하다. 그 틈은 당신 쪽에서의 어떤 노력 없이도 저절로 점점 길어질 것이다. 시간적 길이보다 중요한 것은, 그 틈을 자주 가져와서 당신의 매일의 활동들과 생각 흐름의 여기저기에 그 틈이 있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호흡을 자각하는 것은 생각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내적 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것이 의식을 탄생시키는 한 방법이다. (...) 호흡은 당신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어남이고, 당신은 그것을 관찰할 뿐이다. 호흡은 저절로 일어난다. 몸 안의 지성이 그 일을 하고 있다. 당신이 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긴장도 노력도 개입하지 않는다. 또한 호흡 사이의 짧은 멈춤을 주목하라. 특히 숨을 다 내쉬고 난 뒤 다시 들이쉬기 전의 고요한 지점을.

-내적 공간은 또한 자신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필요성을 내려놓을 때마다 일어난다. 그 필요성은 에고의 필요성이다. 그것은 진정한 필요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러한 행동 패턴을 하나씩 버릴 때마다 내적 공간이 나타난다. 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에고에게는 그것이 마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려고 시도하는 몇 가지 방식들이 있다. 만약 당신이 충분히 깨어 있다면 이런 무의식적인 패턴들 중 몇 가지를 자신 안에서 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한 것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화가 나거나 마음이 상하는 것.

*자신의 문제나 병에 대해 말하거나 소란을 피움으로써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

*아무도 묻지 않았고 상황에 변화를 일으키지도 못하는데 굳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

*다른 사람 자체보다도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를 더 신경 쓰는 것. 즉, 다른 사람을 자기 에고의 반영이나 에고 강화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

*소유물, 지식, 외모, 지위, 신체적 힘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인상을 심으려고 노력하는 것.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한 분노에 찬 반응을 통해 에고를 일시적으로 부풀리는 것.

*일들을 개인적으로 해석해 감정이 상하는 것.

*마음속에서 혹은 입 밖으로 도움이 안 되는 불평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린 것으로 만드는 것.

*주목받기를 원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것.

일단 이러한 행동 패턴을 자신 안에서 탐지했다면 한 가지 실험을 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 패턴을 버리면 어떤 느낌이 들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관찰하는 것이다. 단지 그 패턴을 중단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형상 차원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덜 강조하는 것은 의식을 생겨나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자신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중단할 때, 얼마나 큰 힘이 당신을 통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지 발견할 수 있다.

-삶 속에서 고요와 마주칠 때마다 그 고요를 알아차리면 자기 내면의 형상도 없고 시간도 없는 차원, 생각 너머와 에고 너머에 있는 차원과 연결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에 널리 스며들어 있는 고요일 수도 있고, 이른 아침 방 안에 깃든 고요일 수도 있고, 소리와 소리 사이에 놓인 조용한 틈일 수도 있다. (...) 고요는 형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통해서는 고요를 알아차릴 수 없다. 생각은 형태이다. 고요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고요하게 멈추는 것이다. 고요하게 멈춘다는 것은 생각의 방해 없이 의식이 깨어 있다는 것이다. 고요하게 멈출 때보다 더 본질적으로, 더 깊이, 자기 자신일 때는 없다. (...) 고요하게 멈출 때 당신은 개인이라는 육체적, 정신적 형상을 일시적으로 취하기 전의 그 당신이다. 또한 그 형상이 소멸했을 때에도 있게 될 그 당신이다. 고요하게 멈출 때 당신은 일시적인 존재 너머에 있는 당신이다. 조건에 물들지 않고, 형상이 없는, 영원 그 자체인 의식이다.

-깨어남에 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인가를 하려고 해도 그것은 깨어남이나 깨달음을 가치 있는 소유물로 추가함으로써 자신을 좀 더 중요하고 크게 보이려는 에고의 시도가 될 것이다. 깨어남 대신 깨어남이라는 ‘개념’을 마음에 덧붙이거나, 깨어 있는 사람이나 깨달은 사람은 이럴 것이라는 정신적 이미지를 추가하고서, 그 이미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혹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것은 에고가 연기하는 또 하나의 무의식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의 본질은 의식입니다. 의식, 즉 당신이 생각과 완전히 동일화되어 그 본질과 본성을 망각할 때 의식은 생각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에고의 주된 동기인 욕망이나 두려움 같은 정신적, 감정적 구조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 구조물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또한 행위와 사건에 대한 반응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곳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생각, 모든 욕망이나 두려움, 모든 행위와 대응이 허구의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허구의 자아는 ‘순수한 있음’의 단순한 기쁨을 감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 대용품으로 쾌락과 때로는 고통까지 추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순수한 있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래 존재를 잃은 상태에서는 어떤 성공도 지나가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성취하든 당신은 곧 다시 불행해질 것이고, 아니면 새로운 문제나 딜레마가 생겨 당신의 관심을 모두 사로잡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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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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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는가?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은 삶의 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장이다. 삶의 놀이는 다른 곳에서 펼쳐질 수 없다.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면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자신에게 무엇이 가능한지,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삶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는지를. 삶의 예술에 대한 비밀, 모든 성공과 행복의 비밀을 전하는 세 단어가 있다. ‘삶과 하나가 되기’이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은 현재의 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삶은 춤추는 자이고, 당신은 그 춤이다.

-일단 일정 수준의 의식에 도달하면 현재의 순간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도 당신이 결정할 수 있다. 현재의 순간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적이 되기를 원하는가? 현재의 순간은 삶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과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일단 현재의 순간과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고 결정하면, 먼저 당신이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것을 향해 우호적으로 다가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친구답게 환영하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삶 쪽에서도 당신을 향해 우호적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협조적이 되고 상황도 협력적이 된다. 한 가지 결정이 당신의 현실 전체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결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한다.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방식이 될 때까지.

-현재의 순간을 친구로 삼으려는 결정은 에고의 종말을 의미한다. 에고는 결코 현재의 순간과 사이좋게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삶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에고의 본성 자체가 현재의 순간을 무시하고, 저항하고, 가치를 깎아내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고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에고가 강할수록 삶은 한층 더 시간에 지배된다. / 그렇게 되면 당신이 하는 거의 모든 생각이 과거 또는 미래와 관련된 것이 되어 버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과거에 의해 결정되며, 자기실현을 미래에 의존한다. 두려움, 불안, 기대, 후회, 죄책감, 분노 등은 의식이 시간에 얽매여 기능장애 상태가 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가장 나쁜 경우는, 이것 또한 매우 흔한데, 현재의 순간을 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싫거나, 상황이 불만스럽거나, 일어나고 있는 일과 일어난 일에 욕을 퍼부을 때, 혹은 마음속 대화가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로 이루어져 있을 때, 비난과 남 탓으로 흘러넘칠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지금’에 반론을 제기하고 이미 그것인 것과 다투고 있는 것이다. 삶을 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삶도 “싸움을 원하면 싸우게 해 주지.”라고 응답한다.

-자신에게 자주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다. “나는 현재의 순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리고 그 해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삼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장애물로 보고 있는가? 나는 혹시 그것을 적으로 취급하지는 않는가? 현재의 순간만이 당신이 유일하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이므로, 또한 삶은 ‘지금’과 분리시킬 수 없으므로, 그 질문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삶과 어떤 관계인가?”

-시간은 삶의 수평적 차원, 현실의 표면층이다. 그러나 삶에는 깊이라는 수직적 차원도 있다. 수직적 차원에는 오직 ‘현재의 순간’이라는 입구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시간을 주는 대신 시간을 제거해야 한다. 의식으로부터 시간을 제거하는 것은 에고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영적 수행이다.

 

-현재 순간의 있는 그대로를 의식 속에서 받아들이면 삶의 수직축 차원, 깊이의 차원이 열린다. 그리고 그 수직축 차원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무한의 가치를 가진 무엇인가가, 그렇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고 그대로 파묻혀 있었을 무엇인가가 이 세상 속으로 나온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의 제거이다. 심리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에고의 마음이 과거와 미래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에고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간을,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직후의 실로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에고는 현재의 순간과 우호적이 될 수가 없다. 게다가 어떤 것도 에고를 긴 시간 만족시킬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혹은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지금’이 취하는 모습들이다. 당신이 내면에서 그것에 저항하는 한, 그 모습들은, 바꿔 말해 세상은 돌파할 수 없는 장벽이 된다. 그 장벽은 모습(형상)을 초월한 당신 자신으로부터 당신을 분리하고, 형상 없는 ‘한 생명’으로부터 당신을 분리시킨다. 형상 없는 ‘한 생명’이 당신의 본래 존재이다. ‘지금’이 취하는 형상에 내면으로부터 긍정을 말하면, 그 형상이 형상 없는 세계로의 문이 된다. 세상과 신 사이의 분리가 사라진다. / ‘한 생명’이 이 순간에 취하고 있는 모습(형상)에 반발하고 ‘지금’을 수단, 장애물, 적으로 여기면 형상으로서의 정체성, 즉 에고를 강화하게 된다.

-형상에 대한 무저항을 통해 당신 안의 형상을 초월한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모두를 아우르는 ‘현존(이 순간에 존재함)’으로서 나타난다. 단기간에 소멸하는 형상 정체성보다 훨씬 더 위대한 침묵의 힘이다. 그리고 형상 세계의 어떤 것보다도 더 깊은 당신 자신이다.

-눈이 아무것도 볼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공간으로 지각된다. 귀가 아무것도 들을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고요로 인식된다. 형상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진 감각들이 형상의 부재를 만났을 때, 감각적 인식 뒤에서 모든 인식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 없는 의식은 더 이상 형상에 의해 흐려지지 않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 공간을 명상 속에 응시하거나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이른 새벽의 고요에 귀를 기울일 때, 당신 안에서 무엇인가가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그것과 공명한다. 그러면 당신은 공간의 무한한 깊이를 자신의 깊이로 감지하고, 형상 없는 소중한 고요가 당신 삶의 내용물을 채우고 있는 그 어떤 사물이나 사건들보다 훨씬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을 삶의 주된 목적으로 바라볼 때, 당신은 시간을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나큰 힘을 불어넣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시간을 무효화시킬 때, 당신의 내면적인 목적과 외부적인 목적이, 존재와 행위가 연결됩니다. 시간을 무효화시킬 때, 당신은 에고를 무효화시키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 당신은 특별히 잘하게 될 것입니다. 행위 그 자체에 온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신의 행위는 의식이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전화번호부를 넘기거나 방 안을 걷는 일처럼 가장 단순한 행위일지라도 당신이 하는 일 속에 깊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주된 목적은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일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이 전화번호를 찾는 것입니다. 방 안을 걷는 주된 목적은 방 안을 걷는 일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은 방 반대편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책을 집어 드는 순간, 그것이 당신의 주된 목적이 됩니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 당신이 하는 일들 속에 온전히 존재할 때, 당신의 행위에는 영적인 힘이 충만해집니다. 처음에는 당신이 하는 일 자체에 눈에 띄는 변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직 ‘어떻게 하는가’만 변할 것입니다. 당신의 주된 목적은 이제 당신의 일 속으로 의식이 흘러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은 그 행위를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무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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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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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체는 대부분의 인간 존재 속에서 살아가는 반자립적인 에너지 형태로, 감정으로 만들어진 독립체이다. 이 고통체는 교활한 동물처럼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원시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성을 주로 자신이 살아남는 데 활용한다. 모든 생명 형태와 마찬가지로 고통체에게도 주기적으로 먹이가,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신을 새로 보충하는 데 필요한 그 먹이는 자신의 에너지와 호환이 되는 에너지, 다시 말해 비슷한 주파수로 진동하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은 무엇이든 고통체의 먹이가 될 수 있다.

-무거운 고통체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이상을 위해 싸우는 활동가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실제로 가치 있는 이상일 수도 있으며, 처음에는 그 활동도 성공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행동에 흐르는 부정적인 에너지와, 적과 분쟁을 필요로 하는 무의식 때문에 반대파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활동은 대개 자기 조직 안에서 적을 만들면서 끝이 난다. 어디를 가든 그들은 기분 나쁠 이유를 찾으며, 그들의 고통체는 정확히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고통체로부터의 자유는 먼저 자신이 고통체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후에, 더 중요한 것은, 충분히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는 능력, 충분히 깨어 있는 능력이다. 그럼으로써 고통체가 활성화될 때 부정적인 감정이 심하게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끼고 자신 안에 있는 고통체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얼굴을 세상에 보여 주려고 하든 관계없이, 당신의 마음 상태와 감정 상태를 숨길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내면 상태에 해당하는 에너지 장을 내뿜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록 무의식적으로만 느낄는지 몰라도 상대방이 내뿜는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고통체를 인식하는가? 충분히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래서 고통체가 활성화되었을 때 그 감정이 생각으로 스며들어 자신을 ‘불행한 사람’으로 바꿔 놓기 전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모든 불행이 고통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불행도 있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서 벗어나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지금 이 순간’을 거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행이다.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이며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면 조건 없이 “예.”라고 말할 수 있고, 더 이상의 불필요한 불행을 창조하는 일도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내면에 존재하는 저항이 사라지면 삶 그 자체가 당신에게 힘을 가져다준다.

-고통체의 불행은 언제나 원인과 결과가 불균형하다. 말하자면 과잉 반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물론 고통체에 사로잡힌 당사자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무거운 고통체를 지닌 사람은 동요하고 분노하고 상처받고 슬퍼하고 두려워할 이유를 쉽게 발견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고 넘어가거나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이 심한 불행의 명백한 원인이 된다. 물론 그것들은 불행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 단지 방아쇠에 불과하다. 축적된 오랜 감정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 감정이 머릿속으로 옮겨 가 증폭되어서, 에고에 지배되는 마음 구조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고통체와 에고는 매우 가까운 친척이다. 양쪽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고통체를 촉발시키는 사건과 상황은 몹시 감정적인 에고의 화면을 통해 해석되고 반응을 일으킨다. 즉, 사건과 상황의 중요성이 완전히 왜곡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과거의 감정적인 눈으로 현재를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보고 경험하는 것은 현재의 사건과 상황 속에 있지 않고 당신 자신 안에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재의 사건과 상황 속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반응을 통해 더욱 확대시킨다. 이 반응과 확대야말로 고통체가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고통체는 그것을 먹고 산다. 무거운 고통체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왜곡된 해석, 즉 몹시 감정적인 ‘이야기’의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 종종 불가능하다. 이야기에 담긴 감정이 부정적이면 부정적일수록 그 이야기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뚫기 어려워진다. 이때 그 이야기는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고 현실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생각과 그것에 동반되는 감정 속에 완전히 갇혀 버리면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바깥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영화와 꿈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지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활동적인 고통체를 가진 사람과 맞닥뜨리게 되면 반응하지 않기 위해 매우 강하게 현재의 순간에 존재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통체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갑작스러운 깨어남의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반응하지 않았으며, 그녀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확인시켜 주지도 않았다. 그녀의 마음에 먹이가 되는 생각도, 고통체의 먹이가 되는 감정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 그녀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경험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의 힘은 개입하지 않는 것,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왔다.

-선에서는 이 관찰의 체험을 ‘초견성’이라고 부른다. ‘초견성’이라는 것은 현재의 순간에 존재함이며, 머릿속 목소리와 사고 과정으로부터, 그리고 그 생각이 몸속에 일으키는 감정으로부터 잠깐 동안 걸어 나오는 경험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내면에 넓은 공간이 생긴다. 이전까지는 생각의 소음과 감정의 혼란이 있던 곳에.

-자신의 고통체가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면, 어떤 상황과 타인의 말과 행동이 고통체를 가장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는지도 금방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계기가 일어날 때 그것의 정체를 즉각 알아차릴 것이고, 한층 더 깨어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1, 2초 만에 감정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즉 고통체의 등장을 알아차릴 것이다. 의식적인 ‘현존’이 가능하면 그 고통체와 동일화되지 않기 때문에 고통체에게 접수당해 머릿속 목소리를 빼앗기지 않고 끝이 난다.

-고통체에 사로잡힐 때마다, 그리고 고통체를 고통체로 알아볼 수 없을 때마다 고통체가 당신 에고의 일부가 된다. 당신이 동일화되는 대상은 무엇이든 에고로 바뀐다. 고통체는 에고가 동일화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이며, 고통체 또한 먹이를 얻고 자신을 재생시키기 위해 에고를 필요로 한다.

-다시 또다시 반복해 과거를 살게 만들고 당신을 무의식 상태 속에 계속 가둬 두는 것은 고통체가 아니라 고통체와의 동일화이다. 따라서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고통체와의 동일화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는 얼마나 오래 걸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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