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놀 책세상 니체전집 1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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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격렬한 충동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방법 이외에 어떤 방법도 발견할 수 없다. 이 방법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성질이 다르다. 첫째, 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들을 피하면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불만족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충동을 약화하고 시들게 할 수 있다. 둘째, 충동을 만족시킬 때 자신에게 엄격한 규칙을 부과할 수 있다. 이렇게 충동 자체에 규칙을 부과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시간을 정하고 제한함으로써 사람들은 더 이상 충동에 의해 교란되지 않는 시간들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를 통해 첫 번째 방법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의도적으로 충동을 거칠고 자유분방하게 만족시키면서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역겨움을 통해 충동을 이겨내는 힘을 획득할 수 있다. 이 경우 죽을 때까지 말을 몰아대다가 결국 자신의 목마저 부러뜨리고 마는 기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방법에서는 그 기수처럼 되는 것이 보통이다.

 

넷째, 지적인 책략[=도덕적 자기 세뇌]이 있다. 이런 방법을 약간 연습한 후에는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생각 그 자체가 늘 즉시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

 

다섯 째, 무언가 특히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을 자신에게 부과하거나 의도적으로 새로운 자극과 즐거움에 몸을 맡기는 방식으로 생각과 육체적인 힘의 움직임을 다른 길로 유도함으로써 많은 힘의 방향 전환을 시도할 수 있다. 아울러 일시적으로 다른 충동을 우대하고 이 충동이 만족할 수 있는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함으로써,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그 격렬함으로 인해 성가시게 되었을 충동이 사용할 힘을 소모할 경우에도 역시 결과는 동일하다. 전자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든 후자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든 이들은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모든 다른 충동들에 일시적인 고무와 축제의 시간을 주고, 전제 군주처럼 군림하려 했던 충동이 혼자 먹어치우려 했던 먹이를 다른 여러 충동들에 나누어 줌으로써 그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섯 째, 육체와 정신의 조직 전체가 약화되고 억제되는 것을 견디고 이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물론 이런 방법을 통해 개별적인 격렬한 충동을 약화한다는 목표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고행자처럼 자신의 감각을 철저히 굶기고, 이와 동시에 자신의 육체와, 종종 자신의 지성도 함께 굶김으로써 쓸모없게 만드는 사람의 방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요약하면, ①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회피하는 것(충동을 굶겨죽임), ②규칙을 충동에 심는 것, ③충동에 대한 포만감과 역겨움을 만들어내는 것, ④고통스럽게 하는 생각(치욕, 나쁜 결과 혹은 모욕당한 자존심과 같은 것)을 연상하는 것, 그 다음에는 ⑤힘들의 방향 전환, 마지막으로 ⑥육체와 정신 전체의 약화와 탈진- 이것이 여섯 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어떤 격렬한 충동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의 권능 밖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가, 이 방법으로 효과를 거두는가 못 거두는가 하는 것 역시 우리의 권능 밖에 존재한다. (...) 우리는 어떤 충동의 격렬함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볼 때 사실은 다른 충동에 대해 어떤 충동이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충동의 격렬함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이 충동과 똑같이 격렬하거나 훨씬 더 격렬한 다른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의 지성이 어느 쪽이든 편을 들어야만 하는 투쟁이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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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책세상 니체전집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백승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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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예술가는 자신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인가? 그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끔찍한 것과 의문스러운 것 앞에서의 공포 없는 상태가 아닌가? -그 상태 자체가 지극히 소망할 만한 것이다; 이런 상태를 알고 있는 자는 이것에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그가 예술가라면, 그가 전달의 천재라면, 그는 그 상태를 전달하며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강력한 적수 앞에서, 커다란 재난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문제 앞에서 느끼는 용기와 자유- 이런 승리의 상태가 바로 비극적 예술가가 선택하는 상태이며, 그가 찬미하는 상태이다. 비극 앞에서 우리 영혼 내부의 전사가 자신의 사티로스의 제의(祭儀)를 거행한다; 고통에 익숙한 자, 고통을 찾는 자, 영웅적인 인간은 비극과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찬양한다- 오직 그에게만 비극 시인은 그런 가장 달콤한 잔혹의 술을 권한다. -163쪽

 

니체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삶이 비극으로 느껴지는가? 비극이란 가장 달콤하고도 잔혹한 술이다. 맛보라. 견뎌보라. 견디면서 음미하고 즐겨보라. 쾌감을 느껴보라. 승리감에 도취되어보라. 너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은 너를 강하게 할지니, 네게 비극을 권한다. 서서히 입안 가득 퍼져나가는 고통과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황홀한 승리의 무아경을 만끽해보라.

 

고통을 신성화하며 마치 독주에 취하듯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생의 비극성에 응하는 강자적 방식이라면, 반대로 분노와 원한 감정에 젖어 비극적 삶의 배후 원인을 추적하고 책임을 추궁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약자적 태도다. 비난하는 일 그러니까 궁핍한 모든 악마를 욕하는 일은 즐거움을 준다. 그러한 행위가 다소간의 권력의 도취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 고통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심리, 그리하여 복수욕의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심리- 그 이면에는 이렇게 은밀한 쾌락을 얻고 권력에의 도취를 만끽하려는 교활한 충동이 깔려있다.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자와 그리스도교인들이야말로 이 같은 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데카당들이다. 전자가 자신의 고통스런 삶의 원인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린다면, 후자는 원죄 개념을 창안하여 그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는다. 전자가 '사회'를 유죄 판결하고 비방한다면, 후자는 '세상'에 유죄 판결을 내리고 비난한다. 전자가 꿈꾸는 복수의 최종 목표 지점이 '혁명'이라면, 후자가 꿈꾸는 복수의 최종 지점은 '최후의 심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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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책세상 니체전집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백승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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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가지 과제가 목표로 하는 것은 모두 고급 문화이다. 보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평정과 인내 그리고 자극의 수용력을 기른다는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고 개별적인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다루어보고 포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성을 위한 첫 번째 준비 교육이다. 특정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고 격리하는 본능을 통제 아래 두는 것[잘 제어하는 것, 가볍게 함부로 끌려다니지 않고, 내 쪽의 균형과 중심축을 유지하면서 잘 drive해나가는 것,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비철학적 용어로 강한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거기서 본질적인 것은 결정을 유예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바로 그럴 능력이다. 비정신적인 것, 천박한 것은 모두 특정 자극에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반응해야만 하며, 개개의 자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런 당위가 벌써 병이고 하강이며 쇠진의 징후이다. 반응하지 못하는 생리적 무능력이야말로 '악덕'이다. 

 

보는 법을 배운 사람들은 서둘지 않게 되고 불신하게 되며 저항하게 된다. 사람들은 적의 어린 평정 상태에서 모든 종류의 낯설고 새로운 것을 자기에게 다가오게 한다. 그리고 그것에서 손을 뒤로 뺀다. 모든 문을 열어 개방하는 것, 온갖 사소한 사실 앞에서도 엎드리는 것,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사물들 안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이와는 반대로 유명한 근대적 '객관성'이라는 것은 나쁜 취향이며 전형적인 저속함이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 이것에 대해 우리의 학교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대학에서조차, 심지어는 철학을 진정 배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마저 이론과 실천과 작업으로서의 논리가 사멸해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춤을 배우려고 하듯 생각하는 것도 배우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이 춤의 일종이라는 것을 더 이상은 희미하게라도 상기시켜주지 않는다. 정신의 가벼운 발이 모든 근육으로 옮기는 그 정교한 전율을 지금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독일인이 누가 있단 말인가!

 

정신적인 동작의 뻣뻣한 무례함, 파악할 때의 굼뜬 손- 이것이 독일적이다. 독일인은 뉘앙스를 타진할 손가락이 없다. 독일인들이 그들의 철학자들을, 그리고 특히 위대한 칸트라고 하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 중에서 가장 기형적인 개념의 불구자를 참아왔다는 사실이 독일적 온화함에 대해 알게 해준다. 이라는 것은 어떤 형식이든 고급 교육과 분리될 수 없다. 다리를 가지고 춤출 수 있지만, 개념들과 말을 가지고도 춤을 출 수 있다는 것; 펜을 가지고서도 춤출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직도 말해야 할까? 사람들이 이런 글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138~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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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5-02-08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조는 그대로 했으나 문장들이 원문과는 차이가 있다. 구미에 맞게 몇몇 문장들은 빼거나 고치고 문단도 자의로 나누었다. 니체는 흰소리와 망발이 지나쳐 때로는 한 대 패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지만 간혹 가다 이런 말을 할 때에는 더없이 대단하게 느껴지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는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고병권 선생님이 쓴 책 <생각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 제목을 이 부분에서 따온 모양이다.

비로그인 2015-02-08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을 머뭇거리다가 다시 왔어요.. 재밌는 글이네요..수양님.. 니체 아저씨요..ㅋㅋ전 그분을 잘 모르지만, 독일인에 대한 저 비판은 충분히 일리있으면서도, 한켠 왜 물은 산이 아니냐 하는것 같아서 ..~~^^
거리를 걷다보면 ˝너희는 도무지 ˝..라는 말이 절로 나와요. 제 입에서도 ^^

수양 2015-02-09 15:40   좋아요 0 | URL
탁월하게 생각되다가도 어쩔 땐 진짜 일베충 같고 근데 또 듣고 있으면 웃기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온갖 복잡한 심사에 휩싸이게 만드는(그것이 그의 연극적 의도일 수도 있겠지만) 참으로 희한한 작자 같아요 니체는...

2015-02-08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09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 (1888~1889) 책세상 니체전집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백승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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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6에서 니체는 실제로 투병 중이거나 아니면 은유적인 차원에서 투병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유용할 만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먼저 병들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원한에 찬 상태라고 전제하고 병자는 오직 하나의 위대한 치료책만을 갖고 있을 뿐이라면서 이를 일컬어 러시아적 숙명론이라 칭한다.

 

러시아적 숙명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행군이 너무 혹독하면 결국 눈 위에 쓰러지고야 마는 러시아 군인의 무저항의 숙명론이다. 혹독한 행군 속에서 러시아 군인은 저항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견딘다. 죽을 때까지 견딘다. 니체에 따르면 이 같은 자세는 단지 죽음에의 용기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역설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가장 치명적인 상황 하에서 삶을 유지하게 한다. 마치 극한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동물이 신진대사를 감소시키고 겨울잠을 자는 것과 같은 이치로.

 

원한이라는 격정에 의해 사람들은 가장 신속히 자기 자신을 불살라버린다. 노여움, 병적인 예민함, 복수할 수 없는 무기력, 쾌락, 복수에 대한 갈망, 모든 의미의 독살- 이런 것은 소진되어버린 자에게는 확실히 가장 불리한 반응 양식이다. 이것은 신경에너지의 급격한 소모나 해로운 배설의 병적 증가를, 이를테면 위에서 담즙의 병적인 분비 등을 발생하게 한다. 원한은 병자에게는 그 자체로 금물이다.”(342)

 

원한은 병자의 생존에 있어 생리학적으로 유해하다. 살아있는 것조차 가까스로 해내고 있는 병자에게는 원한 감정을 불태우는데 기력을 소진하는 행위야말로 목숨을 위협하는 사치이며 낭비다. 자신을 병자로 만든 치명적 환경 및 그러한 환경을 야기한 모든 원인에 대하여 일체의 원한을 철회하라. 이는 도덕의 명령이 아니라 생리학의 명령이다.

 

루쉰이 말했듯 절망은 무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 어디 절망과 희망 뿐이랴. 분노와 원한, 복수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신경에너지를 급격히 소모시킬 뿐인 일체의 그 모든 격정적 반응들이 풍부한 본성의 소유자에게는 (부러 고딕체로 강조까지 하면서) “불필요한 감정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가. 그렇다면 러시아적 숙명론의 태도야말로 유일한 섭생법이다. 궁극의 자기 보존 조치이다. 무서우리만큼의 무반응. 조용히 온몸으로 견디는 것. 스스로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 ‘다른자기 자신을 원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그런 상황들에서는 위대한 이성 그 자체. 요근래 나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사뭇 병자 같다고 느껴져서였을까, 니체가 말하는 이 러시아적 숙명론이란 것을 여러 번 곱씹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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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7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07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몽테뉴와 파스칼 -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이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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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미학적 자기완성을 위해 신 내지는 신으로 상징되는 무한, 영원, 불멸 등의 형이상학적이고 초이성적인 요소 즉 초월성을 필요로 하는가 하지 않는가. 파스칼과 몽테뉴의 차이는 여기 있다. 신본주의자 파스칼과 인본주의자 몽테뉴. 먼저 파스칼.

 

파스칼은 모든 주제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비참’의 현상과 그 이면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실체를 발견한다. 파스칼의 인간학에서 비참과 위대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의 축이다. 그래서 인간은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더 위대하고 반대로 위대하면 할수록 더 비참하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p.59~60

 

파스칼은 비참의 현상 속에서 위대성을 읽어내고 그러한 사고 과정을 '배후의 사고'라 칭하면서, 몽테뉴가 현상적 사고에만 머물며 그것과 한쌍을 이루는 현상 배후의 원인 즉 위대성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파스칼이 보는 몽테뉴는 "비참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인간의 비참을 감지하는 그의 의식의 투명함과 감수성의 다양함은 우리를 매료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는 이 비참을 비참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비참하니까 비참하다는 동의어 반복이 고작이다. 그의 비참은 그 안에서 맴돌 뿐 어떤 탈출구도 없다. 완전히 갇힌 세계이다."(119)

 

인간 인식의 근본적인 한계와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그 어떤 심오한 배후의 실체도 인정하지 않고('신음하며 추구하기'를 포기하고) 다만 현세의 쾌락을 긍정하는 몽테뉴를 신의 아들 파스칼은 불성실하다며 비난한다. 그러나 글쎄, 오히려 파스칼의 인간론이야말로 병리적인 것이 아닐까.

 

파스칼의 인간론은 기독교인 특유의 마조히즘을 보여준다. 니체 식으로 말하면 비참의 한가운데서 위대성을 발견한다는 건 사자가 되지 못한 양떼의 자기연민이자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그것은 피해자의 자기 성화(聖化)작업이며, 원한에 사로잡힌 약자의 위선적이고도 기만적인 세계인식일 뿐이다. 원죄와 추방, 대속과 구원이라는 줄거리는 어떤가. 마음에 인스턴트식 평안을 주는 하나의 괴이한 시나리오가 아닌가. 일단, 나는 죄진 게 없다. 설령 나도 모르게 어떤 끔찍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게 죄가 있다면 그 죄는 오로지 내가 풀어나가야 할 나만의 고유한 과제일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내 책임이며 나만이 나를 구원할 자격을 지닌다.

 

그러나 더는 말을 말자. (그러기엔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지만)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라면 개처럼 짖어대기보다 침묵을 택하자. 다만 이 모든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 파스칼보다는 몽테뉴를 더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오직 근대적 휴머니즘의 영향권 아래서 지적 성장을 이뤄왔고 또 이뤄갈 나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몽테뉴가 견지하는 아래의 입장에 동조한다.

 

[몽테뉴는] 자신이 속해 있고 자신이 인지할 수 있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이 유형의 실재하는 세계만을 자신의 세계로 인정한다. 물론 이 세계는 유한하고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우리는 그 안에서 그 어떤 완전성도, 절대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영역이고 그의 한계다.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 '오, 나의 영혼아, 영원한 삶을 탐내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소진하라', 핀다로스(Pindare)의 이 명구는 바로 몽테뉴의 것이기도 하다. (...) 그는 자연을 넘어서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단호함이 있다. 인간이 자신에게 허락된 조건과 한계 안에 머무는 것은 그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지적 정직성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p.12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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