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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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설명

1절 존재에 대한 물음을 분명히 다시 제기해야 할 필연성
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망각 속에 묻혀버렸다. (1)존재라는 개념이 너무나 보편적이고 공허하다는 편견 때문에. (2)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3)정의를 필요로 하지도 않을 만큼 자명한 개념이라고 여기는 편견 때문에. 과연 그런가? 이러한 선입견에 대해 논의해보자.

 

(1)존재란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긴 하다. 그러나 존재는 모든 유(類)를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그러한 유가 아니다. 존재의 보편성은 모든 유적 형태의 보편성을 넘어선다. 존재는 중세 존재론의 관점으로 보자면 ‘초월자’이다. 존재는 초월적 보편의 단일성, 유비의 단일성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존재 개념을 명확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 개념이 가장 명확한 개념이고 더 이상의 어떠한 논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라는 개념은 오히려 가장 어두운 개념이다.

 

(2)존재라는 개념이 정의될 수 없기는 하다. 존재에는 어떤 다른 본성이 덧붙어질 수 없다. 존재는 거기에 존재자가 서술되는 식으로는 규정될 수 없다. 존재는 정의상 더 고차의 개념들로부터 도출될 수도 없고 하위의 개념들에 의해서 서술될 수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귀결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그런 어떤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 뿐이다. 존재의 정의불가능성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않아도 된다고 면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물음을 던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3)존재는 자명한 개념이지만, 존재가 눈앞에 있기에 자명하다는 그런 평균적인 이해가능성은 단지 몰이해성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존재자들끼리 맺는 모든 행동관계와 존재 그 자체 사이에 선험적으로 하나의 수수께끼가 놓여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리는 각기 이미 하나의 존재이해 속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존재의 의미는 어두움에 싸여있다는 이 사실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다시 제기해야 할 근본적인 필연성을 입증한다.

 

이상의 고찰은 존재에 대한 물음에는 대답만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 물음 자체가 어둡고 갈피를 못 찾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기 전에 우선 물음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2절 존재에 대한 물음의 형식적 구조
존재물음은 세 가지 구조계기를 갖는다. (1)물음의 대상이 되는 것=존재. (2)궁극적으로 밝혀져야 할 것=존재의 의미. (3)물음이 걸리는 것=우리 인간인 현존재(물음이 여러 존재자들 중 특별히 우리 현존재에게 걸리는 이유는 4절에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2)존재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3)우리 자신 현존재에게 (1)존재에 대하여 물을 때, 이러한 물음은 이미 우리가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존재이해에 입각해서 행해진다. 완벽한 백지상태라면 물음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가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존재가 무엇인지 묻고 있을 때, 이미 우리는 “이다(있다)”에 대한 이해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 “이다(있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개념적으로 확정할 수 없으면서도 말이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분명하고 투명하게 제기하기 위해서는 존재이해를 갖는 존재자인 현존재의 존재구조를 구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분석을 실마리로 하여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은 일종의 순환논법이 아닐까. 현존재의 존재도 하나의 ‘존재’인 이상, 현존재의 존재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선정한 실마리인 현존재 역시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 탐구 가능한 그런 것이 아닌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존재’는 분명히 지금까지의 그 모든 존재론에서 ‘전제되었다’. 그렇지만 정확한 개념으로서가 아니다. 즉 찾고 있는 그것으로서가 아니다. 존재를 ‘전제함’은 존재에 대한 앞선 관점취득의 성격을 띤다. 잠정적인 선이해, 막연한 선이해. 이러한 이해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존재물음은 막연한 이해를 투명하게 하고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뿐 어떤 명확하게 확정된 원칙에서 연역적으로 논증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3절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
역사, 자연, 공간, 삶, 현존재, 언어 등 다양한 사태분야들은 저마다 하나의 학문적 대상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학문적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탐구의 진보는 사태에 대해 실증적으로 탐구하고 그에 따라 증대되는 지식과 확장되는 범주체계로부터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각 사태분야의 근본 구조에 대한 물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근본개념들은 각각의 학문 분야를 구체적으로 열어 밝히는 실마리이자 모든 실증적인 탐구를 주도하는 규정들로서, 각각의 학문이 주제로 삼는 대상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사태영역 자체를 선행적으로 철저히 탐구할 때에만 증명될 수 있다. 근본개념들을 길어내는 선행적인 탐구란 각 사태영역의 존재 구조에 대해 분석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존재론’적 물음은 존재 일반의 의미가 제대로 규명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소박하고 불투명한 것으로 끝나고 만다. 각각의 존재영역이 갖는 고유성을 사태 자체에 입각하여 드러내려고 하면서 그것들 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존재영역들 간의 관계를 밝히는 계보학이 필요한 까닭이다. 존재물음은, 이미 하나의 존재이해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 학문들의 선험적 가능조건뿐만 아니라, 개별 학문들 존재자에 선행하면서 그것들에 기초를 부여하는 영역존재론들 자체의 가능조건까지도 명확히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점에서 존재물음은 실증적인 학문들이나 영역존재론에 대해서 우위를 갖는다. 

 

4절 존재물음의 존재적 우위
현존재는 어떠한 방식과 명확성에서건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다. 이 존재자에게 고유한 점은 자신의 존재와 더불어 자신의 존재에 의해서 그 자신에게 그의 존재가 열어 밝혀져 있다는 사실이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가 곧 현존재를 규정하는 성질 중 하나이다. 현존재의 존재적인 뛰어남은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데 있다. ‘존재론적으로-존재한다’는 말은 아직 명확한 존재론을 형성한 건 아니지만 존재론의 맹아랄 만한 어떤 것을 갖고 있다는 얘기. 단순히 ‘존재적으로-존재하는’ 정도는 넘어선, 그 이상의 어떤 이해를 갖고 있다는 뜻.

 

현존재가 다른 존재자들과 갖가지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러한 존재 방식 자체를 우리는 실존이라 말한다. 현존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그의 실존에서부터, 즉 그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거나 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한 가능성에서부터 이해한다. 현존재는 이러한 가능성들을 그 스스로 선택했든가, 아니면 그 가능성들 안으로 빠져들게 되었든가, 아니면 각기 이미 그 안에서 성장해왔다. 이렇게 주도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우리는 ‘실존적 이해’라고 한다.

 

(‘실존적 이해’와 구분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 ‘실존론적 이해’다. ‘실존론적 이해’는 실존의 존재론적인 구조에 대한 이론적 통찰이다. 인간존재가 갖는 존재론적인 구조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작업. 각자적인 실존을 구성하는 근본구조들에 대한 분석.)

 

실존적 이해를 갖는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이다. 즉 현존재에 속하는 존재이해는 세계와 세계 내부의 존재자들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을 주제로 하는 모든 영역존재론은 존재이해를 갖는 존재자인 현존재 자신의 존재적 구조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영역존재론을 기초 짓는 기초존재론은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5절 현존재의 존재론적 분석론은 존재 일반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한 지평을 파헤쳐 드러냄이다
시간성은 현존재의 존재 의미를 탐구하기 위한 지반이다. 현존재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지평으로서의 시간. 시간이야말로 모든 존재이해 및 모든 존재해석의 지평으로서 밝혀져야 하며 진정으로 그 개념이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 현존재의 존재의미인 시간성은 통속적 시간 이해(=‘지금’이라는 시점들의 연속으로서의 시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시간이 ‘지금이라는 시점들의 연속’이 아니라면, 현존재의 존재의미로서의 시간이란 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가? 무엇을 뜻하는가?)

 

6절 존재론의 역사를 해체해야 하는 과제
시간성은 현존재 자신의 시간적 존재양식인 역사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역사성을 갖는 현존재는 과거로부터 전승되어온 현존재 해석 속에서 성장한다. 대부분의 경우 현존재는 전승된 현존재 해석에 의거해서 자신을 이해하며, 이러한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을 개시하고 규제한다. 따라서 현존재의 과거는 현존재의 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를 앞서서 인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존재가 역사성에 의해서 규정된다면, ‘존재물음’ 그 자체도 역사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존재물음 이전에 존재물음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선행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의 근거에 있어서 역사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 현존재는 자각적으로 전통을 발견하면서 그것과 대결하기도 하는데, 앞으로 내가 서술하려는 존재물음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시 그러한 의도로 수행하는 것이다. (이후로 칸트, 데카르트, 고대 그리스 철학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존재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서 존재론의 역사를 소급적으로 해체해 나가는 내용이 이어진다.)

 

7절 탐구의 현상학적 방법
현상학은 존재물음을 수행하는 방법론이다. 현상학의 몇 가지 예비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현상’이란 스스로를 그 자신에 입각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을 경우에만, 즉 현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경우에만 그것은 그 자신이 아닌 어떤 것으로서, 즉 ‘가상’으로서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때 가상이란 현상의 결여적 변양이라고 할 수 있다. 사태 그 자체를 드러내는 현상이 있고, 현상의 결여적 변양으로서 가상이 있다면, ‘나타남’은 현상이나 가상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개념이다. 나타남이란 징후, 상징, 지시, 알림이다. 드러나지 않는 것, 은닉되어 있는 것, 본질적으로 결코 드러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방사되어 나오는, 끄집어져 나오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나타남 역시 가상과 마찬가지로 현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현상, 가상, 나타남과 더불어 검토해 봐야 할 것으로 ‘로고스’가 있다. 로고스란 말을 통한 드러남이다. 음성으로 발설함으로서 밝혀지는 어떤 것. 어떤 것을 지시하면서 비로소 보이게 되는 그 무엇, 언어로서 발견되는 그 무엇. 로고스는 드러냄이기 때문에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현상학의 기초개념들이 위와 같다면, 현상학이 보이게 해주어야 할 그것은 무엇인가? '현상'이라고 지칭되어야 할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 본질상 필연적으로 명시적 제시의 주제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내보이지 않고 있는 것, 자기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그것에 비추어볼 때 은폐되어 있는 것, 그럼에도 동시에 자기 자신을 내보이고 있는 그것에 본질적으로 속하여 있는 것이다. 은폐된 채 남아있거나, 전에 한 번 발견되었으나 다시 은닉 속에 빠져버렸거나, 위장되어서만 자신을 내보이는 그것은 이 존재자 또는 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아주 심하게 은닉되어 그것이 망각되고 그것 또는 그것의 의미에 대한 물음조차 제기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바로 이것이 현상학이 손아귀에 넣어야 할 학문적 대상이다.    

 

현상학은 존재론의 주제가 되어야 할 그것(존재)으로 나가는 접근양식이며 그것을 증명하며 규정하는 양식이다. 존재론은 오직 현상학으로서만 가능하다. 존재론이 철학의 대상을 가리키는 용어라면, 현상학은 철학의 방법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8절 논구의 개요

존재의 기본개념을 획득하고 그 기본개념에 의해 요구되는 존재론적 개념성 및 이 개념성의 필연적 변양들을 소묘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실마리가 필요하다. 현존재라는 특정한 존재자에 대한 해석을 발판으로 하여 존재 개념으로 전진해 나가는 탐구의 특수성은 존재 개념의 보편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도리어 존재의 이해와 해석을 위한 지평은 현존재에게서 획득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존재는 그 자체로 시간성을 가지며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 존재자를 존재론적으로 철저하게 조명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역사적인 해석이 된다. 따라서 존재물음의 수행은 먼저 현존재를 시간성을 겨냥해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서 제시하는 1부, 그리고 존재론의 역사를 현상학적으로 해체하는 2부로 나뉜다. 2부에서는 6절에서 간단히 살폈던 칸트와 데카르트 아리스토텔레스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제1부 현존재를 시간성으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 설명함
제1편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 기초분석

제1장(9절~11절)의 주요내용: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은 유사한 여느 다른 분석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어떤 점이 무엇 때문에 구별되는가?
제2장(12~13절)의 주요내용: 현존재의 기초적 구조는 ‘세계-내-존재’이다. ‘세계-내-존재’란 무엇인가?
제3장~제5장(14절~38절)의 주요내용: 2장에서 더 심화되는 논의 전개.
제6장(39~44절)의 주요내용: 현존재의 실존론적 의미는 ‘염려’이다.

 

9절 현존재분석론의 주제(앞으로 내 생각은 []로 묶어 구분)
현존재분석론의 주제는 당연히 현존재, 즉 나 자신이다.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다. 현존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다. 현존재마다 그의 고유한 존재가 그에게는 떠맡겨져 있다. 현존재에게 떠맡겨져있는 그의 고유한 존재, 이것을 실존이라 지칭한다. 현존재가 관계 맺고 있는 자기의 존재는 곧 실존이고, 실존이 바로 현존재의 본질이다. 실존이라는 말은 현존재한테만 쓴다. 현존재 외의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에는 실존이라는 말을 안 쓰고 ‘눈앞에 있음’이라고 해두자.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 실존이란 존재자의 눈앞에 보이는, 현존재에게 이미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런 저런 고정된 속성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실존이란 ‘그때마다 각기 현존재에게 가능한 존재함의 방식들’이다. 실존이란 구체적으로 처해있는 삶의 국면들 속에서 매 순간마다 또 매 상황마다 현존재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이다. 이미 완성된 무언가가 아니라, 완성해야 할 하나의 과제로서 주어져 있는, 구현해야 할 하나의 가능성. 이렇게 현존재는 그의 존재에 대해서 그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관계한다. 현존재는 각기 그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현존재는 그의 존재에서 자기 자신을 선택할 수도 있고 획득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겉보기로만 획득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기 자신을 상실할 수도 있다.

 

[인간은 돌이 아니다. 개, 돼지도 아니다. 인간은 강물이 범람하면 뗏목을 만들고 추우면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운다. 사랑하고 투쟁하고 노동하고 춤추고 지배하고 매매하고 배신하고 속이고 헌신한다. 세계와 매순간 뜨겁게 상호작용하면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자기 앞에 주어진 무수한 가능성들을 펼쳐내면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구현하며 산다. 이것이 바로 현존재의 존재의 본질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실존은 항구적이거나 고정된 게 아니다. 정적인 게 아니라 동적인 것. 미래적이고 변화하는 것. 능동적인 것, 주도적인 것, 참여적인 것, 끊임없이 형성되어져 가는 도래하는 어떤 것이다.]

 

자기 자신을 획득한다는 건 무엇이고 상실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현존재를 규정하는 두 가지 존재양태로서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적인 실존이라 함은 현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구현하면서 사는 존재방식을 말한다. 현존재가 비본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존재양태가 도피의 양태일 수도 있고 망각의 양태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존재의 존재양태가 비본래성을 띤다고 해서 그것이 모자라거나 낮은 차원의 존재등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본래성을 띠는 현존재는 그 누구보다도 세상일로 분주하고 각종 사건에 흥분하고 다방면에 관심 많고 곳곳에서 향락을 누리는 존재자다. 어쨌든, 도피든 망각이든 현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존재와 평균적인 일상성의 양태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현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태도'를 취하고 있다.

 

현존재분석론의 주제인 현존재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로 마치고, 이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이 여느 유사한 다른 분석들과 구별된다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범주와 실존범주의 차이를 설명해보자. 먼저 범주라는 것은 눈앞의 사물들의 존재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특성들을 말한다. 반면에 실존범주라는 것은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방식, 즉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는 구조계기들을 말한다. 왜 이렇게 구분하느냐면, 앞서도 말했지만 현존재의 존재는 존재자가 갖는 눈앞에 존재하는 특성들을 단순히 기술하고 분류하면서 그것에서 공통된 특성들을 끌어들이는 (기존의 서양철학이 존재자를 이해하는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방식들, 즉 현존재가 실존하는 방식들과 관련하여 기술되어야만 한다. 사물이 존재하는 것과 현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눈앞의 사물들의 존재를 파악하는 범주와 현존재의 존재를 파악하는 실존범주는 전적으로 달라야 하고 또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현존재는 현존재 아닌 것과 구별되어야 하고(실존범주 vs 범주, 실존 vs 눈앞에 있음, 현존재 vs 존재자), 현존재분석론 또한 인간학, 심리학, 생물학과 구별되어야 한다. 후자에 대한 내용은 다음 절에서 한다.

 

10절 현존재분석론을 인간학, 심리학, 생물학과 구별지어서 한정함
데카르트는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지만 그는 사유에 대해서만 논의할 뿐 존재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지 않다. 사실 사유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실존적인 삶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유한다’가 옳다. 의식작용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자아나 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화되거나 실체화할 수 있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그렇게 여느 사물적인 존재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재는 그때마다의 역사적인 세계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든지 아니면 실현하지 못하는 식으로 살고 있다. 현존재가 갖는 이러한 실존방식에 대한 분석은 의식작용에 대한 내적인 반성이 아니라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삶 전체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이후 딜타이, 후설, 셸러까지 차례차례 까대는데 이는 생략) 이처럼 근대철학이 현존재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까닭은, 전통적 인간학의 두 원천인 고대그리스와 그리스도교의 인간학이 인간을 여느 다른 존재자와 똑같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를 ‘실존’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물들의 경우와 같이 ‘눈앞의 존재’로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듯이 보이지만 기실 현존재의 존재가 그 어떤 물음 아래에도 놓이지 않고 있기로는 인간학(철학)뿐만이 아니다. 심리학, 생물학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인간과학들은 인간에 대한 선이해를 전제로 하여 인간을 연구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 모두 선이해 자체는 문제 삼지 않고 있다.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은 모든 인간과학에 선행하여 그것들에 기초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11절 실존론적 분석론과 원시적 현존재의 해석. “자연적 세계개념” 획득의 어려움
내가 현존재를 그의 일상성에서 해석한다고 말할 때의 그 일상성이란, 현존재가 고도로 발달되고 세분화된 문화 속에서 움직이고 있을 때의 현존재의 한 존재양태이다. 그러나 원시적인 현존재도 그들 나름의 일상성을 가지고 있을 테고, 때로 원시적 현존재는 현상들에 근원적으로 몰입하여 더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우리 측에서 볼 때 서툴고 거친 개념성이 현상들의 존재론적 구조를 순수하게 끄집어내오는 데 더 유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원시인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온 민속학 역시 인간 현존재에 대한 특정한 개념과 해석 안에서 움직이고 있고, 이 학문이 가지고 있는 맹점도 앞서 비판한 여느 인간과학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인간을 주제로 한 여러 방면의 지식이 풍부해진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존재자에 대한 지식 획득을 넘어서 존재에 대해서 묻는 것이 모든 학문적 추구의 궁극점이라면, 존재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자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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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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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러 가지 가치들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사실로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서 여겨왔지만 니체는 그러한 가치들 자체의 가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가치란 결코 선험적으로 주어진 절대적인 그런 게 아니라, 평가를 통해 만들어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미(美)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때, 니체는 사람들이 미(美)에 대해 질문하는 징후의 이면에서 그러한 미(美)라는 가치를 형성케 하는 메커니즘과 기원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무엇이, 누가, 우리로 하여금 미(美)라는 현상을 가치롭게 여기도록 하는가? 대체 어떤 힘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이러한 것에 미적 가치를 부여하는가?

 

니체는 진리를 포괄적으로 정의할 것을 요구하는 소크라테스의 질문과는 달리,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현상의 의미와 가치를 분석하기 위한 질문을 던진다. 가치롭다고 하는 것들이 대체 어떤 토양에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그 토양은 어떤 가치가 있는지, 하는 가치들 자체에 대한 가치 평가. 가치들을 발생케 하고 전개시키고 변화시켜 온 조건과 환경, 그 기원에 대한 계보학적 추적. 니체의 계보학은 현상과 의미, 그리고 힘(권력)의 관계를 문제 삼는 철학이다. 이렇게 니체는 현상의 의미를 힘의 지배 속에서 포착함으로써 외관과 본질이라는 형이상학적 이원성을 대체하며, 또한 원인과 결과라는 과학적 관계도 대체한다. 그에게 철학은 '징후학'이자 '기호학'이다.

 

니체는 능동성과 반동성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힘의 존재방식의 차이가 가치를 파생한다고 본다.

 

<가치를 발생하게 하는, 즉 가치의 원리 구실을 하는 두 가지 힘의 종류 및 그들의 특성>

 능동적인 힘(=작용하는 힘=지배하는 힘)  반동적인 힘(=반응하는 힘=복종하는 힘)

 *생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다양성을 긍정하는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됨. 니체에 의해 우아하고 고귀하고 건강하고 진정한 것으로 평가됨.
*'작용하는 힘'에의 의지의 특성- 춤, 경쾌함, 웃음 등으로 표상됨. 생의 발랄한 생성과 흐드러진 다양성을 긍정함. 긍정하는 권력의지 속에서 생성과 존재, 다수성과 일자, 시간과 영원, 우연과 필연은 더 이상 대립하지 않고 서로 화해한다. 복수성, 다원론적 경쾌함을 지향.

 

 

 

 *생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다양성을 부정하는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됨. 니체에 의해 저속하고 비루하고 병약하고 왜곡된 것으로 평가됨.
*'반응하는 힘'에의 의지의 특성- 기존의 가치가 명령하는 바에 다라서 묵묵히 노동하는 성격. 춤이 아니라 노동, 경쾌함이 아니라 무거움, 웃음이 아니라 우울함을 자신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갖는다. 기존의 가치에 순종하면서, 시간적인 생성과 다수성을 영원한 일자로서의 존재와 대립되는 것으로 보면서 덧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비하한다. 단일성, 일원론적 무거움을 지향.

① 생과 세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 힘은 질적으로, 유형론적으로, 존재방식 상의, 현존 양태 상의 차이가 있다.

② 어떤 현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단순히 둘 중 하나의 힘을 가정해서는 곤란하다. 이면의 힘이 표면의 현상을 제압하는 과정에는 늘 저항과 반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니체의 철학은 이렇게 '복수의 힘'(힘의 다원성)을 고려하는 것이고, 거기서 의미의 경합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현상에 대한 '유일한 원인'이 없다는 점에서 '신은 죽었다'. 의미는 철저히 힘들의 다원성 속에서 결정된다.(복수주의)

③ 니체는 ‘힘’과 ‘힘에의 의지(권력의지)’를 구별한다. 힘보다도 힘에의 의지(권력의지)가 더 심원한 것임. 권력의지는 힘을 발생시키는 요소이며, 힘의 미분적 요소이다. 권력의지로부터 힘이 비롯된다. 권력의지는 사물이나 주체에 개별 대응하지 않고 그것들의 보다 기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사물이나 주체, 현상, 그런 대상들은 그 자체가 뒤엉킨 여러가지 권력의지들의 표현, 힘들의 출현이다.

④ 처음에 어떤 새로운 힘이 한 대상을 이미 점령한 앞선 힘들의 가면을 쓸 때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그 대상을 제 것으로 삼을 수 있다. 만약 어떤 힘이 그가 반대해서 투쟁하는 앞선 힘들의 얼굴을 우선 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위와 같이 상반된 힘의 존재방식에 따라 어떤 것이 가치 있느냐에 대한 감정과 생각이 다르게 발생한다. 능동적인 힘을 발휘하는 ‘고귀한 자’들이 가치롭다고 평가하는 가치와 반동적인 힘을 발휘하는 ‘저속한 자’들이 가치롭다고 평가하는 가치는 각각 다르다. 전자, 귀족들은 이기/이타의 대립 자체를 모르고 따라서 거기에 어떤 선악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반면, 후자, 노예들은 비이기적인 행위에 선이라는 가치를 부여한다.

 

힘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 있지만 그와 관련된 권력의지는 상대적으로 강할 수도 있는 법이다. 가령, 약자들의 교묘한 지배전술(무리형성)은 비록 박탈된 힘이기는 하지만 그런 힘들의 연합을 통해 권력의 확보와 지배의지의 달성을 이루기도 한다. 기독교 사제들이 대중들에게 원죄의식을 전파하고 천국이라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꿈꾸게 하고 현실을 무가치한 것으로 세뇌시킴으로써 대중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방식, 이것은 일종의 노예적 사상을 감염시키고 전염시키는 일과도 같은데, 역사상 이러한 교묘한 방식으로 약자가 지배 권력을 찬탈하는 경우가 상당했다. 이같이 미약한 힘이라도 그 힘이 갖는 권력의지의 끈질김은 무시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힘과 권력의지는 비례관계에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일한 의지 대신 복합적인 의지, 복수의 의지들이 만들어내는 힘의 관계들, 현상의 이면에서 꿈틀대는 복수의 의지들의 경합이다.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탈취하고, 점령하고, 독점하고, 소유하고, 이용하는 힘들의 연속이며 그것을 점령하기 위해서 서로 투쟁하는 힘들의 공존이다. 동일한 대상, 동일한 현상이라도 그것을 소유하는 힘에 따라서 의미가 변화한다. 새로운 힘이 사물(대상)을 지배하면 그에 따라 그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지게 된다. 사물의 의미는 그것과 그것을 독점하는 힘의 관계이고, 어떤 것의 가치는 복합적인 현상인 한에서, 사물 속에 표현되어있는 힘들의 서열이다.

 

그러나 어떤 힘이 다른 힘을 대상으로 취한다고 해서, 힘들이 서로 경합하고 투쟁한다고 해서, 한 힘이 다른 힘을 부정하고 변증법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른 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복종하는 힘은 다른 힘이나 자신이 아닌 바를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긍정하고 이 차이를 향유한다.”(30) 니체는 부정과 대립 또는 모순의 변증법적 요소 대신에 차이라는 실천적 요소, 긍정과 즐김을 내세운다. 니체는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차이를 긍정하고 즐긴다. 변증법이 노동이라면 니체의 방식은 기쁨과 향유이다.

 

그렇다면, 대립과 모순 그리고 부정을 사유전개의 필수요소로 하는 변증법적 가치평가를 살펴보자. ‘너는 악하다’라고 말하는 어린 양은 이 타자에 대한 부정적 규정을 통해 ‘나는 선하다’라는 자신에 대한 긍정적 규정을 확보한다. 부정의 부정, 이 이중의 부정 속에서 자기 긍정이 탄생한다. 부정해야 할 타자나 외부세계를 먼저 요청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은 철저히 노예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강자는 어떤가? 그는 자신의 고귀함에서 솟아나는 자기 긍정에서 출발한다. 만약 나와 같다면 너도 고귀하다. 그러나 나와 같지 않다면 너는 불쌍하고 비천한 존재이다. 이렇게 강자에게서는 "부정적인 것이 항상 자신의 현존에서 파생하는 부차적인 산물"이다.

 

변증법이 모든 운동의 절대적 원리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과연 어떤 권력의지가 변증법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걸까. 변증법을 진리로서 가치 매기는 바로 그 의지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 “차이를 긍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고갈된 힘, 더 이상 스스로 움직이진 않지만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해 반응은 하는 힘”만이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부정을 자신의 고유한 본질과 현존의 원리로 삼는다. 힘을 쓸 수 없는 무력한 어린 양은 맹금이 맹금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책임을 지우는 권리”를 노예적 가치평가를 통해 고안해낸다. 맹금은 ‘힘을 쓰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나쁜 의도를 갖고 고의적으로 힘을 발휘했다’는 비난을 받고 자신의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능력을 박탈당한다. 변증법은 이렇게 병들고 약한 자들의 사유이자 “노예의 사고방식”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는 헤겔적 운동은 실상 노예적 운동이다. 모든 차이의 관계를 대립과 부정과 모순으로 만드는 자는 노예이며, 노예만이 변증법적으로 사유한다. ‘권력의지의 차이’가 어린 양에게는 저 맹금이 사악한 의도로 행사하는 나쁜 ‘권력’으로 표상된다. 차이를 향유하는 의지, 차이 속에서 긍정을 발견하려는 의지, 차이를 낳고자 하는 의지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빼앗아 와야 하고 약탈해야 하는 권력, 탈취하여 똑같이 재현하고자 하는 권력, 그저 우월성의 표상으로서의 권력, '어떤 이'에 의한 '다른 이'의 우월성에 대한 재인식으로서 이해되는 권력, 경쟁의 목표로서의 권력,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인 주인-노예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권력의 표상이다.

 

그럼에도 니체의 비극론에서는 변증법의 냄새가 난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의 대립 그리고 비극으로의 종합이라는 점에서. 자세히 보자. 아폴론은 개체의 고통을 아름답고 영원한 가상, 꿈 또는 조형적 이미지로 승화하면서 극복한다. 아폴론적인 예술을 관조하면서 우리는 경험적인 세계의 무상성에서 벗어나 이데아 세계의 영원과 부동성을 경험하게 되고, 또한 우리가 사는 세계와 인간의 본능적인 충동들을 신성한 것으로서 긍정하게 된다. 반면,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인 음악은 우리를 세계의지 자체와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현상세계의 덧없음에서 벗어나게 한다. 디오니소스적 음악이 경험적인 세계의 근저에 있는 심연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을 원초적 통일로 되돌아가게 하고 원초적 존재 속으로 흡수한다면, 아폴론적인 예술은 경험적인 세계를 넘어선 이데아 세계의 광명을 표현한다. 음악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을 망각하고 음악이 표현하는 세계의지와 혼융일체가 되어 버리는 반면에, 아폴론적인 예술에서 인간은 개별적인 사물에 나타나 있는 이데아를 관조하면서 이것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음악 속에서 우리는 슬퍼하고 기뻐하는 방식으로 ‘도취’하지만 아폴론적인 예술에서 우리는 조용한 ‘관조’ 상태를 유지한다.

 

이 두 가지 예술충동은 “모순을 해소하는 반테제적인 두 방식으로서 서로 대립한다.”(37) 그리고 이내 이들은 비극이라는 통일로 나아간다. 비극은 “디오니소스에 의해 지배되는 경탄할 만한 일시적인 동맹”이다. 왜냐하면 비극의 유일한 인물이 디오니소스이고, 비극의 유일한 주제도 디오니소스의 고통과 파멸, 원초적인 존재의 쾌락 속에서 소멸되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극의 유일한 관객도 디오니소스를 주인으로 모시는 합창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들을 드라마적인 방식으로 형태화하는 게 아폴론적인 활동이다. 비극은 아폴론적인 요소, 즉 아름답고 명료한 서사적 줄거리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사람들의 심금을 파고드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제공한다. 결국, 비극은 ‘모든 개체성의 근원이면서 그러한 개체성이 몰락하면서 되돌아가는 영원한 근원적인 세계의지’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지혜를 아폴론적 예술수단에 의해서 형상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변증법적인 비극론이 전개된 데 대하여 니체 역시 <이 사람을 보라>에서 스스로 “위험스럽게 헤겔주의 냄새가 풍긴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니체는 더 중요한 것이 분명 <비극의 탄생>에 담겨있다고 주장하면서, 아폴론 대 디오니소스라는 변증법적 대립을 대신하여 디오니소스에 대립하는 항으로서 소크라테스를 데려온다. 소크라테스는 디오니소스적이지도 아폴론적이지도 않다. 비극이 도취와 열정과 충동 속에서 존재의 심연을 파고드는 데 반해, 소크라테스는 모든 도취와 충동을 비판하고 오로지 관념적인 의식만을 창조적인 반열에 올린다. 그는 "관념과 삶을 대립시키고, 삶을 관념에 의해서 판단되고 정당화되고 대속되는 것으로 놓는다."(41)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고, 삶을 그 자체로 체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려 했던 형이상학의 정초자, 오로지 근거율과 인과율에 의해 삶을 판단하고 정당화하는 주지주의적인 낙천주의자, 관념의 견지에서 삶을 판단하는 퇴폐의 천재, 소크라테스. 그가 바로 “비극적 인간의 단 하나의 참된 대립자”이다.

 

니체 사유의 흐름 속에서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의 대립은 더 나아가 디오니소스와 기독교의 대립으로 대체된다. 디오니소스와 기독교는 ‘삶 속에 존재하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른 상반된 두 방식을 보여준다. 디오니소스가 고통을 그 자체로 정당한 것으로,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가장 모진 고통조차도 긍정하고, 가혹한 고통의 삶 그 자체를 전폭적으로 긍정한다면(극단적 평가 절상), 기독교의 고통은 삶을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근거이면서 동시에 삶의 부당함을 극복하고 우리가 삶에서 구원받기 위한 수단이 된다(극단적 평가 절하). 기독교에서의 삶은 징벌이며, 구원되어져야 하는 무엇이다. “이상이 제조되는” 그 “어두컴컴한 공장 내부”를 들여다보라. 그것은 어린양의 논법이다. “보복하지 않는 무력감”은 ‘선’이 되고, 공격하지 못하는 비겁함은 ‘인내’와 ‘용서’가 되고, 심지어 “적에 대한 사랑”이 된다.

 

‘구원자’라는 생각 속에 기독교의 모든 비밀이 숨어있다. 삶으로부터의 구원? 그렇다면 이 삶이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닌가. 구원자의 관점에서 “삶은 성스러움으로 인도하는 길이어야 한다.” 반면 디오니소스의 관점에서 “현존은 더욱이 엄청난 고통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45) 니체의 ‘구원’은 이 삶으로부터 신성함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게 아니라 이 삶 자체를 사랑하고 긍정하는 방법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모든 화해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 즉 긍정을 얘기한다. 부정의 운동, 대립하고 지양되고 해소되어야 하는 모순보다 더 고귀한 것은 “가치전환”이다. 이제 우리는 니체의 비극론을 변증법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하나의 가치전환으로 볼 필요가 있겠다. 디오니소스와 예수의 대립은 변증법적 대립이 아니라, “변증법 그 자체와의 대립”(46)이다. 즉 “변증법적 부정에 반대하고, 모든 허무주의에 반대하며, 또 허무주의의 그 특별한 형태에 반대하는 미분적인 긍정인 것이다.”(46) 마치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선악 자체에 대한 대립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이데올로기(이는 곧 변증법적 사유)와 니체의 비극적 사유 사이에는 공통적인 인식이 있다. 둘 다 현존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죄를 범한 결과로(기독교에서는 원죄설, 그리스신화에서는 프로메테우스 이야기),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되어야 할 부정적인 그 무엇으로 본다는 점. 현존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본다는 점은 같지만 그리스인들의 해석과 기독교적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인들 역시 기독교도들처럼 현존을 죄로 만들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기독교적인 죄악을 모른다. “거인족들조차 유태인과 기독교인의 놀랄 만한 발명인 가책, 잘못 그리고 책임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53) 영웅적인 행위에 따른 죄일 뿐 내면을 공격하는 죄악은 아니다. “기독교에 비할 때 그리스인들은 어린아이들이다.”(55) 그리고 그리스인들의 죄는 대개 인간을 고통에 빠지게 한 신들에게 그 책임이 돌아갔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을 이용했다. 반면 기독교는 “원한(그것은 네 잘못이다) 속에서, 가책(그것은 내 잘못이다) 속에서, 그리고 공통의 결실(책임) 속에서”(55) 현존을 저주한다. “이것이 바로 죄의 그리스적 해석과 죄악의 기독교적 해석 사이의 큰 차이”(55)인 것.

 

그러나 “책임 없음은 니체의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비밀이다.”(55) 이런 니체의 새로운 해석에서 볼 때 그리스와 기독교의 커다란 차이조차 그렇게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어쨌든 두 해석은 현존을 죄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가. “신이 인간에게 불러일으킨 광기의 책임을 자신(신)에게 전가하는 것, 혹은 십자가에 자신을 매달게 했던 신의 광기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해결책은 아직까지는 충분히 차이가 없다. 비록 전자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진정한 문제는 “유죄인 현존”에 누가 책임이 있느냐가 아니라, “현존이 유죄냐 무죄냐이다.”(56) 그리고 여기서 디오니소스는 거인족도, 기독교신도 아닌 생성의 무구함과 존재하는 모든 것의 무구함을 상징하는 전혀 새로운 신이다.

 

모든 것은 자신의 능력만큼만 뭔가를 할 수 있다. 활동은 능력만큼의 활동이고, 활동한 만큼만 능력을 갖는다. 힘과 능력은 분리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의 행위도 비난받을 수 없다. 그런데 어린양의 논법대로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는 맹금의 존재 자체가 비난받아야 할 때, 힘을 발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자유의지의 주체를 날조해낼 때 힘은 그 능력으로부터 분리되고 만다. 이것이 유대적 가치 전도다. 존재의 능력 자체를 박탈해버리는 가치의 전도. 무력하고 고통 받고 궁핍하고 병든 자가 신의 축복을 받는 착한 존재가 되는 가치의 전도 속에서 고귀하고 강력한 자들, 능력만큼의 활동을 하는 자들은 모두 저주받을 자가 되고 만다. 차이가 모순과 적대로 돌변하는 사태가 생겨난다. “무구함은 현존, 힘, 의지의 놀이이다. 긍정되고 높이 평가된 실존, 분리되지 않은 힘, 둘로 나뉘지 않은 의지가 바로 무구함의 최초의 근사치이다.”(58)

 

현존은 죄가 없다. 현존은 결백하고 무구하다. 삶은 본질적으로 정의롭다. 우리가 흔히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이 모든 현존의 모습들- 존재들 간의 셀 수 없는 투쟁은 결코 도덕적으로 논할 수 없는 하나의 ‘미적 현상’일 뿐이며, 현존하는 세계가 보여주는 무구한 주사위 놀이에 다름 아니다. 모든 놀이는 그때그때 주어지는 사건을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과 동시에 예측할 수 없고 소망조차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숙명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면서 긍정하고 사랑할 때 진정으로 행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주사위 놀이는 반복되는 우연을 긍정하는 놀이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우연의 조합, 바로 그것이 운명이다. “니체가 필연(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 그 자체의 조합이다. 필연은 우연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한에서 우연에 의해서 긍정된다.”(63) 필연이 우연에 의해서 긍정되듯이, 존재는 생성에 의해서 긍정되고 일자는 다수에 의해 긍정된다.

 

매 순간이 새로운 창조의 순간일 수 있는 것은 단 한 번에 모든 우연을 충분히 긍정할 때만 가능하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운동이란 “주사위 던지기의 (창조적인) 반복”이며, “우연 자체의 재생산이자 재긍정”이다. 이는 곧 목적론을 배제한 즐거운 혼돈이며 매순간 창조적인 순환이다.

 

현존은 끊임없고 무구한, 목적 없이 즐거운, 우연적인 생성의 연속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의 충동(복수심)은 수세기 동안 너무나 인간을 사로잡고 있어서 모든 형이상학, 심리학, 역사 그리고 특히 도덕이 그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복수심은 “우리 정신의 계보학적 요소”이고, “사유 방식의 초월적 원리”다. 따라서 허무주의와 복수심에 반대하는 니체의 투쟁은 “형이상학의 전복, 인간사로서의 역사의 끝, 과학들의 변화”를 의미하게 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원한과 가책의 입장에서 사유해왔고, 금욕주의적 이상에 지배당해 왔다. 살아간다는 것 혹은 삶의 의지 자체가 부정되고 비판당했다. 그러나 니체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의지를 긍정하고, 모든 부정적인 것을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기존의 사유방식의 계보학적 원리 자체를 재건하는 근본적인 전환, 전적으로 새로운 사유방식의 요구-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즐거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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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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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이라기보다는 수양록에 가깝겠다. 개체적 삶의 무상함과 미소함, 생명의 일회성과 한시성에 대한 자각, 세계의 무한한 변전 속에서 드러나는 우주만물의 연결성과 전체성에 대한 인식, 자연의 본성에 부합하고 섭리에 순응하며 주어진 운명과 소명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충동과 정념에의 경계, 이성에 대한 믿음, 공동체에 헌신하고자 하는 의지(군림하고 지배하고 통치하는 자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난 대목은 없고, 다만 공화주의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강한 공동체 정신과 사회적 책임 의식만이 반복적으로 드러나 있는 점이 흥미롭다), 마음가짐과 생활자세를 다잡기 위한 결의와 각오 등으로 채워져 있다. 참으로 고결하고 아름답고 위대하게 한 생을 살다 간 사람이구나. 

 

*

 

“인간이 사는 시간은 한순간이며, 그의 실체는 유동적이고, 그의 지각은 불분명하고, 그의 육신의 성분은 모두 썩게 되어 있고, 그의 영혼은 소용돌이이고, 그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고, 그의 세평은 불확실하다. 즉 육신의 모든 것은 강이고, 영혼의 모든 것은 꿈이요 연기이다. 또한 삶은 전쟁이자 나그네의 체류이며, 사후의 명성은 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한 가지, 철학뿐이다. 철학이란 우리 내면의 신성을 모욕과 피해에서 지켜주고, 쾌락과 고통을 다스리고, 계획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 거짓과 위선을 멀리하고, 남이 행하든 말든 거기에 매이지 않고, 나아가 일어나거나 주어진 것을 마치 자신이 온 곳으로부터 온 것인 양 기꺼이 받아들이고, 무엇보다도 죽음을 모든 피조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해체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개개의 구성 요소가 끊임없이 다른 요소로 바뀌는 것이 구성 요소 자체에는 결코 무서운 일이 아니라면, 왜 사람들은 모든 구성 요소의 변화와 해체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가? 그것은 자연에 맞는 것이며, 자연에 맞는 일은 나쁜 것이 없기에 하는 말이다.”

 

“이웃 사람이 말하고 행하고 생각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오직 자기가 행하는 것이 올바르고 신의 마음에 들도록 마음 쓰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 여가를 버는가. 선한 사람이라면 주위의 나쁜 성격들을 둘러볼 것이 아니라, 좌고우면하지 말고 목표를 향해 곧장 달려가야 한다. (...) 진실이 어디 있는지 네가 제대로 인식했다면, 남들이 너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생각은 버리고 길든 짧든 남은 인생을 네 본성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라. 따라서 네 본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숙고하고,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에도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참다운 삶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데 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충동과 행동의 원천이 되는 원칙을 갖고 있으면 된다. 어떤 원칙 말인가? 선악에 관한 원칙이다. 그 원칙에 따르면, 인간을 정의롭고 신중하고 용감하고 자유롭게 만들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인간에게는 선이 아니며, 방금 말한 것들과 반대되는 것들을 야기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악이 아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나야말로 불운하구나!’ 천만에!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라. ‘나는 이런 일을 당했는데도 고통을 겪지 않았고, 현재의 불운에도 망가지지 않고 미래의 고통도 두렵지가 않으니, 나야말로 행운아로구나!’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앞으로 너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일이 일이 일어날 때마다 잊지 말고 다음의 원칙을 적용하라. ‘이것은 불운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을 용감하게 참고 견디는 것은 행운이다.’”

 

“존재하는 것들과 생성되는 것들이 얼마나 빨리 우리 앞을 지나 시야에서 사라지는지 가끔 떠올려보라. 사물들의 실체는 쉴 새 없이 흐르는 강과 같고, 그것들의 활동은 지속적으로 변하며, 그것들의 원인은 한없이 다양하고, 정지해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과거의 무한한 시간과 입을 쩍 벌린 미래의 심연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 하거늘 이러한 상황에서 우쭐대거나,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상당 기간 또는 오랫동안 지속될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우는소리를 하는 자야말로 바보가 아닌가?”

 

“네가 그것의 가장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전(全) 실체를 생각하고, 그중 짧고 순간에 불과한 기간만이 너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운명을 생각하라. 너는 그것의 얼마나 작은 부분인가?”

 

“우주의 정신은 공동체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우월한 것들을 위해 열등한 것들을 만들어냈고, 우월한 것들은 서로 협조하도록 만들어놓았다. (...) 열등한 것은 우월한 것을 위하여 존재하고 우월한 것은 서로를 위하여 존재한다. (...) 너도 보다시피 우주는 종속시켰고, 결합시켰고, 각자에게 응분의 몫을 주었고, 탁월한 것들은 서로 화목하게 해놓았다.” (우월한 것=이성을 지닌 인간들, 이성을 지닌 인간들끼리는 서로 선의를 보이며 협력한다는 뜻으로 한 말)  

 

“너에게 어떤 일이 어렵다고 해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가능하고 인간의 본성에 맞는 일이라면 너도 틀림없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라.”

 

“황제 티를 내거나 궁정 생활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기가 쉽기에 하는 말이다. 따라서 늘 소박하고, 선하고, 순수하고, 진지하고, 가식 없고, 정의를 사랑하고, 신을 두려워하고, 자비롭고, 상냥하고, 맡은 바 의무에 대하여 용감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 철학이 너를 만들려고 했던 그런 사람으로 남도록 노력하라. 신들을 공경하고, 인간들을 구하라. 인생은 짧다. 지상에서의 삶의 유일한 결실은 경건한 성품과 공동체를 위한 행동이다.”

 

“네 몫으로 주어진 사물들에 적응하고, 운명이 네게 정해준 사람들을 사랑하되 진심으로 사랑하라.”

 

“언제나 첫인상만 고집하고 네 마음속으로부터 거기에 뭔가를 덧붙이지 마라. (...) 이러저러한 사물에 대하여 의견을 갖지 않고, 그리하여 영혼을 괴롭히지 않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사물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판단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상상을 지워버려라. 더 이상 정념에 조종당하지 마라. 현재 시간에 국한하라. (...) 어떤 외적인 일로 네가 고통 받는다면, 너를 괴롭히는 것은 그 외적인 일이 아니라 그에 대한 네 판단이다. 또한 그 판단을 당장 지워 없애는 것은 너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너를 괴롭히는 것이 네 마음속에 있는 그 무엇이라면, 네가 네 견해를 바꾸는 것을 대체 누가 막는단 말인가? (...)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지배적 이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견을 근절하고 그들의 행동이 끔찍하다는 판단을 버릴 각오를 하라. 그러면 분노는 가라앉을 것이다. (...) 모든 것은 의견에 지나지 않고, 의견은 너에게 달려있음을 명심하라. 따라서 원할 때는 의견을 버려라. 그러면 이미 갑(岬)을 돈 선원처럼 너는 모든 것이 평온한 가운데 잔잔한 바다를 지나 안전한 항구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네가 산란한 마음으로 좇거나 피하는 대상들은 너에게 다가오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네가 그것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라. 그러면 그것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것이고, 네가 좇거나 피하는 모습도 남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가치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의 가치와 일치한다.”

 

“너도 별들과 함께 돌고 있는 양 별들의 운행을 관찰하고, 원소들의 상호 이행을 늘 염두에 두라. 그런 것들에 관한 사색은 지상 생활의 때를 씻어줄 것이다.”

 

“과거를, 그토록 많은 왕조의 변천을 눈앞에 떠올려보라. 그러면 미래사도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미래사는 과거사와 같은 성질의 것이고, 현재사의 리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40년 동안 관찰하든 1만 년 동안 관찰하든 똑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더 볼 것이 따로 뭐가 있겠는가?”

 

“인간의 소질에서 으뜸가는 것은 공공심이고, 두 번째는 육체적 자극에 양보하지 않는 것이다. 이성적 움직임과 지성적 움직임의 특징은 자신을 한정하고 감각적 움직임과 충동적 움직임에 결코 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둘 다 동물적인 까닭이다.”

 

“첫째, 평정을 잃지 마라. 만물은 보편적 본성에 따르고 있으며, 잠시 후면 너도 하드리아누스나 아우구스투스처럼 무(無)가 되어 어느 곳에도 없게 될 것이다. 둘째, 사물을 응시하여 그 실체를 파악하되, 너는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는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를 지체 없이 행하라. 그리고 네게 가장 정당해 보이는 것을 말하되 늘 상냥하게 겸손하게 거짓 없이 말하라.”

 

“인간에게는 인간에게 맞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소에게는 소에게 맞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고, 포도나무에게는 포도나무에게 맞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으며, 돌에게는 돌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각자에게 통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인데 어째서 너는 네 운명에 불만인가? 보편적 자연은 너에게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가져다주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몸이 아플 때 나는 육신의 고통에 관해서는 대화하지 않았고, 문병 온 사람들과도 그런 것들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기왕에 시작한 자연 탐구를 계속하며 어떻게 하면 정신이 육신의 그러한 느낌을 의식하면서도 동요하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고유한 선을 견지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에 전념했다. 그리고 나는 의사들에게도 (...) 내게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양 우쭐댈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는 그때도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았으니까.’ 그러니 너도 몸이 아프거나 다른 상황에 놓이면 에피쿠로스처럼 처신하라. 어떤 상황에서도 철학을 포기하지 않고 철학과 자연에 무지한 사람의 수다에 맞장구치지 않는 것은 모든 철학 학파에 공통된 기본 원칙이기 때문이다. 지금 해야 할 일과 그것을 수행할 도구에 생각을 집중하라.”

 

“우주가 원자의 집합체이든 아니면 질서정연한 전체이든, 나의 첫 번째 원칙은 나는 자연에 의해 지배되는 전체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나는 다른 동종의 부분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을 명심한다면, 내가 부분인 한 전체에서 내게 할당된 그 어떤 것에도 나는 불만을 품지 않을 것이다. 전체에 유익한 것은 결코 부분에 해롭지 않은 까닭이다. 전체는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본성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보편적 본성은 그밖에 어떤 외부적 원인에 의해서도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생성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 따라서 내가 그러한 전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명심하게 되면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와 동종인 부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 모든 노력을 공동체에 유익하도록 조절하고 그와 반대되는 것은 삼가게 될 것이다. 이런 원칙들을 지켜나가면, 동료 시민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나씩 실행해나가고 공동체가 부과하는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시민의 삶이 행복하리라고 네가 생각할 수 있듯이, 삶은 행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가 날 때는, 남자다운 것은 분노가 아니라 온유함과 상냥함이며, 이런 태도가 더 인간적일 뿐 아니라 더 남자다우며, 힘과 근육과 용기를 갖고 있는 것은 이런 성격이지 화내고 불만스러워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생각을 떠올려라. 인간의 성격은 감정에서 자유로워질수록 그만큼 더 힘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슬픔이 허약함의 표시이듯, 분노도 허약함의 표시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인간은 상처받고 항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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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세계 - 유배지에서 성스러움이 가능할까?
이종영 지음 / 울력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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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걸 처음 접했던 게 수유너머가 해체되기 전 해방촌에서 수업 들으면서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삶에 대한 의문과 배우려는 의지와 열망으로 가득했던, 뇌가 가장 순수하고도 말랑말랑하던 시절이었다. 들뢰즈의 영향을 받은 선생님들로부터 니체와 스피노자를 배웠고 딱히 어떤 신앙이나 사상도 아는 게 없던 순수 백지 상태였던 나에게는 그게 일종의 최초의 철학적 각인이었다. 눈 뜨고 처음 받아들인 것이 내재성의 철학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나는 내재성의 철학에 대한 (가히 모태신앙에 가까운) 어찌할 수 없는 믿음이 있다. 만일 그때 해방촌에서 불교 철학을, 바울 신학을 배웠으면 어땠을까. 허풍을 좀 떨면 아마 거기서 도둑질을 가르쳐줬어도 나는 철썩 같이 믿어버렸을 것이다. 뭐 그런 시기였다.

 

그래서, 그런 개인적인 이력 때문에, 자아와 영혼(=영성)을 분리하고, 이 생을 유배로, 환각으로, 영혼의 소외 속에서 자아의 환상에 사로잡힌 이들이 벌이는 무지의 아수라로, 환상적 관념이 만들어낸 세계로, 궁극적으로는 빠져나와야 할 비실재로 여기는 저자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조하기는 어려웠다. 내재성 철학의 각인을 당한 나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 모든 초월적인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설령 존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무명(無明)의 아수라 속에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함으로써 자기 안에 스스로 그에 버금가는 가치를 창안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책 말미에 저자가 인용한 <레 미제라블>의 비엥느뷔 주교의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성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예외이다. 그러나 의인이 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율이다. 방황하라, 죄를 지으라, 무너지라, 그러나 의인이 되라, 죄를 최소화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법률이다. 죄를 전혀 짓지 않는 것, 그것은 천사의 꿈이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죄의 지배하에 놓여있다. 죄라는 것은 일종의 중력이다.” -295쪽

 

이 책은 불교 철학과 교차하면서 라캉의 실재계 개념을 좀 더 종교적으로 육박해 들어가고 있고 그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마음의 성질에 대한 통찰 역시. 그러나 내게 기독교 신앙이 없어서인가. 이 삶을 순례나 유배로 보는 관점 자체에 대해서는 글쎄. 내 생각에, 우리는 어딘가로부터 (순례나 유배를) 떠나 온 게 아니다. 그저 여기, 이 "허무의 왕국"이 우리의 근거지일 뿐이다. 여기서 났고 여기서 소멸할 것이다. 전인권 말대로 그것만이 내 세상이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할 도덕적 자세는 영성을 추구하기보다 투철하게 지옥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몽테뉴와 사르트르와 루쉰의 자세를 존경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나 역시 퍽이나 답답한 듯. 성스러움에 다가가기 위해 자아 및 자아가 쌓은 관념을 버려야 한다면서도 끝내 결론부에 이를 때까지 선악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기독교 진리 안에 머무는 이 책의 저자한테서 답답함을 느낀 것 만큼이나.

 

하지만 여기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종교적 수련을 통해서든 최면과학의 도움에 의해서든 일시적으로 실재계적 상태를 체험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적인 관조, 자아를 놓아버리고 몸을 초월한 경험 -그 또한 역설적이게도 몸을 통해 경험해야 하겠지만- 이후에는 모종의 각성과 회심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나 어쩔 것인가? 높은 고도를 비행하고 돌아오면 우리 앞엔 여전히 치열하게 헤쳐나가야할 상징계적 현실이 주어져 있다. 우리가 걸려든 이 그물망 안에서 우리는 그저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할 뿐이다. 적극적으로 이 기만적인 세계에 빠져들어서 이토록 감각적인 지옥을 사랑하고 지옥을 한결 더 끔찍한 지옥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며 더욱 더 지옥 같이 된 지옥을 다시금 열렬히 사랑하고 지옥에서 춤추고 지옥의 대지에 눈물의 입맞춤을 하는 것. 이 안에서 기꺼이 치욕스런 겁간을 당하는 것. 다시는 태어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온갖 능욕을 다 겪고 싶다. 이것이 회로 안에 갇힌 자의 윤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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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24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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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정치적 기도이며, 제사는 주술적 행위이고, 주연(酒宴)은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염원이다. 그러나 바타유에 따르면 단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정의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노동의 질서와 금기로 촘촘하게 이루어진 세속의 세계에서 전쟁과 제사와 주연은 인간의 억눌린 잔인성과 폭력성, 탕진과 파멸에의 충동이 정당하고도 장엄하게 분출되는 실질적 효용을 갖는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경건한 절차야말로 폭력이 인간 사회의 질서에 성공적으로 통합되는 방식이다.

 

에로티즘 역시 금기와 위반이라는 테제 속에서 설명된다. 그 또한 정교하게 기획되는 위반의 게임인 것. 에로티즘은 자연으로 회귀하여 원초적인 동물성을 무한 발산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에로티즘의 미학을 구현하기 어렵다. 위반이란 금기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금기를 한 번 걷어 올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에로티즘은 존재론적 불균형과 불안과 긴장을 수반하는, 자극적인 즐거움과 고뇌가 공존하는 상태인 것이다.

 

금기의 위반을 통해 일시적으로 강렬하게 분출되는 왕성한 낭비(=폭력, 살해, 파괴, 생식을 초과하는 유희로서의 성욕 등등)에서 전복적 진리를 발견하는 바타이유의 사유는 흥미롭다. 춤판의 속성을 떠올려볼 때 바타유가 논하는 에로티즘은 일견 수긍할 만한 점이 있는 통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시, 금기의 위반을 통해 얻는 쾌락은 찌질한 쾌락이 아닌가 하는 의문. 그야말로 노예적인 쾌락이 아닌가. 압박으로부터의 폭발, 아름다움을 더럽히는 데서 오는 파괴적 기쁨, 공포와 고통 속에서 극대화되는 도취와 희열...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억압적 에로티즘이다. 신경증적 에로티즘이다. 죽음 충동으로 가득한, 강력한 부정의 철학이다. 그가 말하는 에로티즘이 못내 협소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에고의 회로에 갇힌 신경강박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아무래도 먼저 읽은 오쇼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오쇼가 말하는 쾌락은 웅대하고 높은 차원의 쾌락이다. 노예의 쾌락이 아니야. <섹스란 무엇인가>에서 오쇼는 섹스가 단순히 생물학적 결합에서 오는 감각적인 쾌락에서 더 나아가 얼마든지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쾌락으로, 우주와 신성을 만끽하는 쾌락으로 심오하게 확장될 수 있음을 얘기한다. 이것이 바타유가 말하는 '신성의 에로티즘'이라 할지라도 오쇼가 말하는 성적 쾌락은 금기의 위반에서 얻는 쾌락과는 급이 다르다. 오쇼의 쾌락은 어떤 부정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 긍정으로 가득한, 광대한 스케일의 쾌락이다. 바타유의 에로티즘이 고뇌와 고독의 에로티즘이라면 오쇼의 에로티즘은 평화와 자유와 해방의 에로티즘이다.

 

제목과 달리 썩 에로틱한 책은 아니었다. 행간 곳곳에 스며 논지의 전제를 이루는 봉건적 여성관도 그렇고 여기저기 궤변 같아 보이는 대목들 하며. 다만 아래 옮겨 적은 대목은 곱씹어볼 만 하다. 바타유의 이론은 에로틱하지 않지만 그의 철학적 자세는 에로틱해 보인다.

 

"[헤겔 류의] 전문 작업으로서의 철학은 말하자면 하나의 노동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철학은 내가 처음에 언급한 강렬한 감동적 순간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배제한다. 따라서 그것은 가장 일차적이고도 중요한 종합 작업으로서의 가능성의 총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가능성의 총체도, 가능한 경험의 총체도 아니며, 단지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한정된 경험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 지식의 총체일 뿐이다. 전문작업으로서의 철학은 의식적으로 나아가 감정적으로 이질적인 물체를 거부하며, 아무리 강렬한 감동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더러운 것 또는 적어도 오류의 근원, 탄생, 생명의 창조 등과 결부된 것은 마치 죽음을 거부하듯이 거부한다.

 

사실 극단적 인간성, 즉 인간의 성행위와 죽음의 폭발을 외면한 채 오로지 평범한 인간성만을 설명할 뿐인 철학의 기만적인 결과에 놀라는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철학의 이러한 싸늘한 측면에 대한 반발은 키에르케고르는 말할 것도 없고, 니체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근대 철학자들의 특징을 이룬다. 당연한 일이지만 철학은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철학은 (...) 방랑이나 탈선적 사고를 용납하지 못했다. 사실 철학은 다른 데가 아닌 거기에서 심오한 정당성을 획득하지 않던가. 그러나 철학이 규율과 조화로운 노력만을 끌어들인다면, 다시 말해 철학이 어떤 극단성에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철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종합 작업과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철학을 진정한 철학이라고 한다면, 위의 철학은 심오한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철학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 철학은 삶의 극단과 관련된, 내가 어디에선가 ‘가능성의 극단’이라고 표현한 것, 즉 철학적 대상의 극단을 끌어안지 못한 이유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 물론 철학은 죽음에 파묻힐 때, 즉 죽음의 끝인 혼미에 자신을 내던질 때만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철학은 철학을 부정할 때에 한해서, 철학에 조소를 보낼 수 있을 때에 한해서 가능하다. 정말 철학이 철학을 비웃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한 가정은 철학적 계율을 인정하는 동시에 파기를 전제하는데 그러면 이제 철학은 모든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종합 작업이 될 수 있다. 그 총체는 종합이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닌 것이 왜냐하면 그곳은 인간의 노력이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이 무기력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곳이기 때문이다. (...) 나는 이처럼 밖으로 흘러넘치는 극단적 체험을 묘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p.302~303

 

바타이유는 자신이 에로티즘이라고 하는 철학적 가능성의 극단을 탐사하고는 있지만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애당초 노동과 금기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철학의 언어로 에로티즘을 규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넌센스이고 한계를 갖는다는 입장을 보이면서도, "위반 자체가 위반의 담론을 대체하는 결정적인 순간" 직전까지는 접근의 길들을 묘사하는 언어가 의미를 갖는다고 하면서 철학적 불가능에 뛰어든 자신을 변호한다. 금기의 최전선까지 나아가 끊임없이 위반을 시도하고 생명을 빼앗기기 바로 직전까지 위험에 탐닉함으로써 극도의 쾌락을 얻는 것이 에로티즘적 윤리라면- 철학답지 않은 철학, 정통적 흐름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철학, 경계의 철학, 변방의 철학, 외곽에 걸쳐있는 철학, 철학의 외연을 넓히는 철학, 사이비성을 의심케 하는 비주류 철학 따위에의 천착이야말로 철학 탐구에 있어서는 진정으로 에로틱한 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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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16-07-29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해하는 철학도 이쪽 끝으로 갔다 저쪽 끝으로 갔다 중화시켰다 반발했다 하더라고요, 글 재밌게 읽고 갑니다-.

수양 2016-07-31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여러 부류가 있을텐데 성향 때문인지 저는 중화보단 반발 세력에 더 호감이 가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