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1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 조중걸의 서양예술사 시리즈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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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주억이며 읽긴 했지만 몇 가지 의구심도 남는다. 이 책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안 세계관의 변천이 철학적 통합 경향(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 실재론, 합리론 등의 관념론적 신념)과 해체 경향(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론, 유명론, 경험론 등의 유물론적 회의주의)의 진자 운동에 의한다는 전제 하에 각 시대정신의 반영으로서의 예술사를 조망하고 있는데, 이렇게 선제적으로 설정하는 프레임이 확고할수록 거기서 벗어나는 사례들은 쉽게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폄하되거나 아류 내지 부수물 정도로 간과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통시적인 고찰을 위해서는 어떤 기준으로든 선별과 배제가 불가피하다 할지라도- 이론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부득이 확증편향이나 무리한 꿰맞추기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은 아닌지.

흡사 밤하늘에 별자리를 그리듯 환하고 또렷한 맥락을 짚어낸다는 것이 이 책의 독보적인 안목과 장기임에는 틀림없겠으나 한편으로 이런 식의 환원주의적 접근은 분명 어떤 맹점과 한계를 노정하고 있을 것만 같다. 저자의 표현을 이 책에 다시 돌려주자면 이 또한 '횡포에 의해 얻어지는 기하학적 형상'(451)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상은 관점에 따라 전혀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가령 16세기를 르네상스로 17~18세기를 고전주의 시대로 19세기 칸트 등장 이후를 근대로 구분하고 각각을 서로 완전히 단절된 인식론적 지층으로 파악하는 푸코의 시대 구분을 따르게 되면 푸코가 포착하는 각 시대의 독자적 인식 구조에 의해 예술사의 별자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을까.

중세와 르네상스가 실재론이라는 인식틀을 공유했다면 이후 등장하는 매너리즘은 단지 반동적 변이나 일탈의 수준을 넘어서 (지동설, 마키아벨리즘, 종교개혁을 추인하는 유명론-예정설 신앙과 함께) 이전의 르네상스와는 인식론적 측면에 있어서 단절과 전환이라 할 만한 질적 차이를 갖는다는 것, 그런 점에서 르네상스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중세와 근대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적 시기로 봐야 하고 매너리즘은 내용분열 혹은 내용부재의(허울에 불과한 내용의) 형식주의라는 측면에서 이행기에 해당하며 기계론적 합리주의로 대변되는 근대의 본격적인 시작은 사실상 사물에 외재하는 동적 메커니즘을 포착하게 되는 케플러와 데카르트 그리고 바로크의 등장부터라는 얘기,

북유럽 르네상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각각 중세말의 경험론적 세계관과 근세초의 인본주의적 관념론의 반영으로 보면서 북유럽에서는 한층 진보한 중세는 있었으되 인간의 지성이 여전히 신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르네상스 같은 건 없었고(!)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근세의 포문을 연 르네상스라는 것은 사실상 피렌체 고유의 업적이라는, 그중에서도 (후기고딕양식 계열이 아니라) 공간성의 구현에 성공한 조토-마사초-만테냐-페루지노로 이어지는 환각주의 계열의 작가들에 국한된 성취라는 주장,

그리스적 가치를 옹호했으나 정작 그들 자신의 정신적 업적은 고전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에라스무스,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심지어 몽테뉴까지도 르네상스 예술가가 아닌 매너리스트로 분류하고 있는 점, 데카르트 이후 근대의 관심사가 존재에서 운동으로 옮겨감에 따라 탐구의 주제 역시 사물 내재적인 보편 개념에서 사물 외재적인 필연 법칙에 관한 것으로 대체되며 그러한 가운데 존재의 고유성은 사라지고 존재는 그저 필연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추상적 기술 대상으로 전락하는 바, 역동성 속에서 존재를 희석시키는 바로크 회화가 근대의 이러한 경향성과 정확한 일치를 보인다는 것 등등 솔깃하고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한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매너리즘 부분은 이 책의 압권이다.



322쪽 밑에서 4번째 줄: '자연을 담는 예술'과 '예술을 담는 자연' --> '자연을 닮는 예술'과 '예술을 닮는 자연'
325쪽 9번째 줄: 엄격함이 있다 --> 엄격함이 없다
345쪽 1번째 줄: 내재화된 델리커시에 대한 슬픔 --> 내재화된 델리커시에 의한 슬픔
414쪽 7번째 줄: 근대인들이 이해하는 근대란 존재는 --> 근대인들이 이해하는 존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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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서양예술사 : 형이상학적 해명 1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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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한 주제를 일이관지하며 명석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독서의 고난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지적 쾌감을 준다. 개별적인 이해 속에서 막연하게 흩어져 있던 지식의 파편들이 비로소 맥락을 갖추고 전체 가운데 하나의 좌표를 부여받아 그 의미가 선명해질 때 오는 깨달음의 기쁨이 상당하다. 이 분의 저서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작주의를 목표로 하는 게 좋을 듯하다. 모든 책들이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라고 할 만한 일관된 통찰을 공유하는 까닭이다. 물론 이 데이터베이스가 궁극의 해답은 아니며 이 또한 하나의 관점 혹은 입장이라고 해야 옳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적 언명을 바로 이 책 자신에게 돌려주자면 각 시대의 예술에 대한 저자의 형이상학적 해명 역시 실재를 요청하는 자의적 체계이며 이것 자체가 실재는 아닌 것이다.

이른바 대륙철학이 아닌 영미분석철학에 적을 두고 있는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에게 근대의 칸트에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하면서 이후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시도에 대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부연이나 주석 쯤으로 일축해버린다. (저자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 대한 평가는 '기생'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가혹하다. 그러나 푸코를 19세기 환원주의자들의 연장선상에 놓는 견해는 가혹한 정도를 넘어 자못 부당해 보인다. 푸코는 오히려 환원주의를 메타적으로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론의 질서가 미시적 실천 속에서 어떻게 형성 및 구축되고 작동하는지, 지배 담론을 생산하는 권력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을 시도하는 푸코의 중기 작업을 고려해 보면 푸코는 차라리 비트겐슈타인의 사례연구를 수행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저자의 견해를 수용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이 전통 형이상학의 사망을 최종 선고함과 동시에 현대 철학의 본령을 규명한 이래, 철학의 재구축을 위한 오늘날의 새로운 탐구와 모색은 그저 잘해봐야 애처로운 사후 경련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한편으로 현대의 예술은 역사의 검증을 마치고 이미 응고된 것이 아니라 혼돈 속에서 매 순간 미지의 의미를 낳고 있는 미완의 영역이기에 그 종합적 이해와 통찰을 보여주는 형이상학적 해명에의 또 다른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점증하는 의문들은 잠시 접어두자. 걸음을 재촉할 일이다. 거인의 발걸음을 좇다 보면 어느덧 언덕이다. 그 언덕에서 내가 나고 자라온 이 고장의 장대한 풍경을 조감하게 된다. 머릿속이 환해지는 경험이다.



144쪽 1번째 줄: 플라톤이 --> 플라톤의
147쪽 12번째 줄: 예술인한 --> 예술인 한
220쪽 밑에서 8번째 줄: 아니라 사실 --> 아니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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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새로운 길 - 종교적 키치, 예술적 키치, 그리고 구원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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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의 또 다른 책 <키치, 달콤한 독약>과 짝패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독서의 완결성을 위해서는 이 둘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하겠다. <키치, 달콤한 독약>이 주로 키치에 대한 정의와 분석적 통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면, 이 책은 그 적용 범주를 예술 뿐만 아니라 신앙, 윤리, 원리주의, 민족주의, 지성의 영역 전반으로 확장하면서 키치가 출현하게 된 철학사적 맥락과 역사적 배경을 소상히 짚어낸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한편으로는 ‘한 권으로 읽는 서구 문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르주아의 이념적 반동 심리와 졸부 근성에 기원을 둔 키치가 그 어떤 시대보다도 거대서사가 붕괴한 우리 시대에 만연해 있는 병리적 특질이라고 진단한다면, 키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포괄적 조망은 필연적이리라. "우리가 현대를 궁극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과거의 모든 시대들과의 차연의 종합으로서"(156)이기에.

 

쏟아내는 이야기의 규모는 방대하고 그 종합적 해석과 통찰은 날카롭다. 정치, 종교, 사회, 철학, 문학, 예술, 수학, 과학 등등 온갖 방면을 종횡무진하며 흩뿌려놓은 보석 같은 조각들을 하나씩 꿰맞춰 나가다 보면 거대한 그림이 보이는 듯하다. 그동안 밤하늘에 둥둥 뜬 별들을 멀뚱히 올려다보고만 있다가 갑자기 별자리가 만들어지는 현란한 광경을 목도하게 된 것과도 같은 상황이랄까. 넋이 나갈밖에. 때로는 너무나 무리한 주장이 아닌가 저어되기도 하지만, 아마도 저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별자리는 "확정된 사실도 아니고, 항구적이거나 보편적이거나 필연적인 사실도 아니"(170)라고, 이 또한 인간 상상력의 소산일 뿐이며 "오류일 수도 있는 전제"(169)를 필히 가정해야 한다고.

 

행간에 면면히 흐르는 지적 치열함, 당대의 세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어떤 절박성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 결코 이 책을 이렇게 읽어선 안 될 것 같은데, 풍성한 지식의 향연 앞에서 마냥 황홀한 독서 체험이고 말았다. 이 책을 대단히 키치적으로 소화했다는 방증이겠다. 키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개진하고 있는 이 책을, 이거야말로 한 권의 훌륭한 교양서가 아닌가 감탄하며 키치적으로 읽다니 자조할 만한 역설이다. 어쩌겠나. 교양(으로 간주되는 것)을 황홀하게 소비하는 것- 이것이 바로 키치적 태도에 단단히 매몰된 딜레탕트의 한계인 것을.

 

의미의 죽음에 대한 상세하고도 냉엄한 전언이자 그러한 죽음에 대한 안일한 대응으로서의 키치를 고발하고 있는 이 책을 힘겹게 덮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면, 밤하늘은 여전히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다. 의문이 들 수밖에. 모든 의미가 소멸한 이 시대에, 과거의 실재론 또는 합리론 계열의 철학자를 좇는 일은 과연 "병든 행복"(240)에 잠기는 일인가? 의미를 재건하고자 하는 이 시대 철학자들의 시도는 "어리석음이며 위선"(192)에 불과한가? 어차피 우리 모두 새장에 갇힌 신세라면, 실재에 대해 그 누구도 닿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 누구도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면, 결국 어느 산에 오르느냐 하는 선택도, 어떤 산을 건설하느냐 하는 결심도 모두 그저 개인의 기질에 따른 심미적 취향의 문제 즉 "마음의 경향"(275)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이 화단을 휩쓸던 6-70년대에 인물 초상을 고수했던 신사실주의 계열의 화가 앨리스 닐은 "추상은 인간을 외면한다. 나는 여전히 휴머니즘을 지향한다."며 주류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한다. 자기인식적 시대착오는 더 이상 시대착오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키치도 아둔함도 아니며, 다만 또 하나의 결의이다. 책장에 꽂힌 채 어느덧 기약 없는 숙원사업이 되어버린 나의 <존재와 시간>이, 이 책의 매서운 전언에도 아랑곳 않고 여전히 내 마음 속에선 꺼지지 않는 온기와 빛을 발하며 살아있다. "순진한 자부심"(291)인가? 그럴 지도. 그러나 이 또한 "단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내적 요구"(283)일 뿐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을 다소간은 키치적으로, 다소간은 우이독경으로 소화한 셈이 되고 말았다.

 

*

 

사족- 책에도 운명 같은 게 있을까. 그렇다면 이 책의 운명은 험난해 보인다.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워서 외면할 테고, 책을 읽는 소수의 일부는 지적 포만감에 취해 키치적으로 읽을 것이며(그리함으로써 키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개진하고 있는 이 책이 결과적으로는 한 권의 훌륭한 교양서로서 키치적 향락의 대상이 되는 역설에 처할 것이며), 나머지 일부는 그 누구보다 근대 교육 과정을 착실하게 이수한 전형적인 근대인으로서 이 책이 말하는 죽음을 끝내 인정하기 어려울 테니까. 오탈자와 몇몇 불편한 문장이 눈에 띈다. 개정판이 나올 때 다듬었으면.

 

156쪽: 전제군주만이 시민을 어둠 속에 가두지 않는다. → 전제군주만 시민을 어둠 속에 가두는 것은 아니다.
205쪽: 사실주의 예술과 인상주의 예술에 대한 부르주아 계층의 반발은 기득권 계층의 이념은 언제나 지성과 의미 속에 고형화되기 때문이다. → 사실주의 예술과 인상주의 예술에 대한 부르주아 계층의 반발은 기득권 계층의 이념이 언제나 지성과 의미 속에 고형화되는 까닭이다. (제안)
236쪽: 박에 → 박애
304쪽 밑에서 4번째 줄: 만약 그가 새로운 세계에 창조하여 → 만약 그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315쪽 밑에서 5번째 줄: 작품을 상품이나 부르고 → 작품을 상품이라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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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선택 - 세계를 가르는 두 개의 철학과 15가지 쟁점들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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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역사에서 유구하게 반복되어온 '통합'과 '해체'라고 하는 두 가지 상반된 경향성이 15가지 주제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생각해볼 것은 이 책이 취한 '철학의 선택'이다. 이 책에서는 현대에 이르러 철학 사조의 무게중심이 실재론-합리론-관념론 계열에서 유명론-경험론-분석철학 계열로 이동했다고 보고, 흄에서 비트겐슈타인으로 이어지는 해체적 흐름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상대적으로 헤겔, 후설, 하이데거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지젝이나 바디우 같은 사람들로 대별되는 일군의 철학적 입장에 대해서는 키치라고 폄하하거나 별 언급이 없다. 그러나 중세의 오컴 역시 당대의 주류는 아니었듯이, 심지어 이단이었듯이, 키치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사망 선고를 내릴 만한 철학이 과연 있을까. 우리에게는 오로지 재발견되어야 할 철학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 7~8장에서는 이념이 어떻게 당대의 예술 양식에 반영되고 있는지 분석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이런 의문도 든다. 이념이 무릇 예술에 반영되는 것이라면 메인스트림 주변의 서브스트림 역시 비록 희소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현대 예술 사조에 (결코 키치적이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는) 엄연한 이념적 지분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미술사에서의 혁명적 성취는 언제나 당대의 주류적인 흐름을 찢고 나온 이단이 아니었던가. 철학과 예술이 호응하는 양상에 대해 이 책과는 반대로 비주류적 관점(?)에서 조망한 책이 있다면, 이를테면 현대예술에서 해체주의 너머를 모색하는 모종의 맹아적 기미를 포착함으로써 철학의 (시대착오적 회귀가 아닌) 새로운 복권을 기도하는 그런 책이 만약, 정말로, (이 책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있다면, 상보적 독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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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한길그레이트북스 57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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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적 지향을 가진 어느 근대 유럽 남성의 아동 교육 청사진. 18세기에 나온 책인데도 루소가 보여주는 교육에 관한 세태 인식이나 교육자로서의 고민과 문제의식 등이 그리 낯설지 않고 오늘의 우리 현실에도 여전히 울림을 줄 만한 대목이 많다. 다만 루소의 여성관은 시대상을 감안하고 읽더라도 문제적이다. 한마디로 최악이다. 이 책은 루소가 상정한 이상적인 가상의 인물 에밀이 태어나서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양육 과정을 5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1부는 루소의 전반적인 교육관 및 영유아기 양육법에 대한 내용이다. 루소는 에밀에게 신분, 지위, 직업에 맞는 사회화 교육이나 태도 교육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교육을 하고자 한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므로 그들의 공통적인 천직은 인간이라는 바로 그 신분이다. 그러므로 그 신분에 맞게 잘 교육된 사람은 누구든지 그 신분에 관련되는 직업을 잘 해낼 수 있다.” 이러한 루소의 교육은 교훈을 가르치는 데 있다기보다는 단련에 있다. 위험이 닥치더라도 주저하지 않으며, 고통과 시련을 견뎌내고, 신체를 강화하며, 역경을 극복하고, 인생의 선과 악을 감내할 줄 아는 법을 익혀야 한다. 단련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자기 절제와 자기 조절을 할 줄 알고, 어떤 환경에서도 자생자활 하는 능력을 길러 궁극적으로는 행복해져야 한다. 이렇게 자란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가장 잘 느낀 사람”으로 살게 된다. 삶의 목적은 향유에 있으며, 이 목적을 충실히 달성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기르는 것이다.

 

2부는 5~12세까지의 시절을 다룬다. 이 시기의 에밀은 처음으로 용기에 대해 배우게 된다. “가벼운 고통을 겁내지 않고 참음으로써 단계적으로 더 큰 고통을 참아내는 법”을 배우는 시기이다. “큰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는 자잘한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육체가 지나치게 편하면 정신이 부패한다.” 그렇다고 체벌과 위협과 속박으로 아이를 노예로 만들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용기를 기르고 고통을 단련하는데 있어서 놀이는 중요한 수단이며 놀이에서 언제나 즐거움을 느끼고 사랑스러운 천성을 유지하도록 독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이의 신체와 감각이 발달하고 이성의 기초가 싹트게 된다.

 

한편 이 시기의 에밀은 차츰 의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원하는 걸 얻음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 아이의 자립심을 키워주려면 교사는 최소한의 관여만 해야 한다. “나쁜 짓 하는 것을 금지시키지 말고, 막는 것에 머물라. (...) 그가 요구한다 해서 무엇이든 주지 말고 필요하기 때문에만 주어라. (...) 자유롭도록 하기 위해 그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힘만 정확히 그에게 보충해주어라. 그가 당신의 도움을 일종의 모욕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당신의 도움 없이 일을 해나갈 수 있는 순간과, 스스로 제 일을 처리하는 자랑스러운 순간을 염원하도록 하라.” 교사는 아이가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타인의 도움을 통해 얻으려고 하는 지 항상 경계해야 한다. 습관화될 경우 자립은 커녕 타인에 대한 지배욕과 자만심으로 가득한 비뚤어진 천성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이 시기 아이의 훈육에 있어서 중요한 방침은 거절을 남용하지 않는 것, 그리고 만약 한 번 거절하면 절대로 번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당신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조차도 잘 참고 변덕이 없으며 체념할 줄 아는 침착한 아이를 만들 것이다.” 아울러 아이를 지도하는 데 있어서 경쟁심, 질투심, 선망, 허영심, 탐욕, 비굴한 공포 등과 같은 정념을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또한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한 큰 법칙을 정하고 그 안에서 자율에 맡길 필요가 있으며, 만약 잘못을 저질렀다면 체벌하는 대신에 잘못의 결과가 빚어내는 불편한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교훈을 획득하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초기 교육은 전적으로 소극적이어야 한다. 가르치지 말고 모방하게 만들 일이다. 기억력을 연마시키고자 한다면, 알아도 되는 것은 끊임없이 보여주지만 알지 말아야 하는 것은 숨겨서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배려 정도면 충분하다. 교육적으로 적합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 사실 초기 교육은 미덕이나 진리를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다만 마음을 악습으로부터 정신을 오류로부터 지켜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초기 교육의 목표는 타인의 관념, 기성의 스타일, 인습, 틀에 박힌 공식, 남이 가르쳐준 말, 가장된 태도에 어설프게 오염되지 않은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너절한 잡동사니들이 분별없이 주입되어 있지 않은 인간, 훼손되지 않은 인간, 건강하고 순수한 백지 상태의 인간으로 키우는 것이 초기 교육의 목표다.

 

그리하려면 가장 단순한 자극을 섬세하게 제대로 음미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유년기의 중점 교육이란 다름 아닌 오감 계발인 것. 지금 현재, 오늘 하루, 자기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기와 직접 관련된 것들을 향해 모든 감각 기관을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사물이 우리와 맺는 감각적 관계를 인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감관 훈련과 동시에 힘써야 할 것이 신체 단련이다. 단순하고 거친 운동, 날랜 짐승의 몸상태로 만들어주는 운동, 단전을 강화하고 바른 자세를 갖추게 해주는 운동을 해야 한다.  

 

위와 같은 방침에 따라 키워진 유년기 아동의 모습에 대해 루소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관념은 한정되어 있지만 명확하다. 그는 외워서 아는 것은 전혀 없지만 경험을 통해 배워 아는 것은 많다. 그는 다른 아이보다 책을 더 잘 읽지는 못하지만, 자연이라는 책은 더 잘 읽는다. 그의 재기는 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다. 그는 기억력보다 판단력이 더 좋다. 그는 한 가지 언어 밖에 모르지만, 자기가 하는 말은 이해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만큼 말은 하지 않지만, 그가 하는 말에서는 그들보다 더 잘 말한다.”

 

3부는 소년 시절(12~15세)이다. 적절한 시기에 호기심을 느낄 만한 대상을 인공적인 상징물이 아니라 자연물로서 직접 보여주고 질문하게 한다. 이때 아이의 호기심을 잘 다뤄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즉각적으로 호기심을 만족시켜주지 말아야 한다. 제 능력이 허락하는 대로 스스로 문제를 풀게 하고 스스로 이해함으로써 배우게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지식을 수동적으로 배우게 하지 말고 자발적인 탐구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깨우치도록 해야 한다. 오류를 발견하더라도 즉각 교정해주는 것을 피한다. 이 시기에는 학습을 통한 결과물의 수준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원리와 방법에 대한 자기주도적인 이해가 중요하다. 또한 단순히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판단력을 함양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판단력이 있어야 앞으로 습득하고자 하는 지식의 가치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학식을 갖추는 게 아니라, 학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을 갖춰야 한다.

 

이 시기에는 인문사회과학보다 자연과학 위주의 학습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학습에 쓰이는 모든 기구나 도구를 직접 만들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러한 능동적인 활동을 통해 보다 명료하고 확실한 관념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을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고만 있으면 우리의 정신은 무기력 속으로 침몰”한다. 학문이 아니라, “노력하여 학문하는 방법”을, “지식이 아니라, 필요할 때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루소는 이 시기의 에밀이 읽어야 할 유일한 책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꼽고 있는데 이러한 교육 방침과 무관하지 않다.) 과학 법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이론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주변의 자연 현상을 관찰하는 일부터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일상 속에서 아이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경험들이 훗날 연역을 통해 그의 정신 속에서 하나의 원리로서 서로 연결되게 하고 그것이 이론 지식을 축적하는 데 있어서 효과적인 실마리가 되게 해야 한다.

 

이 시기의 학습에 있어서 ‘유용성’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가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지금 배우는 것들이 실제로 어떤 쓰임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배움에 열정이 생긴다. 아이에게는 현재 그가 그 유용성을 알아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가르쳐야 한다. 한편 이 시기의 에밀은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다. 목공과 같은 실용기술을 익혀 장인이 되어야 비로소 운명과 타인의 지배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전문 기술을 갖추고 있으면 비굴해질 필요도, 아첨하거나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인간성에 대치되는 추악한 자질의 정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건강하고 정직하게 열심히 올바로 살아갈 수 있다. 사실, 노동은 사회에 무임승차하지 않고 제 몫의 기여를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인간의 필수불가결한 의무이기도 하다. 일을 배운다는 것은 사회 관계 속에서 타인과 공생하는 법을 깨우치고 시민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소양을 개발하는 과정이다.

 

4부(15~20세)는 교육에 관한 내용 외에도 윤리관이라든가 에피쿠로스적 삶에 대한 지향 등 루소의 다양한 견해가 드러나 있는 장이다. 청년기가 되면 비로소 정념이 에밀을 에워싸기 시작한다. 정념이 꼭 위해한 것만은 아니다. 정념을 악덕으로 만드는 것은 상상력의 오류들이다. 정념의 원천은 자기애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적이다. 정념이 발달함에 따라 에밀은 타인에게 연민과 동정을 느끼고 인류 공통의 불행과 비애와 고통에 대해 성찰하며 비로소 인간애에 눈뜨게 된다. 자기애가 타인에 대한 공감, 나아가 인류애로 확대되는 것이다. 인류애를 고취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운명에 감탄하도록 하는 대신에 운명의 불행한 측면을 보여주어 그에게 두려움을 갖도록 해야 한다.” “불행한 사람들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들의 모든 고통이 자신의 발아래에도 있으며, 수많은 예상치 못한 불가피한 사건들 속으로 자신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것 등을 그에게 이해시키도록 하라. 그에게 신분도 건강도 부도 믿지 말도록 가르쳐라. 그에게 운명의 모든 유위전변을 보여주어라.” “자기 주위의 그런 온갖 심연을 보게 하라.”

 

이 시기의 에밀은 양심, 정의, 선악, 도덕과 같은 것들에 대한 개념을 내면화하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자연 속의 에밀이 아닌 것이다. 지적 이성이 발달하여 추론, 판단, 추상화, 일반화 능력이 생기고 시야가 인간과 사회로 확장됨에 따라 이제는 그 자신의 경험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학습하도록 할 필요가 생긴다. 다시 말해 이제는 역사를 배워야 할 때이다. “판단이 가장 옳은 역사가가 아닌, 가장 꾸밈없이 오직 보여줄 뿐인 역사가”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를테면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려면 개인적인 삶에 관한 책도 읽어봐야 한다. 수에토니우스와 플루타르코스의 책이 도움될 것이다.

 

이 시기에는 우화 문학을 통한 도덕 교육 역시 필요하다. 우화가 주는 교훈을 통해 에밀은 “특별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의 운명을 부러워하지 않고 운명의 유희를 관조하게 될 것이며, 자신이 타인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신에 대해 만족할 것”이다. 한편, 수사학에 대한 교육은 신중히 이루어져야 한다. “수사학에 관한 모든 교육은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순전한 객설에 불과할 따름이다.”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데 말하도록 연습시키는” 꼴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청년기의 에밀이 “꾸밈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본래의 의미로 말을 하며 오로지 자신의 말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기교적인 능변보다 더 중요하게 갖춰야 할 것은 인간을 향한 애정이다. 마지막으로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에밀이 일찍이 어떤 종파에도 소속되지 않도록 하고 훗날 그 자신의 이성에 따라 스스로 종파를 선택하게 해야 한다. 신앙을 갖게 됨으로써 에밀은 양심과 정의와 선(善)과 창조주의 사랑을 알게 된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성급히 사교계에 입성한 청년의 마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호보다 타인의 기호에 대한 관심, 모방심, 위선, 허위의식, 허영, 질투, 분노, 권태, 회한, 자기소외 밖에 자리잡지 않는다. 인간을 알기 전에 세상을 보여주는 일은 그를 올바르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타락시키는 것이다. 에밀에게 떠들썩한 사교계의 덧없는 행복이 아니라, 변함없는 생활의 단조로움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절제된 기쁨을, 조용한 만족과 평화를 알게 해야 한다. 루소의 교육 방침에 따라 내실을 다지며 자라난 에밀은 세상에 발을 들여놓을 때 기죽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타인의 평가에 동요하지 않으며 초연하고 침착하다. 거만하거나 가장된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친절하고 인정 많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세간의 견해에 의거하여 평가하지 않는 그는, 비록 타인의 마음에 들고 싶기는 하겠지만 존경받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정중하기보다는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 될 것이며, 잘난 체하는 태도도 허식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천 번의 칭찬보다 단 한 번의 포옹에 더 감동받을 것이다.”

 

이 시기의 에밀이 힘써야 할 분야 가운데 하나는 취향(삶을 즐기는 자기만의 기준, 문화적 경험과 식견, 교양) 계발이다. 취향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교를 해보기 위해 여러 사회를 경험해봐야 한다. 뿐만 아니라, 즐겁고 여유로운 환경이 갖춰져야 하며, 불평등이 크지 않고 세간의 견해와 횡포가 강하지 않으며 허영심보다는 즐거움이 지배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자신의 견해에 따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요구된다. 사치는 좋은 취향과는 무관하다. “취향이 비용이 많이 드는 곳은 어디서나, 그것은 잘못된 취향이다.” 사실 취향이란 비싸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에 정통하는 기술”이다. 삶의 즐거움은 바로 그런 수많은 사소한 것들에 따라 좌우되며 취향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수단을 부에서 찾지 않는다. “진정으로 관능적인 즐거움을 즐기는 고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것, 그리고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건강을 즐기며 필요물이 모자라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에서 세론이라는 재산을 제거하기만 하면 아주 부자인 것이다.”

 

5부는 스무 살을 넘긴 에밀이 반려자를 찾아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첫머리에서 루소는 에밀에게 배필을 맺어주고자 이상적인 여성상 및 여성 교육 방법론에 관해 설파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너무나 시대착오적이어서 읽기가 힘들다. 참고 읽어 나갈수록 불편함과 역겨움을 넘어 소름 돋는 충격의 대반전이다. 이제껏 참고 들어줬던 루소의 그 모든 장광설이 실상은 '인간'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남성 인간'을 위한 교육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후로는 그나마 읽을 만하다. 후반부에서 루소는 인생관과 여행관을 피력하기도 하고 사회계약에 토대를 둔 시민 사회에 대해 고찰하기도 한다.

 

에밀이 반려자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위기는 상대에 대한 애착과 욕망에서 비롯한다. 애착과 욕망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고뇌, 이것이 에밀의 행복을 위협하는 적이다. 정념의 자기제어야말로 에밀이 완수해야 할 이 시기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루소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덕이 있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정념을 다스리는 것은 이전의 모든 훈련보다 훨씬 힘들다. 자연의 속성과 반대되는, 중력을 거스르는 인간의 의지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가 우리 정념의 희생물이 되게 내버려두며, 우리의 지어낸 불행에 무릎 꿇게 내버려두며, 수치심을 가져야 할 눈물에 대해 오히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내버려둔다.” “우리가 정념을 가지느냐 가지지 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감정은 모두 정당하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를 지배하는 감정은 모두 죄가 된다.” 정념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루소는 지나친 욕망을 절제하여 능력과 욕구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고, 다시 말해 능력을 벗어난 미망에 사로잡히지 말고, 오늘 현재에 충실한 자족적 삶을 살기를 권하고 있다. 또한 주어진 조건과 자연의 섭리와 운명에 순응하고, 삶의 모든 일을 관조함으로써 초탈하는 법을 배울 것을 주문한다.

 

여행은 에밀이 거쳐야 할 교육의 최종 관문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고 배움에의 의욕을 고취시킨다는 점에서 여행은 대단히 교육적이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에밀은 정부의 다양한 통치 형태와 운영 방식 및 사회의 다채로운 풍속과 제도를 접하게 되고, 사회적인 관계에 눈뜨면서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여행은 체험을 통한 일종의 시민 교육인 것이다. 에밀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결혼식을 거행함으로써 이 교육의 대장정은 비로소 마무리를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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